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thly Archives: April 2013

창조의 여정은 지그재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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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북리뷰

책 제목: 『창조의 여정은 지그재그 (Zig Zag – The Surprising Path to Greater Creativity)』 | 저자: 키스 소여 (Keith Sawyer) | 출간일: 2013년 3월 18일

아직도 90년 가까이 남은 미래 21세기 시대, 인류는 과거 그 어느 때 보다도 왕성한 창조력을 발휘해야만 생존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반세기 인류는 소비 지향적 경제체제 속에서 물적 풍요를 거듭해왔다.

그러나 인류는 머지않아 풍요의 시대를 뒤로하고 자원과 에너지원의 고갈, 기후변화로 인한 식량난, 제로 경제성장, 인구증가 등 심각한 문제로 도전받게 될 것이라 한다. … [중략] 디자인 정글에 실린 북리뷰 계속 읽기(2013년 4월 19일 자)

 

에곤 실레 풍경화가로 다시 보기

EGON SCHIELE  AS A LANDSCAPE PAINTER

에곤 실레가 탐색한 풍경화의 세계 – 저물어 가는 허장성세 바로크 여명기에 싹튼 개인주의 예술 세계 
‚구스타프 클림트의 후계자’ ‚비엔나 유겐스틸의 화가’ ‚오스트리아 표현주의의 기수’ – 19세기에서 20세기로 접어드는 세기 전환기 비엔나에 살았으며 여인과 에로스의 화가로 일반에게 잘 알려져 있는 에곤 실레 (Egon Schiele, 1890-1918)를 한 마디로 정의하려도 시도한 별칭들은 여럿있다. 그만큼 그는 사춘기 전후의 어린 소녀로 부터 성숙한 여인에 이르기까지 정말 다양한 포즈와 도발성을 표현한 여인 그림을 많이도 그렸다.

실레는 1890년에 태어났으니 역시 ‘여인 초상화가’로 불리는 클림트 (Gustav Klimt, 1862-1918) 보다는 인생 면에서나 화가라는 직업적 면에서나 근 30년이나 후배뻘이 되는 셈이다. 일찌기 기성 화가로서의 입지를 굳혀서 중상층 이상 계층의 미술 애호가들과 부유한 아녀자들의 초상화를 주문받아 그리주는 일로 남부럽지 않게 넉넉한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던 클림트와는 대조적으로, 실레는 오늘날로 치면 도색 잡지의 기능을 담당하는 에로틱한 소녀상과 여성상을 그리는 일을 주업으로 생계를 꾸렸던 도색그림쟁이였다.

Egon Schiele: Hauswand am Flusss, 1915, 110x140cm

에곤 실레 『강변의 집 담벼락』 1915년 작. Courtesy: Leopold Museum, Wien.

반면에 여자 그림을 그리는 화가 겸 제도사로 알려져 있는 실레가 풍경화도 잘 그리는 순수 풍경화가라는 사실을 아는 일반인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 따지고 보면, 경우는 클림트의 사례도 그다지 다르지 않다.

클림트는 생전 1989년 세상을 뜬 해에 이르기까지 20년 동안 화가 일생을 살면서 그린 풍경화 작품들만도 55점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평소 작업하는 실내 아텔리에를 벗어나서 오스트리아의 유명한 자연 휴양지를 여행하면서 숲과 호수 경치를 틈틈히 그려댄 결과였으니 그는 분명 두말할 것 없는 집착적인 다작가(多作家)였다.

클림트에게 있어서 여성화가 대체로 주문에 응해 그려진 생계용 그림 프로젝트였다고 한다면 풍경화는 여가 시간을 쪼개어 창조성을 발산하고 영감을 충전하기 위한 순수 표현의 수단이었다고 보면 되겠다. 그가 풍경화가로서도 가치 높은 업적을 남겼다는 사실은 그의 고국 오스트리아를 벗어난 해외에서는 아직도 그다지 폭넓게 알려져 있지 못하다.

벌써 2년전 즈음, 이곳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있는 국립 벨베데레 갤러리 (Österreichische Galerie Belvedere)에서 4개월에 걸쳐 국가적 규모의 <클림트 풍경화> 전을 열었던 것도 풍경화로서 클림트를 재조명하는 것은 물론 클림트의 풍경화에 관한 한 최대의 소장 규모를 자랑하는 이곳 벨베데레 갤러리의 자부심을 과시해 보려는 국가적 차원의 의도가 엿보이는 행사였다.

