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thly Archives: September 2014

럭셔리 시장 진입 지금이 적기다.

HOW TO LAUNCH A BRAND INTO THE LUXURY MARKET

Thomas Hart Benton (American, 1889-1975) "City Activities with Dance Hall" from 『America Today』 1930-31. Mural cycle consisting of ten panels. Egg tempera with oil glazing over permalba white on a gesso ground on linen mounted to wood panels with a honeycomb interior.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Gift of AXA Equitable, 2012.

1930년대 경제공황기 미국과 유럽에서 대다수 사람들은 경제불황으로 고생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일부 상류층들은 전에 없이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다. 세계 경제공황기 시대상을 미국 벽화로 그렸던 토마스 하트 벤튼의 벽화 연작 『오늘날 미국』 중에서 “댄스 홀에서 벌어지는 도시인들의 활동상”, 1930-31년 작. Thomas Hart Benton (American, 1889-1975) “City Activities with Dance Hall” from 『America Today』 1930-31. Mural cycle consisting of ten panels. Egg tempera with oil glazing over permalba white on a gesso ground on linen mounted to wood panels with a honeycomb interior. ©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Gift of AXA Equitable, 2012.

과거 돈이 아주 많은 사람을 백만장자라고 부르던 시대는 가고, 이젠 가진 재산의 액수에 영이 10자리가 붙는 억만장자가 되어야 ‘부자’의 대열에 설 수 있게 된 억만장자의 시대가 되었다. 지난 10월 『포브스 (Forbes)』브라이언 김범수 카카오톡 설립자 겸 회장의 기사를 실으며 한국의 새로 출몰한 억만장자들에 대한 기사를 실었듯, 이젠 제1세계 뿐만 아니라 개발도상국 여러나라와 브릭(BRIC) 국가들로부터 전에 없는 많은 수의 억만장자들이 등장해, 2014년 현재, 전세계 통틀어 억만장자의 수는 1천6백4십5명으로 집계되었고,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부의 액수는 6천6백6십 천조($ 6.4 trillion)에 이른다. 그중에서도 톱 100명 억만장자들이 소유하고 있는 부의 액수는 미화기준 총 3천4백6십 여억 우리돈으로 360 여 조에 달한다.

전세계적으로 중산층은 점점 그 층이 얇아지며 하층으로 이동해가며 양극화하고 있는 가운데, 이젠 천 6백명이 넘는 억만장자들과 200 백 만명이 넘는 백만장자들이 북적대는 명실공히 수퍼리치의 전성시대가 되었고 그 수는 앞으로도 더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대중을 상대로 싸고 많이 파는 박리다매가 여전히 돈을 버는 방법이기는 하나, 동시에 이들 수퍼리치를 상대로 한 초고가 럭셔리 시장은 전에 없이 번성하고 있다. 수퍼리치 혹은 메가리치들의 숨은 욕망과 소비행태를 잘 파악하고 그에 적절한 마케팅 전략을 구사한다면 비교적 단기간 내에 럭셔리 시장에서 브랜드를 구축해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지금 만큼 적기가 또 있을까?

새 브랜드로 럭셔리 제품 시장에 하루 빨리 진입해서 성공하는 비결은?

어떻게 하면 새 브랜드로 럭셔리 제품 시장에 런칭할 수 있을까? 우수 브랜드로서 명망을 얻는다 함은 물론 최고 품질의 제품 라인을 제공하는 것과 연관되어 있지만 그또한 능숙한 홍보를 통해서 촉진되고 강화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글쓴이 셰리단 윈 (Sheridan Winn)은 한 요트배 생산 업체가 단행한 대담한 성공 벤쳐 사례를 들어서 그 비결을 소개한다.

침울해 보이는 한 편의 흑백 사진 속에는 성난 파도 속을 헤치며 항해하고 있는 나즈막하고 날렵한 배 한 척의 모습이 보인다. 그 사진 밑에는 로고와 함께 ‘템테이션 언리시드 (Temptation Unleashed)” 즉, 고삐 풀린 유혹이라는 뜻의 소표제어가 쓰여져 있다.

자, 이제 펄 모터 요트배 (Pearl Motor Yachts)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모름지기 요트배의 세계라 하면 부副와 럭셔리, 세련된 고난도 테크놀러지와 까탈스러운 제임스 본드의 성미도 족히 즐겁해 해 주기에 손색없이 복잡한 주변 작동 장치들이 집약되어 있는 공간이다.

이 회사는 5년 전에 이안 스몰리지 (Iain Smallridge)가 창립했다. 온화하고 낙관적인 성품을 지닌 35세의 그는 의욕적이고 추진력있는 사람이다. 남 프랑스에서 요트 운전 기사로 일한 경험을 토대로 스몰리지는 상류사회의 생활에 대한 통찰력을 얻고는 자기 고유의 배를 지어보자는 결심을 품고 영국으로 돌아왔다. 당시 스몰리지는 사업 동반자의 집 차고 뒤뜰에서 건설한 첫 요트는 인허가를 받은 후 240,000파운드 (약 한화 4억4천2백 여만원)에 팔았다. 이 처녀 프로젝트는 곧 회사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1998년, 스몰리지는 45피트 길이의 후미 조종실형 (aft-cabin craft) 요트인 펄 45 (Pearl 45) 모델을 사우스햄튼 보트쇼에서 진수시켰다. 그로 부터 18개월 안에 그는 상버 투자 동반자 2명을 찾았고 그 덕분에 신제품 컨셉에 투자하기 위한 돈1,800,000 파운드(한화 33억 여원)을 확보했다. 펄 모터 요트 社의 미래는 준비를 마쳤다. 이 회사는 2001년에 보트 8척을 지었고 그리고 이듬해까지 12척을 지을 준비까지 채비할 수 있게 되었다.

지난 1990년대 10년 동안에 영국의 소형 보트 제조업은 붐을 맞았었다. 시라인 인터내셔널 (Sealine International), 썬-시커 인터내셔널 (Sunseeker International), 리바 (Riva), 페어라인 앤 프린세스 (Fairline and Princess) 등을 포함한 업계 최대 규모의 업체들은 전세계 보트 제조업계에서도 가장 성공적인 럭셔리 브랜드들이다. 선시커는 전세계에서 가장 큰 대형 요트 보트를 짓고 있는 한편, 펄 모터 야트는 주로1년에 서너주 동안의 휴가철에 보트를 사용할 것을 위해서 한 번에 6십만 파운드 (우리돈 약 11억 여원) 정도를 손쉽게 일시불 할 능력이 있는 40대 중반 가령의 남성 고객들을 주로 겨냥해 보트를 생산하고 있다.

