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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is Photo 2013

파리 포토 2013 페어 올해로 3회를 맞아 11월 14-17일4일 동안 파리 제8구역에 위치한 그랑팔레(Grand Palais)에서 거행된 파리 포토(Paris Photo) 사진 박람회는 사진예술 애호가, 진지한 사진 컬렉터, 사진예술가 지망생들이 한 자리에 몰려들어 과거의 명작과 최신 현대미술 트렌드를 조명하는 사진분야 박람회 최고급 연례행사다.

19세기말 사진기의 발명과 더불어 실험된 사진 예술의 역사는 회화나 조각 보다 그 역사는 훨씬 짧지만 기술과 산업생산의 발달, 사진기의 대중화, 대중의 접근 용이성 때문에 오늘날 사진찍기 활동은 가장 널리 활용되고 있는 활동이 되었다. 영감과 정열만 있으면 누구든 사진가가 될 수 있는 요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진을 잘 찍어 예술적 경지로 끌어올리기란 쉽지 않은 법. 그래서 올해 파리 포토 페어에서 전시된 수많은 근현대 사진작품들 중에서도 유독 예술성 못지 않게 높은 판매 가격을 올린 것으로 보고된 20세기 사진 명인들의 빈티지 명작 사진작들을 골라보았다. Images courtesy of Paris Photo.

건축가가 디자인한 의자

종합예술의 요소에서 건축가의 자아 표현을 위한 예술 작품으로

CHAIRS DESIGNED BY ARCHITECTS

하루일과 동안 누워서 잠자고 몸을 움직여 한 자리에서 다른 자리로 이동하며 활동하는 순간을 제외하면, 인간은 쉬고, 먹고, 일하고, 심지어 배설하는 순간까지 갖가지 모양과 기능을 갖춘 의자 위에서 시간을 보낸다. 그러니 의자라는 가구 품목이 우리 일상생활과 얽히고 설킨 관계는 여간 깊고 방대한게 아니다.

의자란 둔부를 바닥에 대고 앉아면 등을 위에서 받쳐 주는 1인용 가구다. 좀 더 엄밀히 정의하면 의자(chair)란 둔부가 바로 닿는 시트(seat)와 등받이(back rest)가 갖추어진 것이 의자다. 그래서 벤치가 2인 이상 또는 여려명이서 나란히 앉을 수 있게 한 긴 걸상(bench, bank)이고, 시트만 있고 등받이가 없는 1인용 스툴(stool)과도 개념적으로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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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레니 매킨토시 (Charles Rennie Mackintosh)가 스코틀랜드 글라스코 아르가일 거리에 있는 테살롱 식당 실내장식을 위해 디자인한 등받이가 높은 의자. 1897년 디자인.

오늘날 실내장식과 디자인의 역사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디자인 오브제 또한 의자다. 디자인을 처음 배우기 시작한 학생과 초년병 디자이너에서부터 이미 대가 취급을 받는 거장 디자이너에 이르기까지 제각자의 시그니쳐 스타일을 압축해 보여주고 평가를 기다릴 때 가장 우선적으로 포트폴리오에 내보이는 표준 잣대도 바로 의자다. 웬만큼 디자인에 관심있다고 자부하는 디자인 애호가들은 아이콘격 의자와 디자이너 이름까지 암기하고 있을 정도가 되었다.

인류 문명의 시작과 함께 해 온 앉기의 문화는 의자의 역사와 함께 해왔다. 의자의 원형이 최초로 탄생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기원전 3세기,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딱딱한 바닥과 벽에 보다 안락감있게 앉고 기대 쉬기 위해서 쿠션이나 방석을 만들어 쓰기 시작했다 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몸의 곡선에 맞게 굴곡시켜 시트와 나트막한 등받이가 있는 클리모스(Klimos) 의자를 만들어썼다 하고, 고마인들은 등받이없이 의자 다리가 좌우로 교차되는 힘으로 시트와 앉는자의 몸을 받쳐주는 접이식 걸상(stool)을 널리 활용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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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릿 릿벨트 (Gerrit Thomas Rietveld)가 1918-1921년 디자인한 레드/블루 체어(Red/Blue Chair는 너도밤나무와 합판을 이용해 제작되었다. © Cassina, Italy.

오랜 과거시절 의자란 언제나 사용자를 의젓하게 앉혀주어 품위를 드높여주는데 매우 유용해서 통치자의 권력과 신분의 심볼 역할을 했었다. 오늘날까지도 조직의 최고위 지위나 장(長)을 가리켜서 영어로 체어(chair)라고 부르는 것도 그같은 문화적 자취를 반영한다.

중세시대 이후부터 의자는 묵직한 소재를 이용해 위엄있고 정교하게 제작되어 교회의 고위 성직자, 황실 왕족, 지체높은 신분의 사람들이 앉아서 업무에 임하는 가구로 자리잡았다. 그러다보니 시대가 발전하고 양식이 변천하면서 의자는 다양한 유행과 안락성을 추구하며 디자인적 변천을 거쳐 만인들의 생활가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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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제프 호프만이 빈 푸르커스도르프 요양소 건축과 내부 실내장식을 위해 맞춤 디자인된 팔걸이 의자. 기하학적 선과 흑백 색상으로 정제된 건축과 실내를 일체감을 준다. 1904-1905년. Wittmann 생산.

특히 19세기말부터 모더니즘 운동이 대륙 전체를 열병처럼 뒤흔들었던 유럽에서 의자는 대중을 위한 가능적이고 윤리적인 원형적 모더니즘 품목으로 떠올랐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근대시대 문제에 봉착한 소외된 인류에 봉사하겠다는 사명감에 불탔던 독일의 바우하우스 운동의 선구자들은 의자란 그 어떤 군더더기 장식이나 불필요한 요소 없이 기능에 충실하며 미감적으로 아름다워야 한다고 믿었다.

