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회화사 1,200년

MASTERPIECES OF CHINESE PAINTING 700-1900

옛 것과 역사의 전통을 배우고 익혀 새로운 이치를 깨닫게 된다는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의 정신에 입각할 것 – 이 원칙은 과거 서양미술이든 중국미술이든 공히 미술을 창조하는 자라면 알고 있어야 할 기본 정신이자 갖춰야할 태도였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역사의 중요성을 잊은채 살아가는 수많은 현대인들은 이 무슨 고리타분한 공자의 말이냐며  눈살을 찌푸릴지도 모르겠다. 허나 철학자 조지 산타야나(George Santayana)가 “역사를 망각하는 자는 역사를 되풀이하는 댓가를 지불할 것”이라 경고했듯, 역사를 모르는 인간과 민족에게는 혁신도 진보도 기대할 수 없음은 거역할 수 없는 역사적 진리다.

올 가을, 영국 런던 빅토리아 앤 앨버트 박물관에서는 매우 보기드문 야심찬 고미술 전시회가 전시의 막을 올렸다. 과거 1,200백년 중국 회화사를 총마라한 중국 회화 걸작품 약 70여점을 해외 미술기관과 사설 소장처로부터 대여해와 전시하는 『중국 회화 걸작전(Masterpieces of Chinese Painting, 700-1900)』전에서는 이제까지 중국회화사 대학교재에나 볼 수 있었던 중국 미술사상 걸작 대표작들을 한 자리서 직접 만날 수 있는 매우 드문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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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세기 초엽 송나라 휘종이 그렸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풍속도는 새로 짠 비단천을 정리하는 궁녀들의 모습을 묘사했다. Photograph © 2013 Museum of Fine Arts, Boston.

과거로부터 20세기 초엽까지 중국 회화의 역사를 변함없이 가로지른 미학적 개념은 다름 아닌 전통(tradition) 대 혁신(innovation) 간의 상호작용.  시대의 변천에 따라 중국 화가들이 구사했던 양식 속에는 저마다 색다르게 구현되었지만 그 속에는 언제나 전통을 완벽하게 체득하고 모사하고 이해・소화한 끝에라야 비로소 화가 개인만의 독창적이고 혁신적인 양식을 탄생시킬 수 있다는 중국 미술의 원칙이 깔려있다.

신앙과 제례를 위한 미술 – 8세기〜10세기 중엽 이 시기 중국에서 제작된 대다수의 회화작품들은 불교 제례용 또는 제물용도로 쓰일 목적으로 무명 장인이나 승려들의 손으로 극도로 완성도 높게 제작되었다. 예컨대 『승복 차림을 한 보살(Bodhisattva Wearing Monastic Robes)』같은 작품은 화려하고 선명한 색상의 안료를 비단 화폭 앞뒤 양면에 여러차례 세심하게 그리고 또 그리는 수법으로 제작되었다. 이를 통해서 이 법화는 벽에 걸어 놓고 보는 2차원적 그림이 아니라 조각작품처럼 3차원적 공간에 걸어두고 사방 어디서나 보고 감상하도록 한 설치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불교를 탄압했던 당나라 시대 9세기 중엽, 대다수 불교 미술은 당나라 황실의 박해의 손길이 채 미치지 않았던 중국 북서부 돈황(敦煌)지방으로 건너가 그 맥이 유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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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미술의 제1 황금기로 꼽히는 당나라 시대. 당나라 시대 세속화로 그려진 두루마리 삽화 그림에서 볼 수 있듯 8〜10세기라 해서 모든 그림이 불교미술은 아니었다. 『The Five Planets and Twenty-eight Constellations (detail)』 Unidentified Artist; traditionally attributed to Zhang Sengyou, Date: 960 – 1127 © Osaka City Museum of Fine Arts.

사실주의를 향한 모색 – 10세기 중엽〜13세기 중엽 종교화와 인물화가 주를 이루던 이전 시대에서 한 걸음 벗어나, 이 시대가 되자 화가들은 자연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산과 강 경치, 동물과 식물들, 변화하는 사계절과 경치 속을 오가는 여행객들과 어부들의 모습. 이 모두 이 시대 화가들의 면밀한 관찰의 대상이 되어 화폭으로 옮겨졌으니, 이렇게 하여 중국 미술계는 전에 없던 산수화의 시대를 전격 개척하기에 이르렀다.

이 시대가 되자, 비단 위에 찬연한 색상으로 구사한 고급 채색화는 주문에 응해 그리는 화원계열(畵院系) 직업 화가가 궁중이나 고관대작들의 실내장식용 미술로 그 영향력이 제한된 반면, 한결 개인주의적이고 창의적인 문인출신 아마츄어 화가들은 종이에 검정 묵 만을 사용한 흑백 수묵화의 새 경지를 이룩해 고결한 미감을 떨치기 시작한 때가 또 이 시대다.