펄 모터 야트가 럭셔리 브랜드로 자리잡기 까지는 4년 밖에 걸리질 않았다. 뭐니뭐니 해도 초기 진입 단계에서의 판매가 가장 어려웠다. “빅보이들 (big boys : 세계적으로 유명한 타 명품 보트 브랜들)과 경쟁한다는 것은 최고 품질을 갖춘 제품과 업계에서 틈새 시장을 구축하는 일일 뿐만 아니라 결국 브랜딩과 이미지가 성공의 관건임을 곧 깨닫게 되었다.”고 스몰리지는 말한다.

리타 클리프튼 (Rita Clifton) 인터브랜드 사의 회장은 럭셔리 브랜드에는 3가지 범주로 나뉠수 있다고 믿고 있다. 첫째는 헤리티지 브랜드 (Heritage brand)로 부를 수 있는 것들로서, 전통적인 샴페인家를 그 전형적인 예로 들 수 있다. 헤리티지 브랜드가 주로 해야 할 임무는 전통 브랜드를 항상 참신하게 유지하는 일이다. 둘째는 일명 ‘시체 되살리기 (Waking the Dead)’ 범주에 속하는 브랜드로서 브랜드가 너무 오래되서 재소생을 필요로 하는 경우를 말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번째 범주에 속하는 럭셔리 브랜드는 ‘뉴 에이지 (New Age)’ 범주에 속하는 것인데, 전에 없었던 아주 새로운 럭셔리 브랜드를 의미한다.

‘시체 되살리기’에 주력하고 있는 럭셔리 브랜드 중의 하나로는 프랑스 장신구 업계의 초고가 브랜드인 부셰롱 (Boucheron)을 들 수 있다. 1858년에 설립된 이 브랜드는 지난 몇 년동안 이 업계에서 거의 무시당해오다시피 하고 있다. 부셰롱을 책임지고 있는 이 회사의 새주인인 구치 (Gucci)는 런던에서 활동중인 장신구 디자이너 솔린지 아자구리-파트리지 (Solange Azagury-Partridge)를 부셰롱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기용했다. “최근 다소 부진을 겪어온 브랜드를 책임지고 그것을 한결 새롭고 창조적인 것으로 만드는데 더없이 완벽한 기회다.”라고 그녀는 말한다. 그녀의 임무로는 새로운 장신구 디자인을 창조하는 일 외에도 패키징 디자인, 광고, 매장 인테리어 디자인 업데이트 업무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펄 모터 요트는 클리프튼이 규정한 두번째 범주에 속한다. ‘여기서 중요한 관건은 이 브랜드가 과연 매력적이고 카리즈마적인 리더에 기초하고 있든가 아니면 참신한 아이디어나 서비스 혁신으로 맹공격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클리프튼은 말하면서 그와 비슷한 예로 제임스 다이슨 (James Dyson , 다이슨 진공 청소기), 알렉산더 맥퀸 (Alexander McQueen), 스텔라 매카시 (Stella McCarthy), 조 멀론 (Jo Malone, 뷰티 및 보디 케어 브랜드), Space NK (미용 및 약품 매장), 그리고 노부 레스토랑 체인 (Nobu Restaurants, 럭셔리 구르메 퓨젼 레스토랑)들을 꼽는다.

스몰리지는 기존 업계 영역에 혁신적인 접근을 시도해 성공한 사례다. 영국의 대형 보트 제조업체들은 탑승자가 태양을 많이 받을 수 있는 구조인 컨버터블식 플라이브리지 보트 (fly-bridge boats)를 지중해권 시장에 집중 공략 하는 방법을 통해서 성공적인 성장을 거뒀다. 그 결과 실내 공간에 더 중점을 둔 후미 조정실형은 보트 시장에서 비교적 백안시되어 왔던게 사실이었다. “합리적이고 분별있는 사고를 할 줄 아는 남성이 타는 배를 구상하게 되었다. 후미 조정실형 보트는 다소 구식이고 전통적인 분위기를 풍길수도 있지만 기존 보트 시장이 놓치고 있던 부분이었다.” 스몰리지는 설명한다.

펄 모터 보트는 후미 조종실형 보드 디자인에 모던하고 섹시한 스타일링을 도입했다. 펄 모터가 제공하고 있는 보트 제품군은 길이별로 43, 47 그리고 55푸트 등 3가지 모델들로 구성되어 있다. 선구적인 사고를 할 줄 아는 디자인 팀의 도움 덕택으로 스몰리지는 후미 조종실형 배를 한 편의 탐미의 대상으로 전환시켰다. 이 회사는 가내 업체로 시작해서 이제는 다국적 기업으로의 변신을 꾀하고 있다”고 스몰리지는 말한다. “모든 것을 같은 시기에 같은 스타일로 일체화할 필요가 있다. 회사의 스타일과 보트의 스타일이 통일감 있게 조율해야 한다. 모든 일은 단계적으로 연결되었다. 우리는 브랜드가 비즈니스를 주도하도록 할 것이다. 우리는 배들의 이름은 ‘템페이션 (Temptation)’ (유혹)이라고 붙이고 스페인의 휴양섬 마요르카 (Majorca)와 포트머스 (Portmouth)의 사회 부유층만을 위한 요지에 홍보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고 스몰리지는 덧붙인다.

펄 모터스 보트는 홍보 전략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고 있었다. 이 회사는 영국 케닐워드에 있는 바이트 솔루션스 (Bite Solutions)에게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맡겨서 진주알 3개가 있는 독특한 로고와 새로운 표제어를 채택했다. ‘고삐 풀린 유혹 (Temptation Unleashed)’이라는 표제어는 이미 디자인되고 생산된 보트 한 척에 단지 부가가치를 좀 더하겠다는 생각에 붙인 듣기 좋은 상투어구만은 아니다”라고 바이트 솔루션스 사의 브랜드 전략가인 피터 휴즈 (Peter Hughes)는 말한다. 그리고 “유혹이라는 주제를 둘러 싼 이 비즈니스 전체를 운영함에 있어서 펄을 다른 경쟁 대상들로부터 차별화하는 기회라고 보았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한다.