실레가 30년도 채 살지 못하고 마감한 28세의 미술가 인생 동안 남긴 회화 작품들 가운데 반 수 가량이 풍경화였음은 일반인들이 아직은 모르고 있는 사실이다. 오스트리아의 열렬한 에곤 실레 애호가 겸 컬렉터라는 점 때문에 국립 미술관의 관장이 된 루돌프 레오폴트 (Rudolf Leopold) 박사는 이 기회에 자신의 레오폴트 미술관 컬렉션이 보유하고 있는 실레의 풍경화들을 한 자리에 선보이는 것을 통해서 풍경화 화가로서의 에곤 실레를 재조명해 보는 전시를 직접 기획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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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곤 실레가 1913년에 그린 『크루마우의 풍경』 그림을 위한 준비 드로잉. 최근 나치에 의한 강제 압수된 유태인 가족 소유의 작품으로 판정받은 후 런던 소더비 경매장에서 고가에 낙찰되어 화재가 되었다. 이 작품 뒷면에는 색정에 몰입하고 있는 여인의 옆모습 그림이 스케치되어 있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는 레오폴트 관장이 실레 풍경화 연구 과정에서 풍경화 작품과 그림의 모델이 되었던 실존 장소를 일일이 찾아다니며 고증적으로 확인한 장면을 사진으로 기록해 둔 사진 자료들을 나란히 전시한다.

풍경화 연구를 위해서 장소 고증을 하는 일은 미술사가들과 전문가들이 필히 하는 연구 관례 가운데 하나이다. 특히 실레 풍경화 연구와 관련하여, 레오폴트 관장이 독자적으로 해 온 고증 연구 결과와 뉴욕에 있는 노이에 갤러리 (Neue Galerie New York)의 화랑 주인 겸 전문가인 제인 칼리어 (Jane Kallir)의 고증 연구 사이에서 빚어진 정당성 문제와 연구 결과 자료 도용 주장사건은 지금도 에곤 실레를 둘러싼 미술계 스캔들중에서도 뜨거운 화재 거리로 회자되고 있다.

실레 미술을 둘러싼 정치적 스캔들
미술계 스캔들을 거론할 때마다 미술 시장에 관심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빼놓지 않고 오가는 이야기 주제는 실레 작품들의 출처 문제이다. 일례로 가장 최근에 여론화된 소식으로 작년인 2003년 6월에 런던 소더비 경매장에서 실레의 작품으로 경매에 부쳐진 『크루마우의 풍경 (도시와 강 경치) (Krumauer Landschaft – Stadt und Fluss)』(1916년 작)이 소더비 경매 역사상 최고 가격인 영국화 천 2백 6십 7만 파운드 즉, 미화로 전환하면 2천 1백 십만 달러 (다시 우리돈으로 환산하면 2백 4십 2억 원)에 가까운 낙찰금에 팔려 나가서 화재를 뿌렸다.

『크루마우 풍경』은 음울하고 헐벗고 종종 노골적이고 거친 성애 장면을 묘사한 인물화를 즐겨 그렸던 실레의 여타 작품들과는 다르게 환하고 긍정적인 분위기가 엿보여서 유독 예외적인 작품이다. 실레가 자신의 모친의 고향이던 체코 보헤미아 지방의 크루마우 (Krumau)라는 한 작은 도시와 그 곁을 끼고 흐르는 몰다우 강 (Moldau)을 그린 서정풍 강한 유화 그림이다. 이 유화 그림의 창작 동기를 두고,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불행한 어린 성장 시절을 거쳤고 어린 소녀를 모델 삼아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 때문에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잦은 곤혹을 치뤘던 문제의 사나이 실레가 어미니의 고향 크루마우를 방문하여 그 경치를 화폭으로 옮기는 것을 통해서 정신적인 평온을 찾으려 했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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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모양으로 늘어선 집들』 또는 『섬 도시』라는 별명으로도 불리는 이 풍경화는 1915년에 그려졌다.

