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thly Archives: January 2015

가난 – 미래 보편적 라이프스타일이 될 것인가?

BEING POOR, WILL IT BECOME A FUTURE TREND?

영국 웨일스 카디프 시에서 열리는 아르테스문디(Artes Mundi) 현대미술 연구소가 주최하는 올해 제6회 아르테스문디 비엔날레에서 우수상을 받은 렌초 마르텐스(Renzo Martens). 네덜란드서 태어나 브뤼셀과 킨샤사를 오가며 작업하는 다큐멘터리 비디오 예술가인 그는 전쟁과 재난으로 폐허와 빈곤에 허덕이는 곳들을 찾아 여행하며 작가 스스로를 다큐멘터리 영화의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부유하고 자기중심적 시점을 가진 구미인이 제3세계인들이 겪는 경제적 정신적 트라우마를 관망하며 ‘소비’하는 현상을 포착한다. 다분히 이기적이고 냉소적으로 보일 수 있는 그의 비디오 작품은 오늘날 폭력, 파괴, 가난 같은 시련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제1,2세계인들이라 하여 미래 닥칠 위기로부터 영원히 자유로울까고 질문하며 경고하는 듯하다.

Episode 3, 2008. pal, 16:9, color. 90:00. Courtesy the artist and Galerie Fons Welters.

From the Episode 3, 2008. pal, 16:9, color. 90:00. Courtesy the artist and Galerie Fons Welters. In ‘Episode 3’ Martens travels to the ruined Congo, interviewing photographers, plantation owners and locals; he acts the role of journalist, colonist, modern day missionary and development aid worker. His film focuses on one observation: poverty is Africa’s biggest export product, and, as with other natural resources of the Congo, it is exploited by the West through media. Lecturing locals assertively on ideas of poverty as commodity, he encourages them to sell their own photographs of starvation and death, not let Western photojournalists profit from their humanitarian disaster.

한 천재의 초상 – 렘브란트

REMBRANDT 400 in Amsterdam

화가, 데상가, 판화가 – 렘브란트는 네덜란드 미술의 황금 시대(Dutch Golden Age)라고 불리는 17세기 바로크 미술의 거장으로 이미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거장 화가이다. 2006년은 거장 렘브란트가 태어난지 400년째가 되는 해로, 고국 네덜란드에서는 이 나라의 자랑스러운 아들이자 세계적인 화가의 생일을 맞아 대대적인 전시회 및 문화 행사를 기획했다.

렘브란트의 작품들이 대거 소장되어 있는 암스텔담의 릭스무제움(Rijksmuseum)을 비롯해서 반 고흐 미술관, 렘브란트의 옛 거주집을 박물관로 전환한 렘브란트하우스(Rembrandthuis)는 물론이고 런던의 덜위치 갤러리, 베를린의 고전 미술관,  헝거리 부다페스트 미술관, 그리고 파리 주재 네덜란드 문화원인 커스토디아 재단(Fondation Custodia) 등 유럽 전역에서 거장 화가 렘브란트의 작품은 물론 그가 살던 17세기 네덜란드와 유럽의 정황을 엿볼 수 있게 해 주는 유익한 전시들이 올 한 해와 내년 초에 걸쳐서 줄줄이 이어지고 있다. 이미 잘 알려져 있지만 여전히 가시지 않는 신비와 마력으로 현대인들을 사로잡는 렘브란트의 자화상 그림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22세의 젊은이로서의 렘브란트 자화상. 1628년 작품. © Rijksmuseum, Amsterdam.

“세세한 것에 대한 이해와 경험을 지닌 화가는 위대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 위대한 화가의 재능은 경이로운 것이다. 신은 위대한 화가에게 재능을 선사하여 그의 그림을 통해서 여느 사람들은 발견할 수 없는 것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 르네상스 시절 독일 출신의 회화의 거장이자 렘브란트의 선배 화가였던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는 말한 적이 있다.

천재라는 개념에 대한 다분히 르네상스적인 정의로 들리는 면이 없지 않지만 신화 알레고리, 성서 해석, 역사화, 초상화에 이르기까지 미술의 여러 장르는 넘나들며 독자적인 경지를 이룩한 렘브란트의 미술 생애는 끝없고 정처없는 탐험이었고 누가 뭐라해도 분명 탁월한 것이었다.