디자이너들과 기술자들은 이 보트를 구성하는 세부 하나하나에 까지 브랜드가 숨쉬고 있도록 하는데 혼심을 기울였다. 그로 인한 결과로 다른 동급 경쟁 보트들 보다 훨씬 호화스러운 모터 요트배 시리즈들이 탄생하게 되었다.

스웨이드와 앵두목으로 마감된 벽이 특징적인 인테리어에는 캐빈내 문짝, 유리 계단, 의자 등받이, 수저 세트와 타월에 이르기까지 펄 모터스 보트의 로고가 새겨져 있다. 판매부서원들은 모두 펄의 브랜드가 인쇄된 제복을 착용한다. “우리는 마케팅에 필요 이상으로 너무 많은 지출을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기에 10% 더 추가 비용을 쓴 만큼 우리 브랜드의 품질을 보여준다. 눈에 띄기 위해서는 때론 정해진 한도를 추월해야 할 경우도 있다.”고 스몰리지는 말한다.

펄 모터의 보트를 선보이는 박람회 행사 부스에서는 템테이션 바 (Temptation Bar)가 설치되어 뵈브 클리코 샴페인 (Veuve Clicquot)과 로고 소표제어에서 따와 이름한 ‘칵테일 언리시드 (Cocktails Unleashed – 고삐 풀린 칵테일)라는 자체 브랜드 드링크류를 제공한다. “이렇게 해서 보트 제조업계의 상상력을 사로잡았다. 그 결과, 예산에 커다란 구멍을 내지 않고도 짧을 시일 내에 얼마든지 상류층을 상대로한 최고급 브랜드를 창조할 수 있음을 업계에 일깨워 주었다.”고 브랜드 전략가 휴즈는 말한다.

호화 보트 박람회에서는 보다 큰 보트 제조업체들로부터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곤 한다.

특히 썬시커인터내셔널 (Sunseeker International)의 전시 부스는 그 규모와 스타일로 명성이 자자하다.

두 업체들 사이의 총매출액과 연륜은 커다란 차이가 있지만 – 썬시커는 설립된지 30년이 되는 회사이며 1년에 300-400대의 배를 짓는다 – 회사 설립 초기와 접근 태도는 놀랄 만큼 유사하다.

두 업체 모두 디자인, 품질, 그리고 최고의 테크놀러지를 최우선적 강조점으로 삼고 사업을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스몰리지와 마찬가지로 선시커의 공동 창립자 로버트 브레이드웨이트 (Robert Braithwaite)와 동생 존 브레이드웨이트도 집 차고 안에서 보트를 짓기 시작했다. 펄 모터스가 처음 시장에 진입할 때부터 ‘허영’ 시장 (vanity market)으로 높이 목표 설정을 했던 반면에 브레이드웨이트 형제는 소비자들을 바다의 세계로 천천히 유도하면서 소규모의 스피드보트를 생산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했다. 이어서 디자이너인 돈 셰이드 (Don Shead)와 협력한 끝에 두 형제는 다양한 종류의 럭셔리 심해용 파워보트를 만들었다.

썬시커의 보트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 커지고 한결 더 화려해 졌다. 이 회사는 지금 전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사유 모터 요트배 생산자가 되었으며 로버트 브레이트웨이트는 보트계에서 가장 최고 유명인의 한 사람이 되었다.

“썬시커는 시작 단계부터 두드러진 보트 모델을 선보이는 것으로 출발했으며 다른 보트들과는 아주 색다른 특징들로 남달리 눈에 띄어 보였다”라고 그는 말한다. “수중용 보트 라인 부문에서도 경쟁업체들에 비해서 훨씬 앞서 있어서 썬시커 보트의 우수한 성능과 핸들링은 얼마 안가서 이 업계의 트레이드마크가 될 정도였다. 그 이미지를 유지해야겠다는 욕망은 항상 보다 새롭고 우수한 성능을 찾는 기존 고객들을 유지할 수 있게 해 주는 한편 세계 최고의 유명 브랜드를 갈구하는 새 고객들을 끌어들이는 힘으로 작용했다.

디에고 리베라 벽화 시리즈 중 "월 스트리트 잔치). Diego Rivera 『Wall Street Banquet (』 (1923-8) fresco, Ministry of Education, Mexico City.

디에고 리베라의 벽화 시리즈 중 “월 스트리트 잔치). Diego Rivera 『Wall Street Banquet (』 (1923-8) fresco, Ministry of Education, Mexico City.

이 단계에서 감성 (emotion)이 차지하는 비중은 얼마나 될까? “감성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중요하다”고 인터브랜드의 클리프튼 회장은 말한다. “그 중 대부분- 99.5% – 은 무형 자산이고 나머지 0.5%만 유형 자산이다. 보트 생산 업계에서는 제품의 물리적 성능이 중요하다. 제아무리 가장 매력이 넘치는 광고 캠페인을 벌인다 할지라도 아름다운 엔지니어링으로 만들어진 훌륭한 제품이 못되면 소용없다.”

그런데도 감성은 럭셔리 시장에서는 중요한 차별 요소이다. 예를 들어서 디자이너 브랜드 화장품들 같은 일부 브랜드들은 품질과 굳이 상관 없이도 브랜드명 하나만으로도 성공이 가능하다. 그들의 브랜드 이미지의 힘은 다른 보다 저렴하고 덜 고급스러운 대중 브랜드들보다 성능이나 효과 면에서 우세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이 판매 실적에 아무런 영향력으로 작용하지 않을 수도 있다.

“여기서 관건은 엘리트층 소비자들이 내 기업의 브랜드를 사용하고 사랑하는 것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게 하는 것이다”라고 클리프튼은 덧붙인다. “그같은 원칙은 럭셔리 보트 분야에서 특히 그러한데, 보트 제품 분야는 소유자가 천박한가 아니면 탁월한 취향을 지녔는가를 반영하는 첨예한 분별 경계선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브랜드를 새로 런칭한다 함은 어떻게 브랜드를 구축할 것이며 어떤 소비자를 주고객 대상으로 삼을 것인가를 매우 조심스럽게 고려해야 함을 뜻한다. 최고급 브랜드를 런칭하면 예컨대 메르세데스 (Mercedes) 자동차의 경우처럼 이후 상황에 따라서 브랜드를 다소 하향할 수 있다. 그러나 초기 단계부터 최하위급 브랜드로 런칭을 시작하면 그 브랜드를 상향시키는 일은 매우 어렵다.”