그런데 화재 거리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 그림이 유독 언론의 관심을 끈 이유는 이 그림이 나치에 의해서 압수되었다가 미술 시장으로 반환된 작품이었다는 점 때문이었다.

이 『크루마우 풍경』 그림은 현재가지 규명된 바에 따르면 실레와 절친한 친구 관계였던 유태인 출신의 빌헬름과 데이지 헬만 부부 (Wilhelm & Daisy Hellmann)가 화가로 부터 직접 구입한 작품이었는데, 1938년 나치군이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합방던 해에 강제 압수한 것이라고 한다. 나치 정권이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점령했던 1933-1948년 사이, 본 주인이 게스타포의 손에 갈취당한 이후 줄곧 오스트리아 린츠에 있는 노이에 갤러리의 소장품으로 1953년까지 보관되어 오다가 이 작품을 애타게 찾고 있던 헬만 부부의 눈에 띄었다.

헬만 부부는 나치로부터 압수된 미술품 반환을 위한 본격적인 법률 절차를 거쳐 승소한 후 이 작품을 반환받았고, 이후 헬만 부부의 후손들이 작년 소더비 경매에 부쳐 다시 미술시장에 내 놓게 된 것이다. 이 그림은 소더비 경매소가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분실 미술품 반환을 위한 연구소 및 법률담당부가 자체적인 분실 미술품 데이터베이스 구축과 법적인 반환 요구 노력 끝에 마침내 그림 도둑들로부터 되찾아 온 법적 케이스로도 유명하다.

누군가 미술 작품의 역사는 작품을 창조한 화가가 완성하기 까지의 역사와 그 작품이 여러 주인들의 손에서 손으로 거쳐가는 소유자의 역사 두 가지를 갖고 있게 마련이라고 말했다. 그러고 보면 미술 작품과 작품을 소유하는 주인 사이의 관계는 참으로 변화무쌍하기도 하지만 또 그에 못지 않게 끈질기기도 한 것 같다.

따지고 보면, 소더비가 독자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나치 시대 분실된 미술품 회복 운동은 경매에 부칠 명작들을 재발굴하여 경매로 부칠 수 있는 경제적 이득 기회를 재창조하는 셈이고, 또 한 편으로는 나치의 유태인 핍박 끝에 미술품을 강제로 빼앗기거나 손실한 유태인 후손들이 조상들을 대신해 한풀이도 하고 잃어버렸던 미술 명품을 되돌려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되어 주는 셈이다.

바로 그런 연유로 해서 특히나 오스트리아의 경우, 나치 시대 유태인들로 부터 강탈했던 미술품들 특히 그 중에서도 오늘날 기록적인 고매매가를 홋가하는 클림트와 실레의 작품들을 다수 소장하고 있어서 골칫거리를 앓고 있음도 사실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번 9월 16일부터 대중에게 공개될 『실레 풍경화』 전에는 출처 문제에 휘말릴 만한 출품작들은 없는 것으로 알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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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도시』 1911년 작. 실레는 어린 시절 일찌기 아버지를 여의고 늘 어머니에 대한 애정 부족을 느끼며 성장했다고 전해진다. 그같은 성장경험은 실레가 성과 죽음이라는 주제에 집착하게 된 원인이 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조바심에 올 80세를 맞는 노장의 레오폴트 관장은 자신의 실레 컬렉션은 거의 대부분 경매와 시장에서 구입한 것임을 강조해 마지 않는다. 하지만 그도 한창 실레 작품들을 쫏아 다니며 사모으는데 정신이 없던 전후 젊은 시절에 비하면 지금의 실레 컬렉션의 가격은 이루 다 셈할 수 없을 만큼 기하흡수적인 비례로 폭등했음을 기꺼이 시인한다.

실레 미술품 걸작인가 미술 시장의 투자 대상인가?
미술 시장에서 보나 대중적인 인기도 면에서 보나 실레가 그토록 화재를 몰고 다니는 화가인 만큼 그의 작품 가격은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고가에 매매되고 있다.