한 인간의 인성은 그가 타고난 여러 속성과 자질을 모두 도합한 것 이상의 그 무엇이라는 말이 있다. 렘브란트의 작품 속에서 발견되는 탁월한 기술적 재능 외에도 밝고 어두운 빛의 강한 대조를 통한 극적 분위기와 심오한 내면세계가 느껴지는 그림 속 인물들의 심리 묘사는 오늘날까지도 시공을 초월하는 인간적 조건(human condition)을 되돌이켜 보게 만드는 보편적 위력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패기 넘치는 22세의 곱슬머리 젊은이의 모습에서부터 삶의 무게와 내면적 고뇌를 머금은 60대의 노인의 모습까지 화가의 초상을 화폭으로 옮긴 자화상의 명인으로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렘브란트는 지금도 그의 삶과 작품 속에 깃든 신비에 매료를 느끼는 수많은 낭만파 회화 애호가들 사이에서 사랑 받고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올해는 네덜란드가 국가적으로 지정한 ‘렘브란트의 해’이다. 올[2006년] 여름 7월15일 토요일, 네덜란드의 수도 암스텔담과 화가의 고향 라이덴(Leyden)에서는 네덜란드가 자랑하는 렘브란트의 400번째 생일을 축하했다. 유명한 역사적 인물을 내세운 국가적 문화 행사가 흔히 그렇듯 ‘렘브란트의 해’를 맞는 네덜란드에서는 렘브란트 스파게티와 초컬릿 등 렘브란트를 내세운 마케팅 홍보로 관광객 유치와 문화 상품 매출에 열을 올리는 상혼도 발휘되었다.

하지만 “렘브란트의 어머니”(라이덴 라켄할 시립 박물관(Municipal Museum of Lakenhal), 올 3월19일까지 전시 마침) 展, “렘브란트와 카라바죠”(릭스무제움, 올 6월 18일까지 전시 마침) 展, 그리고 가장 최근 일반 관객에게 문을 연 “렘브란트-천재성을 향한 탐구”(현재 독일 베를린 고전미술 박물관(Gemäldegalerie Berlin)) 展을 통해서 미술계는 렘브란트에 얽힌 신비를 해독하고 이 거장이 예술 한 평생 동안 이룩해 놓은 미술사적 성과를 차분하게 종합 재평가 해 보는 기회로 삼고 있다.

동시대에 활동했던 역시 네덜란드 출신의 동료 거장 화가 얀 베르메르(Jan Vermeer)의 경우와는 다르게 렘브란트의 일대기와 행적은 기록으로 잘 보존되어 있고 따라서 렘브란트에 대한 미술사적 연구는 이미 많이 이루어져 있는 상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렘브란트의 일생과 작품과 관련하여 지금도 속시원히 풀리지 않은 의문점들은 남아 있다.

흔히 일반인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렘브란트는 그의 극적이고 신비로워 보이는 회화 작품들만큼 평생을 빈곤과 투쟁하며 그림을 그렸던 낭만적 화가였을까? 렘브란트는 유태인이었나? – 생전 화가는 유태인 출신의 철학자 스피노자(Spinoza)와 랍비 메나세 벤 이즈라엘과 친하게 지냈으며 <유태인 신부(The Jewish Bride)> 같은 유태인 주제의 작품을 여러편 남겼다는 사실에 미루어 그가 유태인이 아니었을까 하는 일각의 추측이 일기도 했는데, 이 같은 의문점을 화두로 삼아 네덜란드의 유태인 역사 박물관(Jewish Historical Museum)에서는 오는 11월부터 내년 초까지 “유태인 렘브란트(The Jewish Rembrandt)’라는 전시가 개장을 앞두고 있다.

게다가 렘브란트는 수많은 제자와 화실 조수들의 도움을 많이 본 화실 지휘자였다. 그로 인해서 ‘렘브란트의 작업실 (Rembrandt’s Laboratory)’로 불린 대규모 아텔리에를 운영하며 제자들에게 그림을 그리도록 하여 밀려드는 그림 주문에 응했는데, 그 결과 지금도 렘브란트의 진품(眞品) 판정 기준을 세우는데 전문가들을 혼란케 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Rembrandt Harmensz. van Rijn (1606–1669) 『Self-Portrait in a Cap』 1630 Etching, 51 x 46 mm. Gift of J. P. Morgan, Jr.

눈을 끄게 부릅뜬 서른살 난 화가의 자화상 또는 원제 『모자를 쓴 화가의 자화상 (Self-Portrait in a Cap)』 1630
Etching, 51 x 46 mm. Gift of J. P. Morgan, Jr. © The Morgan Library & Museum.