북송파 산수화의 대가 범관(范寬)과 나란히 송나라 산수화 양대 산맥을 이룩한 연문귀는 이른바 “연가경치(燕家景致)” 양식을 구축해 산수화 대가로 이름을 날리며 황실화가로 일했다. 연문귀(燕文貴)의 산수화는 범관풍 기념비적 산수화에서 볼 수 있는 우뚝선 높은 악산 풍경에 한 술 더떠서 사사로운 세부적 풍경까지 곁들여 넣어 그렸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범관의 남성적이고 우직한 양식에 비해 한결 섬세하고 고적한 분위기와 시적 아름다움을 풍기는 것으로 평가받는 연문귀의 그림은 그래서 부채 같은 작은 개인용 소지품용으로 즐겨 사용되곤 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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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문귀의 『정자가 있는 산수 (Landscape with Pavilions)』 10세기 경 © Osaka City Museum of Fine Arts.

회화는 은둔자의 벗 – 13세기 중엽〜15세기 중국 회화 이 시기는 몽골족이 중국  남송 왕조를  무찌르고 원나라를 세워 중국 황실의 대를 이어나갔던 오랑캐의 집권 시절이었다. 다수민족이던 한족(漢族)은 과거 남송 시절 활발하고 번창했던 상업과 자유로왔던 문화적 분위기를 뒤로 하고 노예계급으로 전락해 억압적이고 민족차별적인 정치적・사회적 분위기에 처하게 이르렀다.  소수의 지식층과 불교 승려들은 세속적 출세를 포기하고 자연 속으로 귀의하여 그림그리기, 서예, 시를 벗삼아 일평생을 보냈는데, 그 결과 원나라의 화단은 다시 한 번 출중한 언더그라운드 화가들에 의해 선도된 매우 독창적이고 예술성 높은 미술 세계를 이룩하는 결과를 낳았다.

남송 시대까지 황실 화가로서 주문화를 그리던 기술 뛰어난 화원계 화가들은 원나라 시대가 되자 예술분야의 지원이 사라지면서 황실에서 자취를 감추고 지방으로 귀향했다. 그런가하면 남송 시대와 한족이 주도하던 정통 중국황실에 대한 향수를 버리지 못했던 선비층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문인화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또 이곽파로 불리는 일군의 화가들은 북송 시대에 유행했던 대규모의 기념비적 양식의 산수화를 다시 한 번 회생시켜 중국 회화를 재정의하고 싶어했다. 이후 원나라 말엽으로 치달아가면서, 선비 화가이자 탁원한 서예가였던 조맹부(趙孟頫)는 남송시대의 인문주의 정신과 송나라 강남의 산수풍경을 모범으로 삼은 복고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혼탁해진 세상을 뒤로 하고 자연에 귀의한 선비들과 불교 승려들에게 미술을 더 이상 자연에 대한 관찰과 사실적인 묘사의 수단이 아니었다. 그림은 은둔자의 내면세계, 감정상태, 사색과 명상이 담긴 표현 수단이 되었고, 그러하다보니 자연히 그들의 그림은 기술적 완성도나 손재주 보다는 저마다 독특한 개성적인 양식과 철학을 담은 한결 주관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예컨대, 원말 4대가중 조맹부와 왕몽(王蒙)은 남송풍 산수화를 통해서 역경의 시대 속에서도 굳건히 이겨내야 한다는 지조와 인내의 미덕을 표현하고자 했다. 왕몽이 그린 『무너진 다리에 핀 향기로운 눈꽃』은 늦겨울 눈 속을 뚫고 피어나오는 매화꽃을 이용해 매란국죽(梅蘭菊竹) 사군자(四君子)에 담긴 문인을 상징한다. 그런가하면 승려 화가 석계(石恪)는 단순하지만 단호한 필치와 색상으로 자유분방하고 즉흥적인 그림을 그려 선불교 정신을 탁월하게 담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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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계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二祖調心圖 (Two Chan Patriarchs in Contemplation)』 13세기, Tokyo National Museum, Japan. Image © TNM Image Archives

중국 회화의 르네상스 시대, 15세기〜17세기 중국의 명왕조 시대는 유럽의 르네상스 시대와 비견될 수 있는 중국 문화의 최고 절정기였다. 원왕조가 물러나고 한족이 지배하는 명나라가 중국 황실을 계승하자 선비층 지식인들은 다시 속세로 복귀했고 경제는 부흥했으며 사회문화 분위기는 활기를 되찾았다. 이를 입증하듯, 임인발(任仁發) 그림으로 추정되는  『네 가지 즐거움』에는 선비가 아끼는 4가지 즐거움 – 서예, 그림, 음악, 장기 – 취미활동을 그림으로 표현해 놓았다.