건축 안팎 총설계를 맡은 건축가는 건물과 어울리는 인테리어, 가구, 악세서리 세부까지 총지휘하는 이른바 ‘종합예술(Gesamtkunstwerk)’을 추구했다. 예컨대 오스트리아의 거장 근대 건축가 요제프 호프만(Josef Hoffmann)과 오토 바그너(Otto Wagner)는 건축물과 어울리는 실내장식용 가구를 직접 디자인했다.

손쉽게 대량생산된 가구를 구입할 수 있게된 요즘과는 달리 건축에 어울리는 실내장식용 가구를 구하기 어려웠던 과거 당시의 사정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도 건축적 외양과 인테리어의 완벽한 일체성(unity)를 고집했던 근대 건축가들의 원칙주의 때문이었다. 유독 20세기 전반기 탄생한 대다수 의자들이 건축가의 손에서 탄생하게 된 이유도 바로 그래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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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가구생산업체 카시나는 르 코르뷔지에가 디자인한 LC2 큐브 체어 디자인 원형 그대로 현재까지 생산하고 있다. ⓒ Cassina, Italy.

독일의 근대 건축가 미스 반 데어 로헤(Ludwig Mies van der Rohe)가 디자인한 철재 의자 받침구조와 가죽 시트의 바르셀로나 의자는 지금도 비트라에서 꾸준히 생산판매 되고 있는 근대 의자의 고전작이 되었다. 스위스의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의 철제 팔걸이 의자와 핀란드의 알바 아알토(Alvar Aalto)의 라미네이트 굴곡목 의자도 건축가가 디자인한 의자의 대표작들이다. 독일 바우하우스 건축가 마르셀 브로이어(Marcel Breuer)는 철관이라는 근대적인 재료를 사용해 캔틸레버 공법을 응용한 의자 디자인의 혁신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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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네 야콥센(Arne Jacobsen)이 1958년 디자인한 달걀 의자(Egg™). © Fritz Hansen. Photo: Tim Bjørn.

유럽과 미국에서 디자인이 경제성장과 산업발전에 본격적으로 활용된 때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부터였다. 때는  건축가가 핵심 건축 프로젝트를 수주받으면 건축 설계와 가구와 실내장식까지 책임지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다.

예컨대 르 코르뷔지에, 독일의 에곤 아이어만(Ego Eiermann), 덴마크의 아르네 야콥센(Arne Jacobsen) 등은 건축 프로젝트 수주시 실내용 가구 디자인까지 책임지겠다는 조건으로 계약을 고집했다던 대표적인 ‘가구 건축가(furniture architect)’들이다. 아르네 야콥센(Arne Jacobsen)이 1958년 디자인한 달걀 의자(Egg™)는 코펜하겐 로열 호텔 로비와 리셥션 공간의 실내장식용으로 주문받아 제작되었다. 이 호텔의 건축 외형과 실내장식을 조화롭게 결합한 ‘가구 건축가’ 야콥센의 종합예술주의의 사례다.

전후 1950년대 이후부터 경제재건을 위해 이탈리아 뉴웨이브 붐을 일으키며 기랑성같은 디자인 거장을 배출한 이탈리아(죠 폰티, 카스틸리오네 형제 등)에서 가구와 인테리어 디자인은 물론 자동차와 가전제품 디자인에 기여한 주인공들도 다름아닌 건축가들이었다.

건축과 산업디자인을 별개의 분야로 결별시키려는 움직임이 제2차 대전 종전 이후 미국서 시작된 이래, 지금도 의자를 디자인하는 작업은 산업디자이너의 영역이 되어 버렸다. 미국의 찰스와 레이 이임즈( Charles & Ray Eames) 부부는 그들이 디자인한 의자와 가구를 가리켜서 “작은 건축”이라고 부르며 철제와 플라스틱을 소재로 한 제품으로 현대 디자인의 대량생산과 소비주의 문화를 선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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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넬슨의 마시멜로 의자. Collection Vitra Design Museum 
© Vitra Design Museum.

큐비클 사무공간의 창시자 조지 넬슨(George Nelson)은 허먼 밀러와의 협력 끝에 완성한 의자 디자인으로 유명해졌고, 현대 디자인 마케팅의 창시자 레이먼드 로위(Raymond Loewy)는 본직이던 그래픽 디자인에서 영역을 넓혀 의자를 디자인하는 것으로써 인테리어 영역까지 포용했다.

대량생산과 소비주의와 후기 산업사회가 무르익기 시작한 20세기 후반에 와서 건축가들은 의자를 디자인하는 일에서 한발짝 물러나 제품 디자이너들에게로 그 임무를 넘겨주었다. 20세기초 바우하우스식의 기능주의에 저항한 디자이너 개인의 독특한 컨셉과 스타일, 유연하고 혁신적인 사고가 의자 디자인에 임한 디자이너들의 주된 동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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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게리의 위글 체어. 값싸고 구하기 쉬운 소재가 유행했던 1960년대 디자인 트렌드를 가구 디자인에 응용했다. 에지보드로 불리는 카드보드 종이를 여러층으로 겹쳐 접착제로 붙여 제작하여 일상생활에서도 실용적으로 사용하기 충분할만큼 견고하다. 1972년 작품.

특히 1990년대부터 현재까지 전세계를 강타한 스타 아키텍트의 건축붐을 타고 의자 디자인은 건축가의 시그너쳐 건축 스타일과 창조적 자존심을 한데 결함해 뽐낼수 있는 품목으로 각광받고 있다.

카드보드를 겹치고 구부려 제작한 프랭크 게리(Frank Gehry)의 위글 체어(Wiggle Chair)라든가, 기상천외한 형태로 보는이를 어리둥절하게 하는 다니엘 리베스킨트(Daniel Libeskind)의 토르크 체어(Torq)는 의자 본연의 기능성 보다는 건축가의 개성을 응축시킨 조형성 강한 미니 건축에 더 가깝다.