펄 모터스의 강점들 중의 하나는 고객들과 강한 개인적 관계를 형성해 나갈줄 아는 스몰리지의 능력일 것이다. 이것은 기존 보트 주인들이 보다 큰 새 보트를 다시 구입해 가며 이 브랜드로 되돌아 오게 만드는데 중요한 요소이다.

그 결과, 펄 모터스는 고객들이 그의 브랜드를 홍보해 주는 것에 힘입어서 새 고객 만들기에 도움을 받고 있다.

스몰리지는 곧 새로 런칭을 앞두고 있는 펄 55 모델 (2005년 5월 현재 이 제품은 이미 런칭을 한 상태)이 한 유명인 고객 덕붙에 큰 홍보 효과를 얻을 것임을 이미 자신하고 있다. 그 다음 단계로는 보트 종류를 더 확장하고 전세계로 펄 보트 딜러망을 포함해서 펄 보트 브랜드를 단 의류 판매망과 항해 학교 교육망을 구축하는 것이다. 스몰리지의 꿈은 “생 트로페 프랑스 고급 휴양지 항구 전체가 온통 펄 보트로 가득차게 될 날을 보게 되는 것”이다.

인터브랜드의 클리프튼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는 말한다. “사람들이 프리미엄 브랜드를 위해서 비싼 돈을 지불하는 이유는 그같은 행위와 연관된 상징들 때문이다. 결정적인 요건은 엘리트 고객들이 그 제품을 사는 것이 다른 사람들 눈에 띄는 것이다. 그같은 광고 효과의 가치는 가격으로 환산불가능할 정도로 값진 것이다.”

그리고 그레이드웨이트는 이렇게 결론 내린다. – “그들과 같은 수준의 생활을 하는 사람이 아니면 그런 것을 소유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던져주는 브랜드를 창출하라.

  • 한정된 자원으로 럭셔리 브랜드 구축하기
    1. 환상적으로 우수한 품질을 자랑하는 제품을 만들라.
    2. 소비/서비스 경험이 제품 판매의 절대적인 최우선 수준이 되도록 하라.
    3. 새 브랜드를 처음 런칭할 때 어떻게 런칭할 것인가 그리고 누구와 함께 런칭할 것인가에 주의를 기울이라. 고유한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가지고 마케팅과 홍보에 남다른 노력을 쏟아 넣어라.
    4. 당신의 브랜드를 열렬히 응원해 줄 고객을 찾으라. 사회적인 명망이 있으면서도 당신의 브랜드를 사랑해 주는 사람은 입에서 입으로 당신의 5. 제품을 소문내는 방법으로 홍보해 줄 것이다.
    6. 고객들을 주주들처럼 대우하라. 고객들과 개인적인 관계를 형성하라. 결국 개인적인 서비스가 관건이다.
    7. PR 팀과 협력해서 전략을 짜라. 당신이 속해 있는 업계에서 아직 개척되지 않은 상상력을 개척하여 포착하라.
    8. 당신이 속해 있는 럭셔리 부문에서 아직 미개발 상태에 있는 영역을 공략하라.
    9. 당신이 하는 일에 믿음을 가지라. 그리고 당신의 브랜드에 대한 열정을 가지라.

※ 이 글은 본래 월간 『디자인』지 2005년 6월호 포럼 컬럼에 실렸던 기사를 다시 게재하는 것임을 밝혀둡니다.

 

스위스 디자인 100년

펠러 (Feller AG) 사가 개발해 보편화된 텀블러 전기 스위치( Tumbler Switch) , 1948년 경. Museum für Gestaltung Zürich, Design Collection. Photo: FX. Jaggy & U. Romito © ZHdK. 스위스 국민이라면 누구나 사용하는 이 전기 스위치는 스위스인에게 빛을 가져다준 공인으로 여겨지는 국민디자인용품으로 온/오프 감각이 매우 부드러운 것이 특징이다. 누가 디자인했는지 알려져 있지 않지만 1949년 굿 디자인 전시회에서 이 제품을 본 평론가 막스 빌(Max Bill)은 이 스위치를가리며서 "모든 전기 스위치가 본받을 만한 스위치 디자인의 결정판"이라고 평가했다.

펠러 (Feller AG) 사가 개발해 보편화된 텀블러 전기 스위치 (Tumbler Switch) , 1948년 경. Museum für Gestaltung Zürich. Design Collection. Photo: FX. Jaggy & U. Romito © ZHdK. 스위스 국민이라면 누구나 사용하는 이 전기 스위치는 스위스인에게 빛을 가져다준 공인으로 여겨지는 국민디자인용품으로 온/오프 감각이 매우 부드럽다는 것이 특징이다. 누가 디자인했는지 알려져 있지 않지만 1949년 굿 디자인 전시회에서 이 제품을 본 평론가 막스 빌(Max Bill)은 이 스위치를 가리며서 “모든 전기 스위치가 본받을 만한 스위치 디자인의 결정판”이라고 칭찬했다.

100 YEARS OF SWISS DESIGN at Museum für Gestaltung Zurich

스위스 제품디자인은 예나지금이나 소박하지만 솔직하고 단순하면서 사용에 편리한 디자인이라는 평판을 유지하고 있다. 스위스는 디자인과 디자이너 강국인가? 스위스는 그렇다고 선언하면서 취리히에 있는 디자인 박물관(Museum für Gestaltung Zurich)은 20세기 초엽 스위스 디자인 공작연맹(Werkbund) 운동에서 부터 1950년대 “우수 디자인(Die Gute Form) 또는 (Good Design)” 장려책, 그리고 20세기 후반기를 거쳐 유럽을 휩쓴 포스트모더니즘 현상과 가장 최근 21세기 현대 디자인 추세에 이르는 스위스 디자인 100년 역사를 한 눈에 조명해 보는 전시를 내년인 2015년 2월8일까지 계속한다. 펠러 AG 사가 널리 보편화한 무명 디자이너의 전기 스위치는 지금도 스위스 제품디자인의 역사에서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고전작이며, 알프레트 로트(Alfred Roth)와 한스 코레이(Hans Coray)의 금속제 야외용 의자, 파이야르 사의 에르메스 베이비 타자기는 특히 20세기 제품 디자인의 아이콘들로 눈여겨 볼만 하다. Images courtesy: Museum für Gestaltung Zurich.