일례로, 올 여름 뉴욕에서 열렸던 소더비 경매에서 실레가 그린 1913년 한 점의 드로잉 작품 『연인들』이무려 미화 3백5십만 달러 그러니까 우리돈으로 하면 4십억에 낙찰되어 뉴욕 출신의 거부 마이클 스타인하트에게 팔여 나가서 「뉴욕 타임즈」 紙가 서둘러 보도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런가 하면 유명 경매소를 통해서 값비싸게 댓가를 치루고 구입한 실레 드로잉이 알고 보니 희미해져 버린 원작 실레 그림 위에 전문 위조꾼 화가에 의해 선명하게 덧칠이 된 후 본래 있지도 않았던 머릿글자를 따서 만든 ‚ES’ 라는 서명을 임의로 그려 넣은 일로 해서 그림 주인이 경매 회사를 대상으로 소송을 건 사건이 벌어지는 에피소드도 있었다.

게다가 실레의 유명세는 미술 컬렉터들의 투자 가치 아이템으로서도 효자 노릇을 톡톡이 한다. 마이클 스타인하트는 올 여름 소더비에서 거머쥔 4십억 짜리의 실레 드로잉 외에도 작년에 이미 14점의 드로잉을 화장품업계의 거물인 로널드 로더 (Ronald Lauder)로부터 우리돈 약 1백 4십6억 여원에 이르는 돈을 주고 구입을 했으며, 스타인하트에게 실레 드로잉들을 온통 팔아버린 로널드 로더는 다시 알려지지 않은 비밀의 액수에 달하는 돈을 주고 실레 전문 딜러인 세르게 사바르스키로부터 실레의 수채화 36점을 사들여 자신의 컬렉션을 보충했다.

게다가 이들 큰손 컬렉터들은 보다 많은 낙찰가로 작품을 처분하기 위해서 소더비와 크리스티 등 유수의 국제적인 미술품 경매소들을 오가면서 보다 비싼 가격으로 미술 작품을 매매할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하는데에도 놀라운 수완을 벌이곤 한다. 여전히 미술 경매장에서 최고 낙찰가로 경매업자들을 기쁘게 해 주는 분야는 20세기 초엽 미술과 인상주의 계열이다. 모딜리아니, 마티스, 반 고흐, 피카소와 더불어 실레 (그리고 동시대인 오스트리아인 화가인 클림트를 포함해서)는 의문의 여지없이 최고의 핫 아이템으로 그 인기는 식을줄 모른다.

실레가 오늘날 환생하여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고가로 치솟은 자신의 작품 가치를 본다면 뭐라 했을까? 28살 나이에 제1차 대전 직후 비엔나 시 전역에 나돌던 스페인 독감에 걸려 갑작스럽게 세상을 하직한 젊은 실레는 가난, 고통, 질병, 성적 갈등이 잔뜩 표현된 여인 그림들을 그려 팔아서 생계에 일부 보태기도 했지만, 동시에 사망하기 바로 직전 그는 남달리 뛰어난 재능과 개성이 서서히 비엔나 미술계에서 인정을 받기 시작하여 부와 명성의 궤도로의 진입을 막 앞두고 있던 참이었다.

소위 말하는 ‚성공한 예술가’로서 역사에 남기 위해서는 높은 수준의 작품을 꾸준하고 일관적으로 작업해야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의 성공을 직접 목격할 수 있을 만큼 장수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한 영국의 미술 평론가 앨런 보네스의 지적이 떠오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만일 실레가 좀 더 오래 살면서 작품 활동을 계속했더라면 오늘날 미술 경매소에서 오가는 가격 만큼은 안되더라도 훨씬 지위 높고 윤택한 예술인으로서의 여생을 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Egon Schiele: Versinkende Sonne, 1913, 89x90,5cm

에곤 실레의 『지는 해』 1913년 작. Courtesy: Leopold Collection, Wien.

풍경화는 내면적 감정 세계의 표출
 레오폴트 관장이 실레 그림을 수집하기 시작했던 25세의 나이에 처음으로 구입한 작품은 다름아닌 풍경화였다고 한다.

오스트리아가 제2차 대전 종전을 뒤로 한채 사회적 혼란과 경제 재건에 한창이던 1950년 여름, 당시 의과 대학생이던 레오폴트 관장은 실레의 친구였던 아르투르 뢰슬러 (Arthur Roessler)로 부터 풍경화 한 점을 맞닥드리게 되었다.