이미 세상에는 도저히 다 팔수없을 만큼 많은 수의 의자들로 홍수를 이루고 있다고 한다. 어디 그뿐인가. 의자 본위의 기능성 보다는 건축가의 자아 표현이 위주가 된 예술작품으로서의 의자는 앉기에 그다지 편하지도 앉은게 사실이다.

Hadid Z chairs

“움직이는 형태(Form in Motion)”라는 슬로건을 모티프로 자하 하디드가 디자인한 Z-체어(Z-Chair), 스테인레스 광택 강철 소재, 24개 한정수량으로 Sawaya & Moroni 생산. 2011년 작품.

그러다보니 세상에 넘쳐나는 의자들에 대한 일부 젊은 디자이너들의 볼멘 소리도 잦아졌다. 예컨대 올 2012년 핀란드 헬싱키에서 열리는 세계디자인수도 행사를 기해 핀란드 출신의 젊은 디자이너들은 지구환경보전을 위해 ‘제발 더 이상 의자 디자인은 그만’하자는 이색 캠페인을 벌인다는 소식도 있었다.

역사의 흐름과 함께 변천해 온 의자 디자인은 또 미래에 어떻게 진화해 나갈까를 상상해 보는 것도 흥미로운 숙제거리일듯 하다.

 

예술가가 다른 예술가를 이해하는 방법

BOOK REVIEW

Floating Worlds – The Letters of Edward Gorey & Peter F. Neumeyer, edited by Peter F. Neumeyer

floatingworlds_sm창조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한 번쯤 같이 작업해 보고 싶은 ‘꿈의 창조적 협동자’ ‘성인은 위한 그림 소설 작가’ – 요즘 구미권 아티스트, 디자이너, 작가들 사이에서는 만일 창조적 협력을 할게 될 경우 같이 일해 보고 싶은 사람으로 미국 출신의 일러스트레이터 에드워드 고리 (Edward Gorey, 1925년* – 2000년†) 를 꼽는다.

아동문학계는 물론 성인 애독자와 일러스트레이션 미술 애호가들 사이에서 컬트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는 에드워드 고리의 머리와 마음 속을 읽어볼 수 있는 책 《덧없는 세상》을 살펴보자. 2013년 11월15일 자 디자인정글에 실린 북리뷰 계속 읽기

책 제목: 《덧없는 세상 – 에드워드 고리와 피터 노이마이어의 편지 모음(Floating Worlds – The Letters of Edward Gorey & Peter F. Neumeyer)》
편집자: 피터 노이마이어(Peter F. Neumeyer)
출판사: 포므그레네이트 출판사(Pomegranate: San Francisco)
출간년도: 2011년 1월

 

 

중국 회화사 1,200년

MASTERPIECES OF CHINESE PAINTING 700-1900

옛 것과 역사의 전통을 배우고 익혀 새로운 이치를 깨닫게 된다는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의 정신에 입각할 것 – 이 원칙은 과거 서양미술이든 중국미술이든 공히 미술을 창조하는 자라면 알고 있어야 할 기본 정신이자 갖춰야할 태도였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역사의 중요성을 잊은채 살아가는 수많은 현대인들은 이 무슨 고리타분한 공자의 말이냐며  눈살을 찌푸릴지도 모르겠다. 허나 철학자 조지 산타야나(George Santayana)가 “역사를 망각하는 자는 역사를 되풀이하는 댓가를 지불할 것”이라 경고했듯, 역사를 모르는 인간과 민족에게는 혁신도 진보도 기대할 수 없음은 거역할 수 없는 역사적 진리다.

올 가을, 영국 런던 빅토리아 앤 앨버트 박물관에서는 매우 보기드문 야심찬 고미술 전시회가 전시의 막을 올렸다. 과거 1,200백년 중국 회화사를 총마라한 중국 회화 걸작품 약 70여점을 해외 미술기관과 사설 소장처로부터 대여해와 전시하는 『중국 회화 걸작전(Masterpieces of Chinese Painting, 700-1900)』전에서는 이제까지 중국회화사 대학교재에나 볼 수 있었던 중국 미술사상 걸작 대표작들을 한 자리서 직접 만날 수 있는 매우 드문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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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세기 초엽 송나라 휘종이 그렸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풍속도는 새로 짠 비단천을 정리하는 궁녀들의 모습을 묘사했다. Photograph © 2013 Museum of Fine Arts, Boston.

과거로부터 20세기 초엽까지 중국 회화의 역사를 변함없이 가로지른 미학적 개념은 다름 아닌 전통(tradition) 대 혁신(innovation) 간의 상호작용.  시대의 변천에 따라 중국 화가들이 구사했던 양식 속에는 저마다 색다르게 구현되었지만 그 속에는 언제나 전통을 완벽하게 체득하고 모사하고 이해・소화한 끝에라야 비로소 화가 개인만의 독창적이고 혁신적인 양식을 탄생시킬 수 있다는 중국 미술의 원칙이 깔려있다.

신앙과 제례를 위한 미술 – 8세기〜10세기 중엽 이 시기 중국에서 제작된 대다수의 회화작품들은 불교 제례용 또는 제물용도로 쓰일 목적으로 무명 장인이나 승려들의 손으로 극도로 완성도 높게 제작되었다. 예컨대 『승복 차림을 한 보살(Bodhisattva Wearing Monastic Robes)』같은 작품은 화려하고 선명한 색상의 안료를 비단 화폭 앞뒤 양면에 여러차례 세심하게 그리고 또 그리는 수법으로 제작되었다. 이를 통해서 이 법화는 벽에 걸어 놓고 보는 2차원적 그림이 아니라 조각작품처럼 3차원적 공간에 걸어두고 사방 어디서나 보고 감상하도록 한 설치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불교를 탄압했던 당나라 시대 9세기 중엽, 대다수 불교 미술은 당나라 황실의 박해의 손길이 채 미치지 않았던 중국 북서부 돈황(敦煌)지방으로 건너가 그 맥이 유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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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미술의 제1 황금기로 꼽히는 당나라 시대. 당나라 시대 세속화로 그려진 두루마리 삽화 그림에서 볼 수 있듯 8〜10세기라 해서 모든 그림이 불교미술은 아니었다. 『The Five Planets and Twenty-eight Constellations (detail)』 Unidentified Artist; traditionally attributed to Zhang Sengyou, Date: 960 – 1127 © Osaka City Museum of Fine Arts.