그래도 미술은 계속된다.

알빈 에거-린츠 (ALBIN EGGER-LIENZ, 1868–1926), 『죽음의 무도 (Der Totentanz (IV. Version)』, 1915 Danse Macabre (version IV), 202 × 244,5 cm / Casein on canvas, Leopold Museum, Wien.

알빈 에거-린츠 (ALBIN EGGER-LIENZ, 1868–1926), 『죽음의 무도 (Der Totentanz (IV. Version)』, 1915년, 202 × 244,5 cm / Casein on canvas, Leopold Museum, Wien.

제1차 세계대전 시대 오스트리아 미술

AND YET THERE WAS ART! – AUSTRIA 1914-1918

1914-1918년 사이 제1차 세계대전은 근대기 급속히 진보한 무기 및 전투 기술에 힘입어서 그 이전 그 어떤 전쟁 보다도 잔인했으며 수많은 사상자를 냈던 그야말로 ‘20세기 거대한 원초적 재앙 (great seminal catastrophe)’ 였다. 비참과 혼란으로 범벅된 이 엄청난 비극 속에서도 미술은 계속되었다. 구체제식 제국주의, 글로벌리즘, 다인종∙다언어가 뒤섞인 다문화가 농익고 곪아터지며 서서히 구체제 종말을 맞고 있던 오스트리아에서는 어느 미술가들의 눈과 손을 통해서 어떤 미술이 전개되고 있었을까? 비엔나에 있는 레오폴드 미술관에서는 『그래도 미술은 계속되었네! (And Yet There was Art! – Austria 1914-1918)』 전을 9월 15일까지 열어 점검한다.

손님으로 여기를 왔더니 당신네는 나를 폭탄으로 환대하누나! –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

»소집 (Der Ruf)« 지 1912년11월호 전쟁 특집호 표지로 선정된 에곤 실레의 자화상, 22,8 × 14,8 cm / Letterpress. Private collection.

»소집 (Der Ruf)« 지 1912년11월호 전쟁 특집호 표지로 선정된 에곤 실레의 자화상, 22,8 × 14,8 cm / Letterpress. Private collection.

올해 2014년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지 100년이 되는 해.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를 방문중이던 프란츠 페르디난트 합스부르크 황실 황태자와 소피 폰 호헨베르크 황태자비가 열렬 보즈니아-세르비아계 해방주의자 가브릴로 프린칩에 의해 저격당한 사건은 미술가들의 운명까지도 뒤흔들었다.

전쟁이 터지자 갑자기 미술 시장은 덩달아 침체되었다. 미술가들은 전쟁터로 징집돼 나가야 하는 슬픈 운명에 처했는데, 에곤 실레(Egon Schiele), 알빈 데거-린츠(Albin Egger-Lienz), 안톤 콜릭(Anton Kolig)은 바로 그런 미술가들이었다. 이탈리아, 루마니아, 러시아, 세르비아 국경으로 배치되어 최전방에서 전투에 임하며 그림 그리기를 계속했던 이들의 눈과 손을 통해서 오늘날까지 제1차 세계대전의 파멸과 광기가 기록되었다.

전쟁 포고와 징집 선전
1912년 2월부터 1913년 11월까지 근 2년 동안 총 7부를 찍어 남성 인구로부터 징병을 호소하기 위해 출판되었던 『소집(Der Ruf)』 지는 전쟁이란 “파괴적인 재앙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을 위한 카타르시스적인 기회”라고 전쟁의 의미를 재정의했다. “전정은 피를 통해서 세상에 온다”고 외치며 전쟁을 선동하고 징집을 독려하는 이 잡지 속 기사들은 종종 강렬한 원색과 격정적 필치가 주특성인 표현주의 미술을 활용하기를 좋아했다. 나태와 게으름에 빠진 중산층들을 백일몽에 빠진 정신상태로부터 흔들어 깨우는데 전쟁 만큼 좋은 수단은 없다고 외쳤으며, 미술가들은 보는이의 감정을 건들고 뒤흔드는 미술로 이 안일에 빠진 인구를 일깨우라는 임무를 부여받고 전쟁에 동원되기에 이른다.

에곤 실레 (EGON SCHIELE, 1890–1918) »병든 러시아 군 (Kranker Russe)«, 1915년, 43,6 × 30,4 cm, Black chalk, gouache on brown paper, mounted on Japanese paper. Leopold Museum, Wien

에곤 실레 (EGON SCHIELE, 1890–1918)
»병든 러시아 군 (Kranker Russe)«, 1915년, 43,6 × 30,4 cm, Black chalk, gouache on brown paper, mounted on Japanese paper. Leopold Museum, Wien

전쟁은 죽음의 무도회(Danse Macabre)
“독일이 러시아에 전쟁을 선포하다” – 프란츠 카프카는 충격에 쌓여 소리 높여 절규했고, 극작가 아르투르 슈니츨러는 “세계 전쟁. 세계 파멸.”이라고 응축했다.

보통 예술가들이란 대체로 전쟁 같은 죽음과 처참의 경험을 추구하지 않는 민감한 감성의 족속들이지만, 알빈 에거-린츠(Albin Egger-Lienz)는 이탈리아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여하기 직전인 1915년에 이 전쟁에 직접 참여하기 위해 자진 지원해 입대했다. 전쟁을 “운명의 무자비한 행보”로 보았던 그는 심장 건강이 좋지못해 입대 면제 판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입대를 고집해 황실 지정 전쟁 홍보실 미술단(Kunstguppe der k.u.k. Kriegspressequartier)에 정식 회원이 되어 1916년 오스트리아 남단 이탈리아 국경에서 근무하며 전투 장면을 프레스코풍 그림으로 기록하는 일을 했다.

적군에 대한 연민, 인류 보편에 대한 동정
“나는 이제 군인이 되어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14일을 보냈다네.” 1915년 군대 징집되어 훈련을 받던 섬세한 감성의 소유자 에곤 실레에게 전쟁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럽고 힘겨운 경험이었다. 그림을 잘 그리는 화가였던 점이 참작되어 실레 역시 황실 전쟁 홍보실 미술단으로 편입되어 전투 최선전으로 내몰리지는 않았다.