그래서 렘브란트와 그의 작품세계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단체인 램브란트 연구 프로젝트(Rembrandt Research Project)을 이끌고 있는 에른스트 반 데 벤터링(Ernst van de Wentering) 관장은 “그동안 대중 매체를 통해서 미화되어 오던 신비로운 인물로서의 렘브란트의 이미지를 접어두고 신선한 시각으로 이 화가의 예술적 창조력과 내면적 동기가 어떻게 작품으로 표출되었는가를 점검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하르멘조온 반 라인 렘브란트(Harmenszoon van Rijn Rembrandt)는 1606년 7월 15일 라인강을 바라보며 자리해 있는 라이덴(Leiden)에서 제분업을 하는 중산층 집안의 열 명의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강가 주변에 그림처럼 서 있는 풍차가 있는 전형적인 목가적 풍경 속에서 성장한 그는 학자가 되길 기대했던 부모의 바램에 따라 라틴어로 학습하는 인문 학교에서 교육받았으나 결국 맘 속에 품어왔던 그림에 대한 열정을 포기하지 못하고 17세부터 그림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3년 동안 반 쉬바넨부르흐 밑에서 기초 그림 수업을 받은 후 보다 더 큰 물에서 그림을 배우고자 마음먹은 그는 수도 암스텔담으로 가서 당대에 유명했던 역사 화가 피터 라스트만(Pieter Lastman) 밑에서도 6개월간 수학했다. 렘브란트의 불후의 명작이자 현재 릭스뮤제움의 한 전시실 벽을 가득 메우고 있는 대작 단체 초상화 <야간 경비(The Night Watch)>는 이 때 배운 역사화 구성 능력이 렘브란트의 본령인 초상화술과 한데 어우러져 창조된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군계일학을 짚어내는데 능했던 당시 눈썰미 좋은 귀족들 덕분에 젊은 렘브란트의 남다른 재주는 일찍이 발굴되었다. 방년 19세의 청년 렘브란트는 분명 놀라운 재능을 발휘해서 고작 3년 반 가량의 그림 수업을 마감하고 고향 라이덴으로 귀향하여 동료 화가인 얀 리벤스(Jan Lievens)와 동업하여 개인 화실을 열었다. 22세 되던 해 렘브란트는 네덜란드의 오렌지 왕가의 눈에 띄어 헤이그 궁전의 실내 장식용 그림을 그리게 되었는데 이는 직업적 화가 렘브란트가 수주한 그림 주문 제1호이자 동시에 암스텔담에서 온 헨드릭 윌렌부르크(Hendrick Uylenburgh)라는 유력한 초상화 딜러와의 인연을 맺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청춘은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했던가. 환희 펼쳐질 성공한 화가로서의 미래를 앞두고도 <22세의 젊은이로서의 자화상>(1628년 작)은 젊은 렘브란트의 또다른 내면을 암시한다. 렘브란트의 트레이드마크라고 할 수 있는 극적인 키아로스쿠로 (chiaroscuro) 효과 즉, 강한 명암의 대비 기법이 잘 나타나 있는데, 자유분방하게 헝클어진 머리와 앳되어 보이는 통통한 뺨과 대조적으로 어둡게 가려진 눈매는 젊음과 촉망 받는 미래를 앞두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남몰래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에 떨고 있던 화가의 내면 한구석을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성공적인 직업 화가의 길을 본격적으로 개척하기 위하여 암스텔담에서 화실을 개업한 방년 25세의 렘브란트는, 그로부터 3년 후인 1634년에 그의 아트딜러인 윌렌부르크의 여사촌 사스키아(Saskia)와 결혼했다. 사스키아가 귀족 출신의 여성이라는 잇점 때문에 렘브란트는 결혼 후 상류층 고객들로부터 그림 주문을 받을 수 있었고 그렇게 수주한 그림 주문 덕택에 큰 돈을 벌기도 했다.

렘브란트가 1656-58년 경 그린 이 자화상은 50살을 갓 넘긴 화가의 모습을 담고 있다. ⓒ Kunsthistorischesmuseum. Wien.

허나 비싼 집을 구입하고 값비싼 골동품과 옷을 사들이는 일을 좋아했던 화가의 낭비벽 때문에 곤혹을 치루기도 했는데, 지금도 네덜란드 관청 자료실에는 과거 렘브란트가 가족, 채권자들, 미술 후원자들은 물론 모델들과 얽혀 들었던 수십 건의 금전적 분쟁 기록들이 남아 있어서 이를 증명해 주고 있다.