사실주의를 향한 모색 – 10세기 중엽〜13세기 중엽 종교화와 인물화가 주를 이루던 이전 시대에서 한 걸음 벗어나, 이 시대가 되자 화가들은 자연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산과 강 경치, 동물과 식물들, 변화하는 사계절과 경치 속을 오가는 여행객들과 어부들의 모습. 이 모두 이 시대 화가들의 면밀한 관찰의 대상이 되어 화폭으로 옮겨졌으니, 이렇게 하여 중국 미술계는 전에 없던 산수화의 시대를 전격 개척하기에 이르렀다.

이 시대가 되자, 비단 위에 찬연한 색상으로 구사한 고급 채색화는 주문에 응해 그리는 화원계열(畵院系) 직업 화가가 궁중이나 고관대작들의 실내장식용 미술로 그 영향력이 제한된 반면, 한결 개인주의적이고 창의적인 문인출신 아마츄어 화가들은 종이에 검정 묵 만을 사용한 흑백 수묵화의 새 경지를 이룩해 고결한 미감을 떨치기 시작한 때가 또 이 시대다.

북송파 산수화의 대가 범관(范寬)과 나란히 송나라 산수화 양대 산맥을 이룩한 연문귀는 이른바 “연가경치(燕家景致)” 양식을 구축해 산수화 대가로 이름을 날리며 황실화가로 일했다. 연문귀(燕文貴)의 산수화는 범관풍 기념비적 산수화에서 볼 수 있는 우뚝선 높은 악산 풍경에 한 술 더떠서 사사로운 세부적 풍경까지 곁들여 넣어 그렸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범관의 남성적이고 우직한 양식에 비해 한결 섬세하고 고적한 분위기와 시적 아름다움을 풍기는 것으로 평가받는 연문귀의 그림은 그래서 부채 같은 작은 개인용 소지품용으로 즐겨 사용되곤 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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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문귀의 『정자가 있는 산수 (Landscape with Pavilions)』 10세기 경 © Osaka City Museum of Fine Arts.

회화는 은둔자의 벗 – 13세기 중엽〜15세기 중국 회화 이 시기는 몽골족이 중국  남송 왕조를  무찌르고 원나라를 세워 중국 황실의 대를 이어나갔던 오랑캐의 집권 시절이었다. 다수민족이던 한족(漢族)은 과거 남송 시절 활발하고 번창했던 상업과 자유로왔던 문화적 분위기를 뒤로 하고 노예계급으로 전락해 억압적이고 민족차별적인 정치적・사회적 분위기에 처하게 이르렀다.  소수의 지식층과 불교 승려들은 세속적 출세를 포기하고 자연 속으로 귀의하여 그림그리기, 서예, 시를 벗삼아 일평생을 보냈는데, 그 결과 원나라의 화단은 다시 한 번 출중한 언더그라운드 화가들에 의해 선도된 매우 독창적이고 예술성 높은 미술 세계를 이룩하는 결과를 낳았다.

남송 시대까지 황실 화가로서 주문화를 그리던 기술 뛰어난 화원계 화가들은 원나라 시대가 되자 예술분야의 지원이 사라지면서 황실에서 자취를 감추고 지방으로 귀향했다. 그런가하면 남송 시대와 한족이 주도하던 정통 중국황실에 대한 향수를 버리지 못했던 선비층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문인화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또 이곽파로 불리는 일군의 화가들은 북송 시대에 유행했던 대규모의 기념비적 양식의 산수화를 다시 한 번 회생시켜 중국 회화를 재정의하고 싶어했다. 이후 원나라 말엽으로 치달아가면서, 선비 화가이자 탁원한 서예가였던 조맹부(趙孟頫)는 남송시대의 인문주의 정신과 송나라 강남의 산수풍경을 모범으로 삼은 복고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혼탁해진 세상을 뒤로 하고 자연에 귀의한 선비들과 불교 승려들에게 미술을 더 이상 자연에 대한 관찰과 사실적인 묘사의 수단이 아니었다. 그림은 은둔자의 내면세계, 감정상태, 사색과 명상이 담긴 표현 수단이 되었고, 그러하다보니 자연히 그들의 그림은 기술적 완성도나 손재주 보다는 저마다 독특한 개성적인 양식과 철학을 담은 한결 주관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예컨대, 원말 4대가중 조맹부와 왕몽(王蒙)은 남송풍 산수화를 통해서 역경의 시대 속에서도 굳건히 이겨내야 한다는 지조와 인내의 미덕을 표현하고자 했다. 왕몽이 그린 『무너진 다리에 핀 향기로운 눈꽃』은 늦겨울 눈 속을 뚫고 피어나오는 매화꽃을 이용해 매란국죽(梅蘭菊竹) 사군자(四君子)에 담긴 문인을 상징한다. 그런가하면 승려 화가 석계(石恪)는 단순하지만 단호한 필치와 색상으로 자유분방하고 즉흥적인 그림을 그려 선불교 정신을 탁월하게 담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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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계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二祖調心圖 (Two Chan Patriarchs in Contemplation)』 13세기, Tokyo National Museum, Japan. Image © TNM Image Archives

중국 회화의 르네상스 시대, 15세기〜17세기 중국의 명왕조 시대는 유럽의 르네상스 시대와 비견될 수 있는 중국 문화의 최고 절정기였다. 원왕조가 물러나고 한족이 지배하는 명나라가 중국 황실을 계승하자 선비층 지식인들은 다시 속세로 복귀했고 경제는 부흥했으며 사회문화 분위기는 활기를 되찾았다. 이를 입증하듯, 임인발(任仁發) 그림으로 추정되는  『네 가지 즐거움』에는 선비가 아끼는 4가지 즐거움 – 서예, 그림, 음악, 장기 – 취미활동을 그림으로 표현해 놓았다.