그가 미술단에서 주로 담당했던 임무는 포로수용소에 수감된 적군 러시아 포로들의 초상과 생활상을 두루 그림으로 기록하는 일이었다. 복무중 쓴 편지에 보면 러시아 포로들에 대한 인간적 동정과 평화주의로 그득했던 실레의 심성을 엿볼 수가 있다. “아뭏든, 나는 적군 쪽에 훨씬 더 마음이 간다네. 그들의 나라는 우리 나라 보다 월등히 흥미롭더군. 진정한 의미의 자유도 있고, 여기선 찾아보기 어려운 생각 깊은 사람들도 더 많다구. 매 시간 마다 이곳에서 그런 사람들이 썩고 있다니, 이건 손실이라구. …”

오스카 코코슈카 (OSKAR KOKOSCHKA, 1886–1980) 『원칙 "자유, 평등, 형제살 (Das Prinzip (»Liberté, Egalité, Fratricide«), 1918년, 41,2 × 31,2 cm / Color lithograph on paper Leopold Museum, Wien © Fondation Oskar Kokoschka/Bildrecht, Wien 2014

오스카 코코슈카 (OSKAR KOKOSCHKA, 1886–1980)
『원칙 “자유, 평등, 형제살상” (Das Prinzip (»Liberté, Egalité, Fratricide«), 1918년, 41,2 × 31,2 cm / Color lithograph on paper Leopold Museum, Wien © Fondation Oskar Kokoschka/Bildrecht, Wien 2014

실존적으로 힘들었던 전쟁기는 실레에게는 예술적인 돌파력을 안겨줬는지, 특히 전쟁이 끝나갈 무렵이던 1917-18년이 되자 그의 작품들은 과거와는 달리 인생, 공포, 좌절, 죽음 같은 멜랑콜리적이고 위태로운 요소를 한결 제거하고 한결 조형적이고 기하학적 위주로 그림을 그리며 작품성을 한결 드높여 미술계의 총아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단꿈도 잠시.

전쟁이 막 끝나기 전 실레는 1918년 2월 클림트의 임종을 지키며 임종 초상을 그렸고, 그 자신 전쟁이 끝나자마자 같은 해 가을 유럽에서 창궐하던 스페인 독감에 걸려 28세라는 때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존재의 고통, 전쟁의 트라우마
그런가하면 독자적인 표현주의 그림을 그리던 오스카르 코코슈카(Oskar Kokoschka)는 최전방에서 기갑군으로 싸우면서 육체적 부상과 깊은 정신적 상처를 받고 돌아와 전쟁의 참혹함을 되세기는 격렬한 그림을 계속해 그렸지만 끝내 오스트리아 미술계의 인정을 받지는 못했다.

전쟁통의 우울을 미술로 표현한 또다른 화가 안톤 콜릭(Anton Kolig)은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마자 전쟁을 피해 망명하려 애쓰다가 어렵사리 이탈리아를 경유해 남 프랑스로 피신했지만 결국 1916년 전쟁 기록 화가로 일하게 되었다. 그가 특히 많이 그린 그림은 포로 수용소에 감금된 적군 지휘관들의 초상화였으나 그의 그림은 너무도 솔직했던 나머지 전쟁 홍보용 그림으로는 부적합하다는 판정을 받았다. 대신 콜릭는 전투 장면이 담긴 최전방 풍경화를 잘 그려서 1917년 황실 전쟁 홍보실 전속 화가로 위촉되어 전쟁 기록화를 다수 그려 남겼지만, 전쟁통 내내 “나는 막중한 고통 속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며 고통스러워 했다.

20세기를 연 전 세계적 글로벌 전쟁이자 제2차 세계대전의 씨앗이 되었던 미완의 전쟁 – 제1차 세계대전은 인류 역사에서 참혹하고 무지막지한 혁명의 고비였다. 그러나 현재의 눈에서 본다면 구체제 절대주의를 청산한 유럽의 체재 변혁기이자 전 인류를 계급의 ‘감옥’으로 해방시켜준 ‘민주주의’의 출발점으로 보기도 한다. 그리고 미술은 평화기이든 전쟁기이든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다. Images courtesy: Leopold Museum, Vienna.

루이스 칸의 기념비적 건축

루이스 칸이 설계한 방글라데시 다카 소재 국회 건물. 1962년 시공 -83년 완공.

루이스 칸이 설계한 방글라데시 다카 소재 국회 건물. 1962년 시공 -83년 완공.

LOUIS KAHN: THE POWER OF ARCHITECTURE

20세기 미국을 대표한 가장 뛰어난 건축가중 한 사람이었던 루이스 칸(Louis Kahn, 1901✴︎필라델피아 -1974✝ 뉴욕)이 심장마비로 1974년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뜨자 『뉴욕 타임즈』 지 부고 기사는 그의 죽음을 이렇게 애도했다. “벽돌과 콘크리트로 위력적인 형태를 창조하며 수많은 건축가들에게 영향을 주고 미국 최고의 생존 건축가로 학자의 인정을 받았던 루이스 I. 칸이 일요일 저녁 [뉴욕] 펜실바니아 역에서 73세의 나이로 하직했다.”고 보도했다. 루이스 칸이 사망했을 즈음, 이 건축가는 한 아내와 두 애인을 포함한 세 집 살림의 가장이었으며 정력적인 건축 설계 활동에도 불구하고 극소수의 설계가 살아생전 실현되었고 약 5억 달러 가량의 빚을 지고 있었다.

⇧ 맨 위 이미지 설명: 루이스 칸이 설계한 방글라데시 다카 소재 국회 건물. 1962년 시공 -83년 완공.

Alfred Newton Richards Medical Research and Biology Building, Philadelphia, Pennsylvania, 1957-65. © The Architectural Archives, University of Pennsylvania. Photo: Malcolm Smith.

Alfred Newton Richards Medical Research and Biology Building, Philadelphia, Pennsylvania, 1957-65. © The Architectural Archives, University of Pennsylvania. Photo: Malcolm Smith.

본래 에스토니아의 한 외떨어진 섬 오셀에서 태어났지만 1904년 부모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와 동부의 역사 도시 필라델피아에서 성장한 루이스 칸은 마음 속 깊이 필라델피언이었다. 한창 일하며 경력을 키워야 할 시절이던 초년병 시절, 때가 1920-30년대 경제 공황기였던 탓에 루이스 칸은 독립 건축가 일과 예일 대학 강사일을 하며 간신히 생활을 꾸려나갔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난 후 1950년대 이후 패권국 미국의 경제 재건과 함께 칸은 보다 굵직한 건축 프로젝트 수주를 받기 시작했다.