이미 서른 무렵의 나이에 결혼, 직업적 성공과 유명세, 사치스러운 생활을 경험한 그는 <눈을 크게 뜬 자화상>(1630년 작)이라는 판화 속에서 놀람, 환희, 슬픔 등 모순적인 인생의 희로애락의 감정들이 묘하게 뒤섞인 채 어리둥절해 하는 자신의 모습을 표현했다.

렘브란트의 개인사를 연구한 전문가들에 따르면 그의 사생활은 그다지 본받을 만한 것만은 아니었다고 지적한다. 렘브란트는 갓 서른을 맞는 아내 사스키아를 폐결핵으로 때이르게 잃었고 그 이후로 10년 가까이 붓을 들지 못했을 정도로 극심한 슬럼프를 앓았다. 혹자는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깊은 슬픔이 그 같은 위기의 원인이었다고 설명하지만 역사학자들의 생각은 좀 다르다.

사스키아가 죽은 후 렘브란트는 아들의 보모로 집에 들인 게르체 디륵스(Geertje Dircs)라는 여성과 불륜의 관계를 유지했고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전 아내 사스키아의 사촌이자 딜러 윌렌부르크가 렘브란트로부터 그림 주문을 끊은 것이 렘브란트가 일을 못하게 된 진짜 이유였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디륵스와 지내는 동안에 22세난 젊은 여시종 헨드리케 스토펠스(Henrickje Stoffels)와도 바람을 피워서 게르체에게 위자료를 물어주게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사치와 무분별한 돈관리로 곤경을 겪고 있던 렘브란트는 결국 50세 되던 해에 파산 신고를 내고 갖고 있던 재산을 모조리 탕진하고 말았다.

보수적인 청교도적 신앙이 지배하던 당시 17세기 네덜란드 사회는 제아무리 천재 화가라 할지언정 절제력이 부족한 렘브란트를 고운 눈으로 봐 주지 않았다. 30대 초엽 잠깐 맛 본 부와 명성을 끝으로 그는 죽음을 맞기 직전까지 빚쟁이들에 쫏기던 가련한 화가로 살다가 생을 마감했으며 덩달아서 생전 그의 미술 세계는 거의 이해 받지 못했다. 그러나 예술의 가치는 사생활 보다 인생을 예술로 승화시킨 작품으로 평가 받아 마땅하다.

그가 죽고 난 후 100년 후 18세기 말엽부터 인간의 내면적 갈등과 극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낭만주의(Romanticism) 사조가 유럽을 휩쓸기 시작하면서부터 비로소 렘브란트의 자화상 연작들은 인간 영혼 탐색과 심리적 여정의 미술적 자취로써 재평가 받기 시작했다. 2006년 400회째 생일을 맞아 신화나 신비의 베일을 벗고 다시금 전시회를 통해 재점검 받고 있는 렘브란트는 숨가쁜 일상 속의 현대인들에게 자아 숙고의 순간을 제공해 줄지도 모른다. Photos courtesy: Rijksmuseum Amsterdam/Gemäldegalerie Berlin.

*이 글은 원래 『오뜨』 誌 2006년 9월호에 실렸던 글을 다시 게재하는 것입니다.

 

제2회 코치-무지리스 현대미술 비엔날레 2015

KOCHI-MUZIRIS BIENNALE 2014 IN FORT KOCHI, INDIA

Images from Kochi Biennial 2014. Titled “Whorled Explorations” , the second edition of artist-curated (this year curated by Jitish Kallat) Kochi-Muziris Biennale gathered 94 artists from India and around the world to contemplate and comment on Globalization in the context of the this former vibrant and rich port city of world spice trade, science and literature. Art works by participating artists are often serious and soothing in tone without being pretentious; overall earthy, comforting, and involved with materiality; evoking physical presence of five basic elements of nature and core materials of all human civilisations – wood, fire, earth, metal, and water. Photo credit: Kochi Biennale Foundation.