명나라 미술을 중심지로 다시금 중국 남부의 항주, 남경, 소주가 급부상하며 저마다 화단를 형성했다. 경제가 재부흥하고 그림에 대한 수요가 높아지다 보니 화가들은 다시금 값비싼 고급 장식용 그림을 주문받아 그리기 시작했다. 그런 분위기를 반영하여 화가들은 종이 대신 고급 비단 위에 귀하고 비싼 안료를 소재로 한 그림들을 유독 많이 그리기 시작했다. 원나라 시대 하에서 핍박받던 한족 사대부들이 그토록 목마르게 그리워했던 과거(송나라를 포함한 그 이전 시기) 고전이 다시 유행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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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영(1495-1552) 『Saying Farewell at Xunyang (detail)』 16세기 초반 The Nelson-Atkins Museum of Art, Kansas City. Photograph: John Lamberton.

과거 역사나 문학작품에 등장했던 일화와 낭만적 인물에서부터 명지와 명소, 정원, 희귀하고 아름다운 동식물에 이르기까지 자연과 인간의 아름다움을 그림으로 그려 한껏 향유하며 감상했다. 예컨대 공필(工筆)법의 달인이던 구영(仇英)은 환한 청녹색 물감으로 환상적 분위기의 산수화를 잘 그렸는데 그의 그림은 언뜻 당나라 시절 유행하던 환상적인 전설그림을 떠올리게 한다. 관료시험을 실패한 후 선비화가가 된 토근(杜堇)의 그림에는 중국에서 전족관습이 일반화되기 전 당나라 시대(10세기 이전)에 대한 향수를 표현이나 하듯 후궁들이 자유롭게 공놀이하던 모습을 담았다.

전통에 대한 도전, 17세기〜20세기 1616년, 중국은 명나라의 멸망과 함께 다시 한 번 북쪽에서 내려온 오랑캐의 지배하로 들어가게 되었다.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는 한족과 여진족 사이의 민족적 갈등에도 불구하고 유럽과의 무역증대와 문물교류, 농업의 발달, 상업의 활성화로 근대적 개념의 신체제를 구축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런가하면 기인적 성품과 매우 독특한 양식으로 과거 전통에 도전한 화가들도 있는데, 특히 팔대산인(八大山人, 본명 주답(朱耷))은 그 대표적인 예다. 오늘날까지도 특정 화파로 규정하기 어렵도록 독자적인 양식을 구축했던 그는 본래 명나라 영왕의 후손이었으나 영왕의 피살사건 후 세속을 버리고 수도승이 그림을 그렸던 ‘기인’이자 개인주의 은둔화가로 유명하다. 그가 남긴 길이 14미터 두루마리 회화 걸작 『강 위의 꽃』은 오늘날까지 전해오는 동양화 그림중에서 길이가 가장 긴 그림중 하나로 꼽힌다. 72세의 나이로 그려낸 이 대작은 팔대산인의 탁월하고 절묘한 묵 처리 재주로 보는이의 감탄을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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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대산인 『강 위의 꽃』1697년 © The Tianjin Museum Collection.

세속 세계 청나라 화단도 전에 없이 많은 문인화가들이 과거 회화 명인들의 작품을 보고 베끼고 재해석하면서 동시에 서로 각축하고 있었다. 옛 명대 지식인들이 취미와 풍류 삼아 하던 그림그리기는 시가와 서예와 더불어서 교양있고 취향이 고결한 기품있는 문인이라면 당연히 갖춰야할 기본적 소양이 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러하다보니 이 시기 회화들은 언뜻 보기에 기량이 미숙해 보이는듯한 아마츄어풍 문인화가 기술적으로 완벽하게 그려진 직업화가의 그림 보다 정신적으로 훨씬 고매하고 우월하다고 여겨졌다. 그같은 관점이 보편화되기까진 명나라 말기부터 활동하며 중국 회화론을 재정의한 문인 겸 화론가 동기창(董其昌)의 공이 결정적이었다.

중국인들의 아편 중독, 무역 재정 불균형과 고갈, 더 잦아진 외세열강의 침탈 끝에 결국 청왕조가 해체된 1212년 2월까지, 청나라 궁중화가들은 황실을 통해 들어온 유럽 미술가들로부터 그 이전까지만 해도 과거 중국 그 어디서도 보지 못한 회화 기법들(원근법, 명암법 등)에 잔뜩 매료된채 다가올 격동의 20세기 초반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전시명: 중국 회화사 1,200년 (MASTERPIECES OF CHINESE PAINTING 700-1900) | 전시 장소: Victoria and Albert Museum London | 전시 기간: 2013년10월26일-2014년 1월19일. Images courtesy: The Victoria & Albert.

소비문화 디자인의 창시자 레이먼드 로위의 디자인

EXHIBITION REVIEW

딜럭스 코카콜라 디스펜서 장치. 제2차대전중에 디자인 개발되어 전후 1947년부터 본격 출시되었다.

『추한 것은 팔리지 않는다 (Never Leave Well Enough Alone)』 – 20세기 중엽 미국 산업 디자인계의 수퍼스타 레이먼드 로위(Raymond Loewy)가 쓴 자서전의 독일어판 제목(Hässlichkeit verkauft sich schlecht)이다.