나이 많은 뢰슬러 씨는 지갑도 얇은 애송이 미술 수집가에게 ‘해가 지는 경치’를 담은 한 편의 풍경화를 보여 주었는데, 이것이 현재 레오폴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실레의 1913년 유화 작품 『지는 해 (Versinkende Sonne)』이다. 산과 숲을 배경으로 해질녘 저녁놀이 지는 모양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는 듯한 이 그림에서 보는이는 이루 설명하기 힘든 울적함을 느끼게 된다. 때는 이미 해가 산 뒤로 넘어가고 나서 어둠이 스며들기 시작해서 을씨년스러운 냉냉함까지 전달된다.

이 작품은 그로 부터 7 년 후에 뢰슬러 씨가 레오폴트 관장에서 선물을 한 계기로 레오폴트 소장 목록에 포함되었다. 그대신 그날 레오폴트 관장은 『죽은 도시 (Die tote Stadt)>(1910년 작)를 사서 집에 가져왔는데 이 그림도 이번 전시에서 다시 공개된다. 앞에서 언급된 소더비에서 경매된 화재의 작품 『크루마우의 풍경』을 그리기 직전에 그려 뒀던 습작 스케치 『크루마우』(1913년 작)에 대해서는 속속들이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레오폴트 관장은 실제로 이 그림에 나타난 집 번지수와 실제 크루마우 도시의 집 번지수를 일일이 비교판별해 낼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에곤 실레가 살았던 19-20세기 전환기는 절대 군주체제의 잔재랄 수 있는 집단적인 허식성과 새로 대두되기 시작한 근대적 개인주의가 전면 충돌한 긴장의 시기였다. 그래서 20세기로의 전환점에 선 비엔나에서는 근대주의라는 막을 수 없는 시대적 대세에 잠시나마 저항하기 위한 고전주의자들과 역사주의자들의 복고주의 몸부림이 일기도 했지만 역시 시대의 흐름은 개인주의라는 근대적 신사고로 흐르고 있었다.

그런 맥락에서 볼 때 실레의 미술 세계는 당시 비엔나의 대기에 가득하던 시대 정신 (Zeitgeist)의 반영이기도 하다. 같은 시기에 미술 창조의 원동력을 개인의 내면 세계로 눈을 돌려서 폭발적이고 격렬한 필치로 표현한 화가들은 실레 말고도 또 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직전 동요와 불안으로 가득한 사회상을 반영하기라 하듯 오스카 코코시카 (Oskar Kokoschka)는 마치 전기를 맞아 전율하는 듯해 보이는 형상으로 인물과 풍경을 묘사했다.

자기 자신의 통쾌하게 비웃는 유령처럼 묘사한 자화상으로 유명한 리햐르트 게르스틀 (Richard Gerstl)은 자기 내면과의 투쟁 끝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미술이 내면적 갈등에 대한 외면적 표출의 수단으로서 활용된 이 시대는 성과 무의식을 주축으로 한 프로이트의 심리분석학이 탄생하게 된 배경이기도 했다.

실레의 풍경화를 바라 보고 있노라면 여성화에서 다름없이 발견되는 강렬대담하면서도 극도로 신경질적인 필치가 여지없이 발견된다. 실레는 웬만해서는 자기가 그린 그림에 대한 복사판을 그리기를 꺼려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굳이 모사본을 그려야 했을 경우라도 일부러 변형을 여기저기 가해 그렸다.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는 그림을 그리는 바로 그 순간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출하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1960년대 런던에 있는 말보로 갤러리에서 영국에서는 최초로 열린 에곤 실레의 전시회를 본 한 일간지 기자의 말은 실레 미술이 지니는 역사적 중요성을 이렇게 표현했다. „마사치오와 모차르트의 경우 처럼 실레는 비록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미술사에 남긴 흔적은 충분했다“라고. 이번 『실레의 풍경화』 전은 [2003년] 9월17일부터 내년 초인 2004년 1월31일까지 계속된다. All images courtesy: Leopold Museum, Vienna.

*이 글은 2003년 10월호 『오뜨』 지 아트뉴스 컬럼에 실렸던 것을 다시 게재한 것입니다.