2014년 12월12일부터 2015년 3월29일까지 약 3개월 반 동안 진행될 인도 최초의 현대미술 비엔날레 코치-무리지스 비엔날레 2014가 제2회의 막을 올렸다. 이 신생 현대미술 행사는 현재 인도 현대미술계를 가장 잘 대표하며 국제적인 활동을 벌이고 있는 인도 현대미술가중 한 사람인 지티시 칼랏이 예술감독 지휘봉을 잡아 “Whorled Explorations”라는 대제목을 달고 인도 내외 현대미술인들이 오늘날 가장 흔해진 문화 키워드 “글로벌리제이션(Globalization)”을 미술 작품들을 통해 조망하고 논평한다. 세계 또는 세상이라는 의미의 “월드(World)”와 빙글빙글 소용돌이 치다는 의미의 “훠얼(whirl)”을 합성한 듯히 들리는 중세 영국 형용사 “Whorled”(원래 회전바퀴라는 뜻)는 국경없이 얽히고 섥히고 다양복잡해져 팽창해진 글로벌화된 세상풍경을 잘 응축한다.

과거 현대미술 비엔날레 행사는 흔히 정치인들과 정부 정책가들이 도시개발과 문화산업을 위해 도입하기 시작했다는 이유로 중앙 및 지방정부의 예산을 쓰고도 여간해서 일반관객들과 쉽게 친해지지도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반면, 정부와 정치가들이 주도된 예산 삭감, 조직운영 방훼 같은 난관과 고충에도 불구하고 미술가들이 주도가돼 2013년 발족한 코치-무지리스 비엔날레는 돈과 시장의 논리가 판치는 현대미술계 속에서도 여전히 미술시장의 구미에 맞추기 보다는 미술가들의 독자적인 창조 의지가 더 돋보여 한 조각 신선한 바람처럼 느껴질 만하다. 아니나 다를까. 이제까지 현대미술을 접근해 본 경험이 없던 인도의 일반대중 관객들까지도 이번 비엔날레를 감상하고 좋은 반응을 보이며 이러한 문화행사를 더 요구하게 됐다는 긍정적 평가를 남겼다.

일본적이어서 세계적인 건축가 아라타 이소자키

Arata Isozaki. Japan Architect 지, 제61호, July 1986년 7월호, 9쪽.

Arata Isozaki. Japan Architect 지, 제61호, July 1986년 7월호, 9쪽.

ARCHITECTURE OF ARATA ISOZAKI

동서가 만나는 공간
고희(古稀)가 넘는 나이에도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아라타 이소자키(Arata Isozaki 磯崎新,  1931년 7월 23일 생)는 오늘날 일본을 대표하는 가장 일본적인 생존 건축 디자인의 대가다. 이소자키는 뉴욕의 유명한 팔라디움 디스코텍 (Palladium, 1985년)와 같은 포스트모던풍의 현란한 공간에서부터 지극히 일본적 정적감이 감도는 스위드 파월 (Swid Powell) 가구사 본사 건물(1984년)과 1992년 바르셀로나 몽쥬익 올림픽 주경기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양식의 건축 디자인을 소화해 낸 바 있다.

또 그런가 하면 건축계에서는 깔끔하면서 단정하면서도 세심한 디테일이 돋보이는 아라타 이소자키의 건축 스타일이 가장 전형적으로 구현된 작품으로서1986년에 완공된 미국의 로스앤젤레스 컨템포러리 아트 미술관 (LA MoCA: Los Angeles Musuem of Contemporary Art)을 꼽는다. 적색 벽돌, 대형 유리, 금속을 주소재를 이용해 지어진 LA MoCA 건물은 그가 “…창조성, 형태와 색채의 대담성, 용의주도하게 계산된 디테일링”을 탁월하게 이룩해낸 일본 출신의 국제적 건축가임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대중 사회를 위한 건축

Kitakyushu City Museum of Art (1972–4)

키타규우슈우 시립 미술관 (Kitakyushu City Museum of Art) 건물은 아라타 이소자키의 메타볼리즘 양식 시대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 (1972–4년)

일본 큐슈에서 태어나서 동경 대학에서 겐조 단게 밑에서 건축을 공부한 그는 1954년 대학을 졸업하자 마자 스승을 뒤이어 일본의 국가 대표급 건축 대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30대의 이소자키가 활동하던 1960년대, 미래에 본격화될 대중 사회를 대비하여 대규모의 융통적이면서도 유기적으로 자생가능한 건축 및 도시 설계를 주창한 일본의 메타볼리스트 건축 운동 (Metabolist Movement)에 잠시나마 영향을 받았던 그는 1963년에 독자적인 건축 사무소인 아라타 이소자키 앤 어소시에이츠 (Arata Isozaki & Associates)를 개업하고 현대적인 첨단 건축 기술과 건축적 실용주의를 겸한 건축을 설계하는데 심취했다. 1966년에 일본 오이타 현(縣)에 완공된 시립 공공 도서관과 시립미술관 건물들은 바로 1960년대 메타볼리스트 건축 운동의 영향이 강하게 엿보이는 사례로 꼽힌다.