잘된 디자인은 천편일률적으로 제조된 대량 생산품에 독특한 개성을 부여하고 보기좋게 포장해서 소비자들의 구매충동을 자극해 매출증가에 기여한다.

오늘날 상식처럼 되버린 그같은 원칙을 제일 먼저 제창하여 기업 이윤 획득으로 연결시킨 장본인은 바로 레이먼드 로위였다. 그런 점에서 그는 초기 디자인 마케팅의 선구자이기도 한 셈이다. Continue reading

1970년대 국제 건축 양식

소수의 걸작과 다수의 졸작의 시대

ARCHITECTURE OF THE 1970s – Masterpiece vs Mediocrity : The Second International Style

1970년대 제2차 국제 건축 양식
아방가르드가 주류로, 이상주의가 상업주의로
자본주의적 기성 체제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과 이념적인 이상주의(idealism)가 사회와 예술문화 분야에서 활발하게 전개된 1960년대가 막을 내리고 1970년대가 출범했다.

1960년대 말, 유럽과 미국 사회를 한바탕 혼란과 자각적 환기로 몰아 넣었던 플라워파워 세대를 향해 반격의 일타를 가하기라도 하듯, 1970년대가 시작하자마자 로큰롤의 제왕 엘비스 프레슬리가 죽었고 이어서 1960년대말 저항 록음악의 대명사 재니스 조플린, 짐 모리슨, 지미 헨드릭스가 줄지어 그 뒤를 따라 세상을 떠났으며 전설의 록밴드 비틀즈가 해체했다.

전세계의 냉전 구도는 팽팽한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는 가운데 다국적 기업들은 나날이 대규모화되고, 지속적인 경제 부흥을 유지하기 위해서 광고와 마케팅은 그 언제보다 정교하고 세련되어 졌으며, 사람들의 일상 생활은 나날이 윤택하고 편리해 졌다. 우주 공상과학 영화 《스타워즈 (Star Wars)》와 TV시리즈 《스타 트렉 (Startrek)》은 정치적 냉전시대를 반영이나 하듯 선악(善惡) 모럴과 목적론적 낙관주의로 미국인들의 세계관을 형성하고 있는 동안에, 전에 없이 많아진 공중파 라디오에서는 귀를 거스르는 60년대풍 록음악 대신 한결 듣기 편한 소프트록과 디스코가 대중들의 정서를 차분하게 길들이고 있었다.

1970년대, 저항 및 주변 세력의 주류화 (mainstreaming)와 아방가르드의 상업화 (commercialism)는 건축 분야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20세기 전반기 구축된 모더니즘 건축을 주류 건축의 표본으로 삼아 대규모로 상업화하기란 건설업자들 측에서도 효율적이었다. 단순간결하기 때문에 측정 표준과 기준 치수를 표준화하기에 매우 쉬우며 따라서 무한대로 반복사용할 수 있다는 모더니즘 건축의 장점 때문이었다.

그 결과, 건축물 바깥 모습은 대체로 철골과 유리판으로 뒤덮힌 따분한 육방체 형태를 띠는 것이 일반적이 되었고, 건축 실내는 상상력이나 변조적인 공간이 불가능한 천편일률적이고 뻔한 공간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 시대 건물들에서 발견되는 무미건조하고 커다락 상자 미학은 디자인 분야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1970년대는 20세기 초엽부터 1930년대까지지 무렵에 형성된 바우하우스 (Bauhaus) 건축 양식에서 비롯된 제1차 국제 건축 양식의 겉모양새를 본따서 쓰되 그 외형을 대중 주택 건설 프로젝트, 학교, 병원과 보건소, 도시 설계 등과 같은 공공 건축 건설 사업에 널리 두루 활용된 ‘모더니즘 건축의 무더기 대랑 생산의 시대’로 정의된다. 혹은 건축 디자인사에서 흔히 도는 평가에 따르면, 제2차 국제 건축 양식의 시대 특히 1970년대에 서구 구미 세계 도처에서 창궐한 모더니즘풍 건물과 고층 빌딩은 1930년대 즈음부터 서서히 보편화되기 시작한 ‘제1차 국제 건축 양식의 답습과 반복’의 결실이라고 여겨지고 있다.

그런가 하면, 1970년대는 건축 사진의 조작과 연출의 시대이기도 하다. 《아키텍쳐럴 다이제스트 (Architectural Digest)》 (줄여서 《AD》라고 부른다.) 같은 건축 전문 잡지를 통해서 보여지는 건축 사진 이미지가 현실 속에서 실제 건축물을 보고 느끼는 일반인들의 시각적 판단력을 압도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AD》誌가 자랑하는 특유의 사진 촬영 기법과 편집 방식은 건축 실내외 공간에 활기차고 실험적인 느낌을 잘 부각시킨 예로 꼽힌다.

이 시대의 건축 연출 사진은 또 1960년대 말부터 서구 사회에 만연해진 다문화주의 (multi-culturalism)적이고 이국적 색채를 현대적 감각으로 각색해 다채롭게 활용하기 시작했는데, 그로 부터 비롯된 미적 감각 곧 뒤이어 1970년대 말엽 부터 고개를 들어 1980년대를 호령한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 (Post-Modernism)’ 건축의 등장을 앞서 예고하는 원인이 되었다.

‘제2차 국제 건축 양식’으로도 부르는 1970년대의 모더니즘 건축은 보다 일찌기 세워진 거장 모더니즘 건축가들의 작품의 외형만을 이리저리 적당히 배끼고 변형해 대량으로 공급한 ‘모사 건물 (imitation architecture)’의 시대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1930년대 전후, 독일 바우하우스 건축가들을 주축으로 해 근대적 유토피아 세상 건설이라는 야심찬 이상(理想)이 건축을 통해서 단발적으로 지속되다가, 20세기 중엽에 이르자 이른바 ‘국제 건축 양식 (International Style in Architecture)’은 대학과 건설업계에서 점차 일종의 건축 관습의 하나로 굳어져 갔다.