신건물과 함께 재탄생한 스테델릭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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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가 자랑하는 근현대 미술의 보고 암스텔담 스테델릭 미술관 네덜란드에 있는 50여 국시립 및 개인 미술관들을 통틀어서 네덜란드인들이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국가대표급 미술관은 두말 할 것 없이 수도 암스텔담에 자리하고 있는 스테델릭 미술관 (Stedelijk Museum of Art) 일테다. 스키폴 국제공항에서 내려서 암스텔담 시내로 향하는 기차로 갈아타고 가다 암스텔담 시 중앙역 (Centraal Station)에서 하차하는 방문객들이 처음 발을 딛게 되는 중앙역 역사 동쪽으로 19세기 네덜란드 新르네상스풍 고건물이 서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바로 이곳이 스테델릭 미술관이다.

1A. Stedelijk Museum view of the original building (A.W. Weissman, 1895) and new building designed by Benthem Crouwel Architects. Photo John Lewis Marshall._original_sm

왼쪽 원 스테델릭 박물관 건물 (A.W. Weissman 설계, 1895년)과 오른쪽의 새 건물 (Benthem Crouwel Architects 설계) 광경. Photo: John Lewis Marshall.

우리말로 옮기면 ‘시립 미술관’을 의미한다는 스테델릭 미술관은 일명 ‘무지움플렝 (Museumplein)’으로 불리는 암스텔담의 뮤지움 아일랜드 (Museum Island) 단지 내에 자리하고 있는데, 또다른 암스텔담의 명물 미술관 두곳인 19세기 고딕부활풍 건축물 반 고흐 미술관 (Van Gogh Museum)과 라익스 무제움 (Rijksmuseum)도 그로부터 멀지 않은 도보 5분 거리에 옹기종기 이웃하고 있다.

네덜란드는 암스텔담의 스테델릭 미술관을 비롯해서 무려 1000곳에 이르는 박물관과 미술관들이 도처에 산재해 있어서 전세계에서 가장 높은 박물관/미술관 밀집도를 자랑할  뿐만 아니라 그에 못지 않게 유수한 미술사적 거장들을 배출해 왔다. 17세기 북유럽 바로크 양식의 거장 화가 루벤스 (Peter Paul Rubens), 렘브란트 (Rembrandt)와 베르메르 (Jan Vermeer), 19세기부터 20세기 표현주의 회화를 개척한 천재화가  반 고흐 (Vincent Van Gogh), 20세기 모더니즘 기학학적 추상주의 화가 몬드리안 (Piet Mondrian), 전후 1940-50년대 미국 추상표현주의의 기수 윌렘 드 쿠닝 (Willem de Kooning), 현대 스타 건축가 렘 코올하스 (Rem Koolhaas) – 서양 미술사의 발달에 끼친 네덜란드의 예술적 창의력과 영향력은 누가 뭐라해도 강력하고 결정적인 힘을 발휘해 왔다.

특히 20세기 모더니즘의 발흥 이후부터 매우 독특하고 창조적인 시각 위력을 과시했던 네덜란드의 그래픽 아트와 디자인 전통, 그리고 뒤이어서 20세기 말엽부터 현재까지 독창력과 혁신성 면에서 전세계적인 이목을 한 몸에 집중받고 있는 현대 네덜란드 건축계와 디자인계는 지금도 지칠 줄 모르고 과거의 미적 전통을 현대적으로 계승하는데 한창이다.

시정부 위원회의 주도로제1회 베니스 비엔날레가 창설되던 해인 1895년에  설립되었으니 당시로 보면 스테델릭 미술관은 유럽에서 생긴 가장 오래된 근대 미술관들 중의 하나였다. 올해로 창립 110주년을 맞는 이 미술관이 가장 애지중지하는 보배급 컬렉션으로는 20세기 서양 근현대 미술품들이 주를 이룬다.

지금도 스테델릭 미술관 창고에는 샤갈, 말레비치와 20세기초 아방가르드 모더니즘, 코브라 (CoBrA) 1960년대 이후부터 현재까지의 서양 현대 미술을 망라하며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의 서양 미술의 흐름을 고스란히 재확인해 볼 수 있는 방대한 수의 회화와 조각 작품들이 보관되어 있는데, 최근 1년전에 이 미술관 운영 상태 진단을 위해서 암스텔담 시청에서 실시한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총 100,000 점에 이르는 총 소장품 중에서 6만 점에 가까운 작품들이 아직도 한 번도 전시된 적 없이 먼 훗날 전시장 벽에 걸릴 그 날을 기다리며 창고 그늘에서 대기중인 것으로 보도되었다.

