세태를 향한 직선적이고 요란한 논평 – 1960년대 독일의 팝아트

GERMAN POP

독일에서도 팝아트가 있었다? 팝아트는 1960년대 영국과 미국의 일부 미술가들이 주도되어 시작된 지극히 영미권적미술 미학이라 알려져 있다. 독일, 특히 동과 서로 두 국가과 체제권으로 나뉘어져 있던 통일 전 독일에서 서독에서도 자체적인 팝아트 미술 사조가 전개되었다는 사실은 이때까지 대체로 백안시되어 왔던게 사실. 그러한 사실에 착안해 독일에 있는 프랑크푸르트 시른 쿤스트할레에서는 11월 6일부터 내년 2월8일까지 독일 특유의 팝아트의 성격과 그 속에 담긴 사회비평적 특성을 살펴보는 전시회 『독일 팝(German Pop)』 전이 열린다.  전시회 작품 보기

만프레트 쿠트너(Manfred Kuttner), 『타자기(Schreibmaschine)』 1963년, 재료: Typewriter, painted with fluorescent tempera paint, installed on wood 57.8 x 57.8 x 18.7 cm. Stiftung Museum Kunstpalast, Düsseldorf Inv.-Nr. 0.1996.8 Photo: Andreas Hirsch © Estate Manfred Kuttner.
만프레트 쿠트너(Manfred Kuttner), 『타자기(Schreibmaschine)』 1963년, 재료: Typewriter, painted with fluorescent tempera paint, installed on wood 57.8 x 57.8 x 18.7 cm. Stiftung Museum Kunstpalast, Düsseldorf Inv.-Nr. 0.1996.8 Photo: Andreas Hirsch © Estate Manfred Kuttner.

영국에서 리쳐드 해밀턴이 “’오늘의 가정을 그토록 색다르고 멋지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화두로, 대서양 건너편 미국에선 앤디 워홀과 로이 리히텐스타인이 수퍼마켓 제품 포장을 배껴 그리는 것으로써 팝 아트의 본고장 영국과 미국에서 팝 아티스트들은 20세기 후반기 평화 속의 대량생산 대량소비 사회의 갖가지 대중문화 이미지와 라이프스타일을 널리 대중문화의 보편화 현상이자 거부할 수 없는 현실로 인정하며 미술 작품으로 영구히 기록해 찬양했다. 반면 서독의 미술가들 사이에서 전개된 독일판 팝 아트에서는 이 새로운 경제문화 현상이 낳은 일상적 진부함과 소시민적 안일함을 비꼬고 조롱하는 정치적 논조가 더 지배적이었다.

팝 아트가 도시적 미술 형태라는 점, 그리고 이 4 도시가 과거 서독의 경제와 무역을 이끈 주요 도시들이라는 점에서 과거 서독의 핵심 팝 아트의 중심지로서 뒤셀도르프, 베를린, 뮤니히, 프랑크푸르트 4대 도시가 중대한 역학을 했다고 본다. 이들 4 도시들은 저마다 색다른 방언이 있듯이 저마다 다른 ‘시각언어’로 독일식 팝 아트를 발전시켜 1960-1970년대 당시 유럽을 사로잡았던 소비사회 세태를 직설적으로 비판하는 자세를 취했다. 서독의 팝 아트는 젊은 세대들이 기성세대와 가치관에 반항하기 위한 문화운동의 수단으로 활용되었다는 점에서 대중적 이미지를 마냥 찬양하고 글래머화하던 영미권 주류 팝 아트와는 동기부터 달랐다.

람베르트 마리아 빈터스베르거(Lambert Maria Wintersberger) 『분열 제10번(Spaltung 10)』, 1969년, Acrylic on canvas 140 x 115 cm. Museum Morsbroich, Leverkusen © VG Bild-Kunst, Bonn 2014 Photo: Friedrich Rosenstiel, Cologne.
람베르트 마리아 빈터스베르거(Lambert Maria Wintersberger) 『분열 제10번(Spaltung 10)』, 1969년, Acrylic on canvas 140 x 115 cm. Museum Morsbroich, Leverkusen © VG Bild-Kunst, Bonn 2014 Photo: Friedrich Rosenstiel, Cologne.

서독식 팝 아트가 가장 먼저 두드러지게 표출되었다고 평가되는 도시 뒤셀도르프에서, ‘독일 팝’이라는 어휘는 게르하르트 리히터가 제일 처음 사용해 알려졌다. 콘라트 클라펙(Konrad Klapheck), 만프레트 쿠트너(Manfred Kuttner), 콘라트 루에크(Konrad Lueg), 지그마르 폴케(Sigmar Polke),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 같은 일군의 젊은 화가들이 1963년 일명 ‘자본주의적 사실주의(Capitalismt Realism)’로 이름한 서독판 팝 아트 운동을 이끌었다.