특히 1970년대에 접어들자 전세계는 구미권과 제3세계권 할 것 없이 도처 구석구석에서 크고 작든 규모에 상관없이 온통 사각형 모양을 한 콘크리트 건물들이 없는 곳이 없게 되었다. 철근을 심은 콘크리트 벽과 강철 건물 골조에 유리나 금속판을 끼워 넣거나 매어 다는 시공 기법은 20세기 전반기만 해도 신소재와 형상의 잠재적 미학을 극한으로 밀어 부친다는 모더니즘 건축가들의 실험정신의 발현이었다. 그러나 제아무리 혁신적인 사상도 세월이 지나면 타성의 산물로 변하는 법이던가. 20세기 후반에 들어서 그같은 요소들은 건물짓기의 표준 공식 내지는 표준 시공 요소로 보편일반화 되기에 이르렀다.

혁신적인 모더니즘 건축의 계승 그리고 타성화
사실상 따지고 보면 1970년대 즈음이 되어서 모더니즘 건축을 전보다 혁신적이고 파격적인 경지로 더 밀어붙이겠다는 야심은 그러나 말처럼 그다지 쉬운 일은 아니었다. 과거 20세기 전반기에 우후죽순처럼 등장한 건축 명인들은 모더니즘 건축이 이룰 수 있던 결실 면에서 이미 높은 성취도에 이르렀기도 했을 뿐만 아니라 1940년대 전후 이후로 본격화된 전세계 건축붐을 타고 전에 없이 많은 건설 주문자들은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앞다투어 모더니즘풍 건물을 선호했던 때문이기도 했다.

또 그런가 하면, 미국에서의 1970년대는 유럽에서 온 모더니즘 건축의 거장들이 미국 유수의 건축 대학에 자리를 잡고 후배 건축가들을 키워낸 신세대 건축가 대거 배출의 시대이기도 했다. 1930년대 독일 나치 정권이 유태인들은 물론 예술가, 건축가, 과학자들을 대거 배척했던 이유로 해서 그 결과 다수의 재능있는 건축가들이 미국으로 이주해 오면서 미국은 단숨에 건축과 예술의 중심지로 탈바꿈하는 수지를 맞았던 것이다.

발터 그로피우스는 나치와의 협력을 거부하고 1934년에 영국으로 건너갔다가 1937년에 하버드 대학의 건축학과 학과장직을 임명받고 미국으로 가 정착했다. 독일의 건축가 디자이너인 마르셀 브로이어 (Marcel Breuer)도 뒤따라 하버드에서 그로피우스와 나란히 대학 강단 생활을 했다. 20세기초 다다이스트 겸 초현실주의자 모홀리-나지 (Moholy-Nagy)는 새 바우하우스를 미국에 건설하겠다는 포부를 품고 1937년에 미국 시카고로 건너갔으며, 요제프 알버스 (Josef Albers)는 브랙마운틴 칼리지(블랙 마운틴 칼리지는 라우셴버그, 재스퍼 존스 등 1940-50년대 전후 미국 추상 미술의 주도적인 미술가들을 배출했다)와 예일에서 미술과 디자인을 가르쳤다.

1970년대 건축계의 군계일학들
건축 구조 공학 전문가로서 더 빛을 발한 스위스 출신의 건축가 로베르 마이야르 (Robert Maillart), 프랑스의 외젠느 프레시네 (Eugéne Freyssinet), 이탈리아의 피에르 루이지 네르비 (Pier Luigi Nervi)는 자칫 차갑고 무미건조한 모양으로 전락하기 쉬운 콘크리트 소재에다 상상력과 합리적인 감각을 결합한 독특한 미학적 인상을 남긴 건축가들로 꼽힐만 하다.

특히 네르비는 일찌기 1940년대 부터 이탈리아 투리노 전시장 건물(1948-49년), 파리 유네스코 빌딩(1953-58년, 마르셀 브로이어와 베르나르드 체르푸스 (Bernard Zehrfuss) 공동 설계), 호주 퍼스 뉴 노르시아의 교회당 건물(1960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육중한 콘크리트 안에 강철망을 심는 그만의 기법을 고안해서 육중한 콘크리트 덩어리가 마치 자유롭게 흐느적거리는 듯한 유연미끈한 곡선을 연출할 수 있었다.

호주 시드니의 명물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Sidney Opera House, 건설 기간 1957-73년)는 덴마크의 간판급 모더니즘 건축가인 요른 웃존 (Jørn Utzon, 1918년 생)의 대표적인 역작이며, 핀란드 출신의 건축가 겸 디자이너인 에에로 사아리넨 (Eero Saarinen)은 1962년도에 완공된 미국 워싱턴 D.C. 덜레스 국제 공항 (Dulles International Airport)을 설계를 맡아서 전에 보지 못한 전격적으로 새로운 구조 공사 해법을 발휘해 건축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런가 하면 역시 핀란드 출신의 거장 모더니즘 건축가인 알바 아알토 (Alvar Aalto)는 20세기가 낳은 주류 모더니즘 건축가들과는 차별되는 색다른 모더니즘 철학을 고집한 것으로 유명하다. 1920년대 중엽 이후부터 1970년대로 접어들 때까지 40여년에 걸친 건축 생애를 살면서 여타 건축가들이 그토록 찬양해 마지 않았던 산업용 소재들 예컨대, 강철, 콘크리트, 대형 통자 유리판, 알루미늄 등을 건축물에 도입하는 것을 끝까지 부인했다. 그리고 그대신 아알토는 핀란드 특유의 광활하고 친자연주의적 미학과 공간 개념에 기초하여 친숙하고 감각적이면서도 과장이나 일편의 가식이 제거된 순수미의 신경지를 개척했는데, 그래서 그는 주로 자연석, 원목, 구리 이음새 만을 사용하여 실내 공간 전체에 햇빛을 최대한 들이고 분배할 줄 안 세련된 공간 창조의 명수로서 20세기 건축사에 길이 기억되고 있다.