2. Stedelijk Museum facade as seen from the Van Gogh Museum. Photo John Lewis Marshall._original_sm

반 고흐 미술관에서 바라본 스테델릭 박물관의 모습. Photo: John Lewis Marshall.

 

 

 

과거의 부진을 딛고 규모로 보나 소장품의 우수성으로 보나뉴욕의 MoMA 근대미술관 (Museum of Modern Art), 영국의 테이트 (Tate London), 그리고 파리의 퐁피두 (Centre Pompidou)에 뒤이어서 전후 20세기 서양 미술 분야에 관한 한 구미권 미술관들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치도 높은  소장품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찌기 세계 일류급 근현대 미술관으로 평가 받았아야 마땅했을 이 스테델릭 미술관이 그동안 미술계와 대중 미술 관객들로 부터 상대적으로 주목 받지 못했던 것은 왜일까?

인사이더들의 평가에 따르면, 도시 정부의 예산과 인사진으로 운영되는 시립 문화 기관이라는 점에서 예산과 재정 면에서는 대체로 안정적이었던 반해서 특히 1980년대부터 누적되어 온 지진부진한 조직관리 부실과 체계없는 컬렉션 관리가 그 이유의 주원인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1994년부터 이 미술관의 관장을 지냈던 전설적인 관장 겸 큐레이터 루디 푹스 (Rudi Fuchs)가 미술품 과잉 구매 끝에 빚은 세금 스캔들을 끝으로 2003년말 10년 동안 몸 담았던 스테델릭을 떠난 사건은 그런 대표적인 예다.

불명예와 수치를 참다 못한 암스텔담 시정부 위원회는 2004년, 지리멸렬 상태에 빠진  스테델릭의 부활을 선언했다. 그에 대한 첫 단계로 시정부 예술위원회는 이 미술관을 시립 행정에서 독립시켜 미술관 자립 재단과 경영진의 운영으로 점진적으로 대체해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미술관은 스테델릭 큐레이터 출신인 가이스 반 타일 (Gijs van Tuyl, 1941년 생)이 작년 8월에 새 관장으로 부임하고, 예산액 무려 8천3백만 유로화 즉, 우리돈으로 환산하면 약 1조1백억원을 미술관 건물 개축 및 확장 공사에 투여하게 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문화 기관 조직의 부활을 이유로 정부 관료제로의 품에서 떼어내어 사기업 후원자의 품으로 내던져진 스테델릭 미술관의 미래를 긍정적으로 바라볼 것인가 말것인가는 문제는 당분한 차치한 채, 정체의 늪에서 허덕이던 이 미술관은 최근 전에 없이 새로운 전시 공간과 문화 여가 공간 확장 계획과 흥미진진한 특별 전시회들로 미술 애호가들과 대중 관객들의 문화 더듬이를 자극하는 일을 그치지 않고 있다.

스테델릭의 강점 – 탁월한 기획력 과거 미술관 설립 당시 근대가 막 동이 틀 무렵인 19세기말-20세기초, 유럽의 세기 전환기가 대체로 그랬듯이 스테델릭 미술관은 당시 막 예술에 눈을 뜨기 시작한 암스텔담의 부유층 인사들과 중산층 부르조아 시민들이 목말라 하던 문화적 욕구를 달래주는 문화 제도 기관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고 루디 푹스 前 관장은 지적한 바 있다.

12. Karel Appel, Mural (1956), in the former restaurant space, Stedelijk Museum. Photo John Lewis Marshall_original_sm

코브라 운동의 핵심 멤버이던 카렐 아펠 (Karel Appel)의 벽화 (Mural) 1956년, 이 전시 공간은 과거 이 박물관 레스토랑 공간을 전시 공간으로 개조한 것이다. Photo John Lewis Marshall.

하지만 미술 향유 활동이 전에 없이 다양해지고 널리 대중화된 요즘에 들어서, 스테델릭은 기존의 풍부한 소장품을 재정리해 전시하는 소장품 중심의 전시 외에도 특별 기획 전시에 높은 열의를 보이고 있다.

