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탠리 큐브릭의 눈

EYES WIDE OPEN – STANLEY KUBRICK AS PHOTOGRAPHER

“그의 눈은 짙고 촛점이 분명했으며 꿰뚫듯 날카로왔다.” 스탠리 큐브릭의 아내 크리스티안느 할란(Christiane Harl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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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nley Kubrick, 쇼걸 로즈머리 윌리엄스의 사진을 찍고 있는 스탠리 큐브릭(Showgirl – Kubrick photographing Rosemary Williams), 1949. Courtesy Museum of the City of New York, Gift of Cowles Communications, Inc. © SK Film Archives, LLC.

인류 영화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히는 20세기 영화사의 거장 스탠리 큐브릭(Stanley Kubrick, 1928*-1999†). 그의 대표작 《닥터 스트레인지러브(Dr. Strangelove)》《2001:스페이스 오디세이(2001: A Space Odissey)》(1968년)《시계태엽 오렌지(A Clockwork Orange)》(1971년)《아이스 와이드 셧(Eyes Wide Shut)》(1999년)을 비롯해 큐브릭은 완벽한 영화 스토리라인을 구축했던 전설적인 영상 이야기꾼으로서 영화사의 한 획을 그었다.

어릴적부터 학교 공부에 전혀 관심이 없었고, 고등학교 시절 내내 툭하면 결석하고 학교 성적이 너무 나빠 고등학교 졸업할 즈음이 되자 갈 수 있는 대학이 한 곳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군대 지원도 할 자격도 안될 지경이었다고 그는 1965년11월27일 제러미 번스타인과 나눈 76분 짜리의 『뉴요커(The New Yorker)』지 라디오 인터뷰에서 고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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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서 로키 그라치아노의 초상(Rocky Graziano – Portrait), 1947. Courtesy Museum of the City of New York, Gift of Cowles Communications, Inc. © SK Film Archives, LLC.

제2차 세계대전이 거의 끝나갈 무렵, 미국을 포함한 연합군은 이미 추축군에 밀려 주춤거리고 있을 시기. 거의 꼴찌로 고등학교에서 벗어난 큐브릭은 같은 또래 남들이 전쟁에 징병되어 군대를 가고 학자금 빚을 내어 대학에 진학하고 편한 오피스 직장을 찾느라 허둥대며 경쟁하고 있을 동안 자기만의 열정을 키우고 있었다.

그가 열 세살 나던 해 아버지가 사준 그라플렉스 카메라로 늘 사진찍기를 해왔던 그는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그 대신 『룩(Look)』 격주간 잡지에서 프리랜스 사진가로 일하기 시작하면서 바로 직업 세계로 뛰어들었는데, 때는 공자가 말한 남자에게는 ‘지학(志學)’의 나이를 바로 뒤로 한 꽃 같은 나이 16세.

1945-50년 이 미국 시사 매거진에서 포토저널리스트로 일하는 동안 청년 큐브릭은 나중 영화감독이 될 때를 대비하며 날카로운 눈과 카메라 기술을 연마하고 있었다. 그의 작업 방식에 대한 질문에 큐브릭은 “내가 원치않는 것은 찍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이 전설적인 영화감독은 한 번도 정식 영화 학교나 대학교육을 받지 않고 독학한 감독이었던 만큼 그의 작품 속에는 언제나 강한 자기의지와 독립적 성격이 담겨있다.

5년 동안 사진을 기고했던『룩』매거진 시절, 피사체의 성격과 본질을 포착하고 그 모든 요소들은 분위기와 타이밍에 적절하게 포착한 후 독자적인 내러티브로 발전시키는 큐브릭 특유의 이야기 만들기 수법에 자양분 역할을 해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룩』매거진에서 몸담고 있던 마지막 해로 접어들 무렵, 큐브릭은 전에 없이 더더욱 비일상적이고 외로운 운명을 짊어지고 가는 개인들의 삶을 사진으로 담아내며 처절한 외로움, 알 수 없는 운명과 이에 맞부딛힌 20세기 인간적 조건을 탐색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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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nley Kubrick, 창가에서 대본을 외고 있는 여배우 벳시 폰 퓌르스텐버그(Betsy von Fürstenberg – Reading a script in the windowsill), 1950. Courtesy Museum of the City of New York, Gift of Cowles Communications, Inc. © SK Film Archives, LLC.

이번 비엔나 쿤스트룸에서 열리는 『아이스 와이드 오픈(Eyes Wide Open- Stanley Kubrick as Photographer)』 전 (2014년 5월8일-7월13일)은 큐브릭이 전설적인 영화감독이 되기 전 그의 예술적 뼈와 살에 영양분 – 그리고 창조를 향한 자유의지와 독립성 – 을 주었던 사진가로서의 삶과 작업을 재조명해 보면서 창조인의 위대한 창조력과 창조적 삶이란 이 가치관 추구를 향한 한 편의 여정에 다름아님을 시사한다.

《아이스 와이드 셧(Eyes Wide Shut)》을 마지막 작품으로 끝내고 난 후 70세의 나이로 잠 속에서 세상을 떠난 스탠리 큐브릭은 나이가 들어가면서도 내내 그 특유의 소년같은 가볍고 명랑한 미성의 목소리 – 그리고 청명한 정신력과 유머감각-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푸릇푸릇 젊은 나이의 큐브릭이 군대로 징병되지 않아 제2차 세계대전 통의 광기 통으로 휘말리지 않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또 틀에 밖힌 제도권 기초 교육과 대학 교육 체제로부터 세뇌당하지 않아 지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훨씬 자유로웠기 때문이었다.

학교에서 빚어지는 큰 실수는 아이들에게 분별없이 아무것이나 가르치고는 성적이 나쁠까봐, 학급에서 뒤떨어질까봐 무서워 공부하도록 만드는 공포를 기본 동기로 이용한다는 것이다. …

얼마나 더 여러 케이스의 특출난 인물들이 실은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받았던 모범생도 아니었으며 대학 졸업증을 받은 고학력도 아니었음이 밝혀져야, 또 일류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도 실제 인생살이에서는 줄줄이 실패를 면치 못하고 자기아집에서 못벗어난채 허우적대는 불행한 사람들이 얼마나 수두룩함을 증명해야 현대인들은 자식들을 제도권 교육체제라는 족쇄로부터 해방시킬 것인가? 명배우 말론 브란도가 큐브릭을 묘사했듯이 창조적 마인드란 배운 것을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능력이 아니라 스스로 인지하고 소화시킨 것을 자기만의 시점에서 재창조할 줄 아는 능력인 것을. All images courtesy: BA-CA Kunstforum, Vien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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