제2차 세계대전 패망 이후 라인강변의 기적의 경제재건을 이룩하며 뒤셀도르프와 라인란트를 배경으로 이 자본주의적 사실주의 팝 아티스트들은 지독하게 추상적이고 현실도피적이던 앵포르멜 회화를 버리고 어두웠던 20세기 전반기 독일의 역사를 재평가해 그림으로 그린다는 묵직한 사명감을 주창했다.

정치와 무거운 역사의 수도 베를린의 팝 아트계는 뒤셀도르프 미술 아카데미서 베를린으로 대거 이동해 온 화가들 – 볼프 포스텔(Wolf Vostell), KP 브레머(KP Brehmer), 헤르베르트 카우프만(Herbert Kaufmann) 등 -이 모여 결성됐다.

소비주의 시대가 조장한 소란스럽고 통속적인 세상에서 벗어나 베를린 안 ‘자유세계(Free World)의 섬’에서 조용하게 작업하고 싶다고 선언한 K.H 훼디케(K.H. Hoedicke)나 람베르트 마리아 빈터스베르거(Lambert Maria Wintersberger) 같은 화가들은 1964년 그로쓰괴르셴 35(Grossgoerschen 35)라는 화가들이 주도가 된 화랑을 차리고 그 때까지 유럽 미술계를 숨막히게 잡아쥐고 있던 앵포르멜(Art Informel)과 타시즘(Tachisme)을 전격 배척하고 현실에 기반한 회화로 되돌아가자고 선언했다.

토마스 바이를레(Thomas Bayrle) 『에이잭스 세척제 용기(Ajax)』 1966년. MMK Museum für Moderne Kunst Frankfurt am Main Photo: Rudolf Nagel, Frankfurt am Main.
토마스 바이를레(Thomas Bayrle) 『에이잭스 세척제 용기(Ajax)』 1966년. MMK Museum für Moderne Kunst Frankfurt am Main Photo: Rudolf Nagel, Frankfurt am Main.

그러나 미술사학자들은 독일 특유의 팝 아트의 요람을 프랑크푸르트로 꼽는다. 예나 지금이나 엄밀히 말하건대 프랑크푸르트는 미술의 중심 도시는 아니다. 2차 대전 후 아메리카-하우스(Amerika-Haus)라는 별명으로도 불리던 미군 본부가 설립되었고 미국식 쇼핑몰 거리 차일레(Zeile), 거대한 국제 공항, 세계적인 은행 본사 사무소, 독일  증권거래소가 본부를 두고 있는 가장 미국적인 금융 도시가 바로 프랑크푸르트다.

그러나 토마스 바이를레(Thomas Bayrle)나 페터 뢰어(Peter Roehr) 같은 당시 젊은 서독 출신 화가들은 프랑크푸르트의 바로 이 미국친화적 특성을 감지하고 독일 팝 아트로 직결시켰다. 이 두 화가는 대중 소비자를 상대로 대량생산판매되기 시작한 샴푸, 인스턴트 커피, 가전제품을 신문, 잡지, TV를 통해 떠나갈듯 선전하는 당시 광고 이미지로부터 영감받아 소비주의성 자본주의의 프로파간다성과 저급한 상업주의 이데올로기를 미술로 드러냈다.

한편 뮤니히에서 활동하던 젊은이들, 예컨대 SPUR, WIR, GEFLECHT 같은 아티스트 단체들은 대중만화책에 등장하는 대화 풍선 같은 요소를 그림에 도입하는 등 팝 대중문화에 대한 의구심을 품었던 한편으로 대중소비주의 미학에 담긴 특유의 미학에 야릇한 매력을 느꼈다. 이 젊은 화가 단체들은 급기야 예술가 홀로의 고독한 천재성이라든가 창조의 유일무이성 같은 신화에 의문을 가하기도 했지만 집단적 미술 창조라는 측면에서 결정적인 변혁을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영미식 무비판적, 소비문화 찬양적 “코카 콜라 식민화(Coca-Colonization)”과는 아주 다른 목소리와 색채를 띠었던 서독의 팝 아트는 자본주의 상업문화와 소비주의 문화를 비판하며 일찍이 포스트모더니즘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그런 만큼 영미식 팝 아트에서 느껴지는 가벼움와 글래머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래서 독일식 팝 아트는 일반 관객에게 어딘지 모르게 무겁고, 철학적이다 못해 따분하게 느껴지진 않을까? 어느 정도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미술 운동이 1968-69년 유럽, 미국, 일본의 청년들을 문화혁명이라는 저항과 운동으로 불거지기까지 저변에 들끓던 의식의 발현이었다는 점은 미술사학적으로나 사회문화사적으로 주목할 만하다. 『독일 팝(German Pop)』 전은 독일 금융의 중심도시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시른 쿤스트할레에서 2015년 2월 8일까지 열린다. Images courtesy: Schirn Kunsthalle, Frankfurt am Main.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