1970년대 건축계에서 빛의 조율사 라고 하면 또 떠올릴 수 있는 이름으로 미국의 건축가 루이스 칸 (Louis I. Kahn)을 들수 있는데, 미국의 1960년대와 1970년대를 가로지르며 활약한 그는 루이스 설리번 (Louis Sullivan)이 선언한 그 유명한 모토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 (Form follows function)”를 새롭게 해석하여 기능이 건축물의 모양을 결정짓는 건축을 추구했다. 특히 그가 설계하여 1972년에 완공을 본 텍사스 포트 워스의 킴벨 미술관 (Kimbell Art Museum)은 건물 내부의 긴 통로의 천정 공간에 빛을 오묘하게 조절하는 대들보를 설치하는 방법을 통해서 장대한 분위기를 연출한 명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미국에서 1970년대 국제 건축 양식이 널리 보편화되기까지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건축가는 미국의 필립 존즌 (Philip C. Johnson)이었다. 하버드 대학 건축학교 발터 그로피우스의 제자이기도 했던 그는 모더니즘 건축계 최고의 카리즈마적 거장 미스 반 데어 로헤 (Mies van der Rohe)와도 친분을 나누었는데, 일찌기 1951년에 미스 반 데어 로헤와 함께 시키고 레이크 쇼어 드라이브 고층 아파트 건물 설계를 함께 담당하기도 했다. 곧이어 1956-7년, 존슨은 뉴욕 시그램 양주 제조사 본부 건물 설계 프로젝트를 따서 그가 존경해 마지않던 바우하우스의 거장 미스 반 데어 로헤와 함께 공동 설계하는 영광을 누렸다.

올 2005년 1월에 98세의 나이로 타개한 것으로 보도된 필립 존슨은 독일 나치주의에 가슴 깊이 동조했다는 어두운 내면의 소유자로서 건축사 뒤안길에 남아 있지만, 또 한편으로 생전 팝아티스트 앤디 워홀을 뺨치는 적극적인 자기홍보가였으며, 유명 헐리우드 배우들을 능가할 만큼 명성과 글래머를 일관적으로 추구했던 맹렬한 건축계 커리어리스트로도 기억되며, 오늘날 프랭크 게리 (Frank Gehry)에서 자하 하디드 (Zaha Hadid)에 이르기까지 현대 건축계의 수퍼스타로 군림하고 있는 A급 건축가들에게 영감의 원천을 안겨준 인물이었다.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20여년간 뉴욕 근대미술관 (MOMA) 의 건축담당 디렉터직을 맡으면서 바우하우스 건축 미학의 열렬한 옹호자로 활약했던 필립 존슨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마천루의 본고장 뉴욕의 스카이라인을 창조하는데 큰 획을 그은 장본인이었다.

1950년대 이후 전후 미국 대도시에서 전격적으로 전개된 마천루 (Skyscrapers) 건설붐은 오늘날 1970년대 제2차 국제 건축 양식을 논할 때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기념비적 건축물 건설을 가능케 했다. 1970년대보다 앞서 1950년도에 완공된 뉴욕 국제 연합 기구 빌딩 (United Nations Building)은 미국 빌딩붐을 선포한 최초의 전후 미국 건축의 르네상스를 예고한 상징물이다.

“Less is more” 라는 건축 철학을 토대로 본래 그로피우스와 미스 반 데어 로헤가 1930년대 초엽에 독일 바이마르 바우하우스 학교에서 착상해 두었던 단순 간결한 실용주의적 기능주의 (utilitarian functionalism) 컨셉을 기초로 설계된 이 국제 연합 빌딩은 아이러니컬 하게도 그로피우스와 미스 반 데어 로헤가 제외된 국제 건축가 팀의 단체 협력으로 설계를 마쳤다. 그런가 하면 최근들어 건축계의 재조명을 받고 있는 브라질의 이상주의 건축가 오스카 니마이어 (Oscar Niemeyer)는 한 건축가의 비젼이 어떻게 유토피아 국가 건설에 기여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 놀라운 예로 꼽을 만하다.

흔히 1970년대의 모더니즘 건축은 대기업과 대형 정부 조직체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지만 일반인들로부터는 외면당한 반쪽의 건축 양식이었다고 평가되곤 한다. 20세기 전반기의 제1차 국제 건축 양식이 중소형 규모의 공공 건물이나 거주용 개인 주택을 통해서 모더니즘 시대의 새로운 건축과 실내 공간을 실험했다면, 20세기 후반의 제2차 국제 건축 양식은 모더니즘의 모태와 뿌리로부터 단절되어 냉냉하고 비인간적인 한 편의 거대한 기념탑으로 변질되었다.

제2차 국제 건축 양식은 대기업이나 정부 조직체의 재력이나 행정력을 과시하기 위한 상징적 아이콘이었으나 반면에 건축의 외형이나 실내 구조는 인간에 대한 배려(예컨대 핀란드 건축가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던 휴먼 스케일 (human scale)은 뒷전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1960년대 이후 건축 생애의 말년에 접어든 르 코르뷔지에가 유독 인간의 영혼과 건축의 조화에 관심을 두었던 사실이나, 벅민스터 펄러 (Buckminster Fuller)가 환경주의 건축과 디자인의 사회적 책임을 다그쳤던 점, 그리고 20세기 후반의 무자비한 고건물 건축붐에도 아랑곳 않고 건축물의 상징성을 일관적으로 표현했던 에에로 사아리넨의 건축 정신이 유독 소중하게 재검토되고 있는 것도 바로 그래서가 아닐까.

* 이 글은 본래 『공간사랑』 지 2005년 6월호 “History of …” 컬럼에 연재되었던 기사를 다시 게재한 것임을 밝혀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