명나라 미술을 중심지로 다시금 중국 남부의 항주, 남경, 소주가 급부상하며 저마다 화단를 형성했다. 경제가 재부흥하고 그림에 대한 수요가 높아지다 보니 화가들은 다시금 값비싼 고급 장식용 그림을 주문받아 그리기 시작했다. 그런 분위기를 반영하여 화가들은 종이 대신 고급 비단 위에 귀하고 비싼 안료를 소재로 한 그림들을 유독 많이 그리기 시작했다. 원나라 시대 하에서 핍박받던 한족 사대부들이 그토록 목마르게 그리워했던 과거(송나라를 포함한 그 이전 시기) 고전이 다시 유행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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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영(1495-1552) 『Saying Farewell at Xunyang (detail)』 16세기 초반 The Nelson-Atkins Museum of Art, Kansas City. Photograph: John Lamberton.

과거 역사나 문학작품에 등장했던 일화와 낭만적 인물에서부터 명지와 명소, 정원, 희귀하고 아름다운 동식물에 이르기까지 자연과 인간의 아름다움을 그림으로 그려 한껏 향유하며 감상했다. 예컨대 공필(工筆)법의 달인이던 구영(仇英)은 환한 청녹색 물감으로 환상적 분위기의 산수화를 잘 그렸는데 그의 그림은 언뜻 당나라 시절 유행하던 환상적인 전설그림을 떠올리게 한다. 관료시험을 실패한 후 선비화가가 된 토근(杜堇)의 그림에는 중국에서 전족관습이 일반화되기 전 당나라 시대(10세기 이전)에 대한 향수를 표현이나 하듯 후궁들이 자유롭게 공놀이하던 모습을 담았다.

전통에 대한 도전, 17세기〜20세기 1616년, 중국은 명나라의 멸망과 함께 다시 한 번 북쪽에서 내려온 오랑캐의 지배하로 들어가게 되었다.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는 한족과 여진족 사이의 민족적 갈등에도 불구하고 유럽과의 무역증대와 문물교류, 농업의 발달, 상업의 활성화로 근대적 개념의 신체제를 구축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런가하면 기인적 성품과 매우 독특한 양식으로 과거 전통에 도전한 화가들도 있는데, 특히 팔대산인(八大山人, 본명 주답(朱耷))은 그 대표적인 예다. 오늘날까지도 특정 화파로 규정하기 어렵도록 독자적인 양식을 구축했던 그는 본래 명나라 영왕의 후손이었으나 영왕의 피살사건 후 세속을 버리고 수도승이 그림을 그렸던 ‘기인’이자 개인주의 은둔화가로 유명하다. 그가 남긴 길이 14미터 두루마리 회화 걸작 『강 위의 꽃』은 오늘날까지 전해오는 동양화 그림중에서 길이가 가장 긴 그림중 하나로 꼽힌다. 72세의 나이로 그려낸 이 대작은 팔대산인의 탁월하고 절묘한 묵 처리 재주로 보는이의 감탄을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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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대산인 『강 위의 꽃』1697년 © The Tianjin Museum Collection.

세속 세계 청나라 화단도 전에 없이 많은 문인화가들이 과거 회화 명인들의 작품을 보고 베끼고 재해석하면서 동시에 서로 각축하고 있었다. 옛 명대 지식인들이 취미와 풍류 삼아 하던 그림그리기는 시가와 서예와 더불어서 교양있고 취향이 고결한 기품있는 문인이라면 당연히 갖춰야할 기본적 소양이 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러하다보니 이 시기 회화들은 언뜻 보기에 기량이 미숙해 보이는듯한 아마츄어풍 문인화가 기술적으로 완벽하게 그려진 직업화가의 그림 보다 정신적으로 훨씬 고매하고 우월하다고 여겨졌다. 그같은 관점이 보편화되기까진 명나라 말기부터 활동하며 중국 회화론을 재정의한 문인 겸 화론가 동기창(董其昌)의 공이 결정적이었다.

중국인들의 아편 중독, 무역 재정 불균형과 고갈, 더 잦아진 외세열강의 침탈 끝에 결국 청왕조가 해체된 1212년 2월까지, 청나라 궁중화가들은 황실을 통해 들어온 유럽 미술가들로부터 그 이전까지만 해도 과거 중국 그 어디서도 보지 못한 회화 기법들(원근법, 명암법 등)에 잔뜩 매료된채 다가올 격동의 20세기 초반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전시명: 중국 회화사 1,200년 (MASTERPIECES OF CHINESE PAINTING 700-1900) | 전시 장소: Victoria and Albert Museum London | 전시 기간: 2013년10월26일-2014년 1월19일. Images courtesy: The Victoria & Albe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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