일본식 포스트모던 건축 구축
그러나 1970년대 이후부터 이소자키는 일본 바깥으로 눈을 돌려 자신의 작업 반경의 폭을 넓혀가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추구해 오던 일본적인 미감과 공간적 해법과 다소 정형화된 박스형 건물 형태를 내던지고 보다 불규칙하고 실험적인 형태를 실험하기 시작했는데, 적황회색의 자유분방한 형태를 자랑하는 도바타 소재 기타 큐슈 시립 미술관(1974년)과 중간이 불룩한 배럴형으로 설계된 오이타 현 후지미 클럽하우스 건물(1974년)은 첨단 건축 시공 기술에 힘입어 시도된 이소자키의 형태적 실험성을 잘 보여주는 대표작들이다. 오카노야마 그래픽 미술관 (1982-84년)과 츠쿠바 시민 센터(1983년)는 각각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신전을 현대화한 듯한 차용적 요소와 서양의 역사적 건축 양식을 두루 뒤섞은 듯한 절충주의가 두드러진 포스트모던풍 건축물들이라고 평가할 만하다.

자칫 이소자키의 건축은 장식이 절제되고 엄격한 미니멀리즘으로 느껴질는지도 모르지만 실제로 그의 건축 실물을 직접 접해 본 관객은 예상치 못한 친근감과 아늑함을 느끼곤 한다. 최대한의 공간감을 연출하기 위하여 높은 천정과 탁트인 실내 공중 공간을 확보하고 유리창을 활용하여 인공 조명등 보다는 외부로부터 자연광이 내부로 들이치도록 하여 따뜻하고 친근한 실내 분위기를 창조하기 좋아하는 이소자키 특유의 유희 감각 덕분이다.

아라타 이소자키가 설계한 미국 마이애미 시에 있는 배스 미술관(Bass Museum of Art) 건물. 2001-2005년. Image: Bass Museum of Art.

아라타 이소자키가 설계한 미국 마이애미 시에 있는 배스 미술관(Bass Museum of Art) 건물. 2001-2005년. Image: Bass Museum of Art.

이소자키가 자신의 건축 스타일을 가리켜서 스스로 명명한 ‘순수 양식화된 일본풍화 (japanesquization)’ 스타일이 그 특유의 유머 감각과 잘 어우러진 예는 1989-90년에 완공된 미국 플로리다 주 올란도 소재 팀 디즈니 빌딩(Team Disney Building)을 꼽을 만하다. 초대형 원통형 건물 위에 해시계를 얻어 놓은 듯한 이 디자인은 대담한 색상과 형태는 물론 즉흥적인 유희 감각 면에서 포스트모던 건축의 대표작임에 틀림없다.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다시 태어난 건축가 이소자키
이소자키는 실내 디자이너 겸 제품 디자이너로서도 탁월한 색채 의식과 유머 감각을 발산하여 특히 구미권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가장 최근, 19명의 초국제급 스타 건축가 및 실내 디자이너들이 저마다의 공간 창조력을 무한대로 발휘한 “꿈의 호텔 프로젝트”로 화제가 된 스페인 마드리드의 푸에르타 아메리카 호텔 실내 디자인에 참여한 바 있는 그는 자신의 본령인 일본풍 현대 인테리어를 다시 한 번 실현해 보였다.

그가 담당한 이 호텔 10층의 객실 인테리어는 미묘하고 편안한 분위기를 안겨주는 전통 일본식 실내를 환기시킨다. 특히 욕실은 전통 일본식 욕실에서 볼 수 있는 통나무로 된 욕조가 은근한 미색을 발휘하며 명상적인 분위기로 연출되었고, 침실 공간은 적백흑 3색 위주의 공간 및 액세서리와 쇼지(障子) 공간 분리대로 장식된 것이 인상적이다.

구미권 건축계를 일본에 교육시켜 온 건축 이론가 겸 사상가로서뿐만 아니라 건축 및 인테리어 디자인 프로젝트를 통해서 가장 일본적인 현대 건축을 구미권에 소개하고 있는 아라타 이소자키의 열정은 80세 산수(傘壽)를 바라보는 나이에도 지칠 줄 모르고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