살아 생전 칸은 이집트, 그리스,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과거 미술과 건축의 미학으로부터 아름다움을 추출했던 화가 겸 일러스트레이터이자 광적인 스케치 메모광이었다. 19세기 프랑스 에콜 데 보자르가 추구하던 구성적 합리주의와 세기전환기 영국의 예술공예운동에서부터 독일의 바우하우스 모더니즘을 두루 합성한 독특한 모더니스트이기도 하다. 그 자신 르 코르뷔지에의 초기 모더니즘 건축으로부터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말했으나 고대부터 근대기까지 시대과 공간을 넘나들며 다양한 원천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다양한 요소를 취했다. 예컨대 칸은 자신이 설계해 완공시킨 소크 연구소(캘리포니아 주 라 졸라 시 소재)는 ‘피카소도 방문할 만한 가치가 있는 장소’라며 떵떵댔던 대표적인 역작이었다.

겉보기에는 전통적이고 때론 원초적인 형태를 띠되 시공 기술 면에서는 최첨단 재료와 공법을 동원하는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의 혁신성을 발휘했다. 또 한 작품 착수에서 완성에 이르기까지 긴 시간과 숙고를 거쳤던 여간해서 만족하지 못하는 지독한 완벽주의자였으며 건축가는 중대한 사회적 책임을 지녔다 믿었던 사명감찬 직업인이었다. 오늘날 건축학계에서 루이스 칸 건축을 모더니즘으로 정의할 것인가 아니면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정의할 것인가 여전히 그 언쟁이 분분하다. 그가 방글라데시 정부로부터 수주받아 수도 다카에 지은 육중해 보이는 국회 건물은 한 편의 건축물이 시간과 장소를 초월한 영원한 기념비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 걸작이다.

오늘날, 건축학계에서 루이스 칸의 건축 세계는 그가 이룩한 걸작 건축에서부터 초기 도시 토목설계와 소형 개인 주택 프로젝트에 이르기까지 자세하고 체계적으로 연구되어 있다. 칸이 설계한 모든 건축물을 관통하는 일관된 미적 특징을 정의하라면 단연 면밀한 공간구성과 세심하게 연출된 빛처리 기술이라 할 수 있겠다. 그래서 그의 건축물들은 고요엄숙하면서도 동시에 원초적인 아름다움과 보는이를 압도하는 위력을 발산한다. 미국 텍사스 주 포트 워드 시에 있는 명소 킴벨 미술관은 빛을 다룰줄 알았던 칸의 탁월한 재능이 건물 구석구석에 실현된 작품으로 꼽힌다.

Salk Institute in La Jolla, California, Louis Kahn, 1959 – 65 © The Architectural Archives, University of Pennsylvania. Photo: John Nicolais.

Salk Institute in La Jolla, California, Louis Kahn, 1959 – 65 © The Architectural Archives, University of Pennsylvania. Photo: John Nicolais.

칸의 아들 나타니엘 칸(Nathaniel Kahn, 1962✴︎))이 아버지를 기리며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 『나의 건축가(My Arhitect)』(2003년)에 보면, 인터뷰에 응한 프랭크 게리(Frank Gehry), 렌조 피아노(Renzo Piano), 페터 춤토어(Peter Zumthor), 그리고 젊은 건축 소우 후지모토(藤本 壮介, Sou Fujimoto)의 공상과학풍 메타볼리즘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국제 건축계를 쥐락펴락하는 영향력 있는 건축가들은 하나같이 루이스 칸의 건축으로부터 막대한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한 바 있다.

“벽돌에게 무엇이 되고 싶냐”고 물어보라고 한 루이스 칸의 말은 유명하다. 건설 재료에 담긴 특성이 건축물 자체의 언어를 표현해줌을 뜻한다. 그리고 그는 또 “구조가 빛을 빚어준다”고 했는데 “자연광 없는 방은 방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던 그의 빛 철학도 유명하다. 벽돌과 콘크리트가 빛과 소근거리는 공간을 창조했던 루이스 칸의 건축물들은 한 편의 굳건하고 영원한 기념비처럼 남아있다. Photos courtesy: Vitra Design Museum.

산문시와 같은 건축, 건축과 같은 인생

ARCHITECTURE OF ÁLVARO SIZA

50년 묵묵히 걸어온 거장 건축가 – 알바로 시자의 건축 세계

흔히들 요즘에는 ‚건축가는 21세기의 록스타’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그 유명세와 사회문화적 의미와 대중적 인기를 누리는 유명인사 행세를 톡톡히 한다. 그중에서도 알바로 시자는 누가 뭐라해도 글로벌 문화를 이끄는 이 시대의 스타 건축가들의 대열 속에서 빠질 수 없는 거장 현대 건축가중 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 맨 위 이미지 설명: 아랍 무어족의 대표적 기념 건축물이자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남 스페인 그라나다의 1천년 된 알함브라 궁전과 광장 모습. 알바로 시자는 스페인 출신 건축가 후안 도밍고 산토스와 협동으로 알함브라 궁전 방문센터를 설계했다. Topographical Architecture. Image from the Alhambra Project by Álvaro Siza Vieira and Juan Domingo Santos © António Choupina.

알바로 시자가 설계해 현재 포르투갈 리스본에 있는 포르투갈 파비온(Pavilhão de Portugal)은 1998년 리스본 세계박람회를 기해 완공되었다.

그러나 알바로 시자는 화려한 무대 위의 스포트라이트를 꺼린다. 지난 십여년 구미는 물론 우리나라에서까지 널리 알려져 있는 기라성 같은 여타 ‚스타 건축가들’이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미명 아래 최첨단 건축 시공 기술과 신소재를 한껏 활용하여 때론 기괴하고 때론 극단적이기까지한 극도의 실험정신을 발휘하고 있는 사이, 알바로 시자는 단순한 형태와 미묘한 빛의 조화를 공간 미학으로 승화시킨 그만의 독특하고 일관적인 건축 양식을 구축해 왔다.

알바로 시자는 지금까지 포르투갈이 낳은 최고의 건축 명인으로 꼽히고 있다. 1933년 포르투갈 제2의 도시이자 무역과 상업이 성행한 북부 포르투갈 지방에서 제일 큰 도시로 알려져 있는 오포르토(Oporto) 근방에서 태어났다. 오포르토에 있는 미술 대학(Escola de Belas Artes)에서 건축을 공부하고 1950년대 후반기에 선배 건축가이자 시자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스승 페르난도 타보라(Fernando Tavora)의 건축 사무소에서 일하며 건축 실무를 익힌 후 1960년대 후반기부터 고국에서는 물론 스위스, 미국, 베네주엘라, 일본 등에서 대학 강의를 하면서 국제적으로 활동 범위를 넓혀갔다.

이미 1970년대 중엽부터 전세계 유명 미술관에서 전시회를 통해 이름을 알려온 알바로 시자는 특히 1982년과 1990년의 파리 퐁피두 센터, 1983년 런던 인스티튜트 오브 컨템포러리 아트, 1988년 하버드 건축대학 등 고국 보다는 해외 무대에서 더 유명해 졌다. 작년 초 뉴욕에 있는 디자인 전문 갤러리(Ohm Design)에서 열린 <시자-5:50전>은 알바로 시자가 자기 작업을 직접 정리한 큐레이터로서의 역할을 담담하며 자신의 건축과 디자인 인생 50년을 총정리한 종합전시로서 전세계 대도시들을 돌며 순회전으로 부쳐지기도 했다.

공간과 형체의 일체를 추구한 알바로 시자의 건축적 가치가 국제 건축계에서 공식적인 인정을 받기 시작한 때는 시자가 1988년 미스 반 데어 로헤 건축상을 수상하면서 부터였다.

깔끔하고 단수하면서도 강하고 통일감을 자랑하는 건축으로 시자는 이후 1992년에 건축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건축계의 아카데미상격인 프리츠커상(Pritzker Prize)을 받았고, 이어서 2002년에는 베니스 건축 비엔날레에서 최고의 건축 프로젝트에 수여하는 금곰상을 거머쥐었다. 그리고 가장 최근인 2012년 판, 13회 베니스 건축 비엔날레(2012년 8월29일-11월25일)는 알바로 시자에게 평생공로 금사자상을 선사했다.

„내가 건축에서 가장 눈여겨 보고 감상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명료성(clarity)과 단순주의(simplism)다.“ 고 한 알바로 시자의 고백 때문만은 아니더라도 서구 건축계에서는 상자각을 연상시키는 그의 반복적이고 잠재적인 단순미를 가리켜서 그를 미니멀주의자(Minimalist)로 즐겨 부르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단순주의란 복잡함을 제거시킨 단순성(simplicity)이 아니라 서로 갈등하고 충돌하는 여러가지 복잡성을 명료한 형태로 한 편의 건축물 속에 총체적으로 구현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그의 건축 철학을 두고 보아 노바 티 하우스(Boa Nova Tea House)과 세투발 대학(Setubal College) 건물이라든가 산티아고 미술관(Santiago Museum) 등 같은 그의 대표적인 건축물들 속에는 고요한 표현주의가 잠자고 있다고 포르투갈의 건축 비평가인 페드로 비에이라 데 알메이라는 평가한다.

알바로 시자의 건축이 고요하고 단순해 보이는 외관에도 불구하고 표현적이라고 평가받는 이유는 바로 자연 태양광을 자유자재로 다룰줄 아는 건축가의 탁월한 재주 때문일 것이다. 빛의 달인인 알바로 시자는 건축물의 안팎을 들이치는 태양광을 단순히 실외를 구분하고 사물을 분별하기 위해 대상에 떨어지는 빛줄기에 불과하다고 보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건축물을 통해서 들이치는 빛은 과거 르 코르뷔지에식의 „단순한 빛덩어리“가 아니라 조형화되고 만져질 것 같은 빛처럼 느껴지곤 한다. 지중해 까까이 위치한 태양과 여유의 나라 포르투갈 출신이라는 점 때문일까. 이른바 „키아도(Chiado)“ 감흥이라고도 불리는 그의 빛 조형 감각은 고국 포르투갈의 고도시 키아도의 두꺼운 돌벽 고건축물들에 달린 유리창에서만이 느낄 수 있는 매우 특별한 ‚가공된’ 빛이기 때문이다.

포르투갈의 해안도시 세투발에 1993년에 건립된 세투발 교육대학 건물은 U형 대지 기반 위에 설계된 것이 특징이다. 시공기간: 1986-1993년.

시자의 작품 세계가 내뿜는 또다른 특징은 요즘 국제적인 스타 건축가들이 설계하기 즐기는 대규모 건축물을 고집스럽게 거부한다는 점이다. 혹자는 그런 그의 건축 스타일을 가리켜서 우쭐하지 않는 겸손의 수사법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제아무리 거창한 이름의 클라이언트의 주문과 프로젝트의 규모와는 무관하게 항상 일정한 일정한 스케일을 고수하는 그의 건축 철학의 결과이다.

건축물은 언제나 주변 환경에 어울리도록 세워져야 한다는 원칙, 20세기초 독일 바우하우스의 모더니즘 건축 원리가 강조했던 것처럼 사용자의 신체적 편의를 존중해야 한다고 한 „휴먼 스케일“의 원칙, 그리고 인간 본성에 대한 열정은 건축 설계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변함없는 않는 최우선적 요건들인 때문이다. 이상주의 건축을 이행한 브라질의 오스카 니마이어(Oscar Niemeyer), 자동차는 없고 보행자만 있는 도시 베네치아, 교통수단과 보행자가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도시 나폴리를 좋아하는 이유도 바로 그의 건축적 철학과 일치하기 때문일 것이다.

예컨대, 시자의 설계로 1993년에 완공된 포르투갈 오포르토에 있는 건축 대학 건물은 주변 환경에 대한 섬세한 이해, 덩치 큰 건축을 거부하는 반(反)거물형 건축에 대한 지향, 그리고 정교한 디테일 마감이 잘 어우러진 예로 평가받고 있다. 최근에는 동료 스타 건축가인 프랭크 게리와 나란히 캘리포니아 파사디나에 있는 아트 센터 오브 칼리지의 확장 건축 프로젝트에 임하고 있는 그는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이 건축 설계라는 천직을 ‚일생에서 제일 중요한 취미’라고 믿으며 계속하고 있다.

* 이 글은 본래 『공간사랑』지  2005년 11월호에 실렸던 것을 다시 게재하는 것임을 밝혀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