일견에서는 스테델릭이 미술관으로서의 본분을  팽개치고 특별 전시장 (Kunsthalle)으로 전락하고 있다며 비난하고 있지만, 지적 자극을 갈구하는 미술 관객들에게 호소하는 수준 높고 흥미진진한 스테델릭 미술관의 전시물 기획력은 기꺼이 인정할 만하다.

스테델릭 미술관 CS 임시 미술관이 불어 넣는 활기 스테델릭은 20세기를 넘어서 21세기를 위한 미술관으로 전환하고 있다. 파울루스 포터스트라아트 (Paulus Potterstraat)거리에 위치한 스테델릭 미술관 본건물이 재건 및 확장 공사 때문에 2004년 1월부터 문을 닫고 나서 미술관 전시장은 암스텔담 중앙 우체국 건물 (Post CS Builing)으로 옮겨와 스테델릭 미술관 CS라는 새이름을 달고  5월부터 임시 재개관했다.

암스텔담 중앙 기차역 (Centraal Station)의 첫 머리자C와 S를 따서 스테델릭 미술관 CS라는 임시 명칭으로 임시 개관한 스테델릭은 네덜란드 우체국인 옛 포스트 그룹 (The Post Group) 사가 입주해 있던 고층 건물 2층과 3층에 걸친 6천여 평방 미터 면적의 공간을 활용하고 있다. 츠바르츠 & 얀즈마 (Zwarts & Jansma) 건축사무소가 이 과거 우편물 보급소 공간을 미술관 전시 공간 및 부대 시설로 재설계하고 뷰로 엑스페리멘털 젯셋 (Bureau Experimental Jetset)이 대담하고 현대적인 감각으로 그래픽 디자인을 책임졌다.

작년 봄에 열였던 모더니즘 고전 가구디자인展  『크레이머 대 리트벨트 (Kramer vs Rietveld)』 전시에 이어서 네덜란드에서 활동하는 유망주 현대 미술가 8인의 미술세계를 총정리한 『완벽  시력 (20/20 Vision)』, 그리고 가장 최근에는 글로벌 시대 유럽 대중을 사로잡고 있는 갖가지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대중영합주의를 지적하여 현대 미술 작품들을 통해 논평해 보는 실험적인 전시회 『포퓰리즘 (Populism)』이 8월28일까지 계속되고 있다.

현재 재공사중에 있는 스테델릭 본건물은 파울루스 포터스트라이트 거리 (Paulus Potterstraat) 街상에 있으며 2008년에 재개관을 앞두고 있다. 스테델릭 미술관 CS 임시 전시장은 오오스터독스카데 (Oosterdoskskade) 街에 위치해 있으며,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단, 목요일은 오전 10시부터 밤 9시까지)까지 입장관람이 가능하다. 입장료: 성인 8유로, 7세이하 어린이 4유로. 보다 자세한 미술관 정보는  박물관 웹사이트 참고.

* 이 글은 본래 『공간사랑』 지 2005년 6월호에 실렸던 글을 다시 게재하는 것임을 밝혀둡니다.

 

스페인 21세기 현대 건축 순례

DESIGN NATION | NEW ARCHITECTURE IN SPAIN

현대 건축 | 스페인편(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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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CHO-MADRIDEJOS ARCHITECTURE OFFICE에서 설계한 시우다드 레알 알마데네호스의 발레아세론 예배당. 2000년 완공 Photograph courtesy of Roland Halbe.

현대 건축 – 왜 스페인인가? 언제부터인가 건축에 관심있는 전세계의 건축가들과 건축 개발 기획자들은 가장 앞선 건축의 현주소를 경험하기 위해서 스페인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일반인들에게는 그다지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건축업계 인사들 사이에서는 20세기말여부터 가장 최근까지 국제 건축계에서 널리 화재가 된 건축적 성공 사례들의 다수가 스페인에서 전개되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스페인의 건축 개가가 언론 매치를 통해서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때는 1990년에 접어들어서였지만 그를 위한 기초는 그보다 이전인 1980년대부터 시작되었다고 해야 옳다. 유럽 북쪽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이 종전을 맞고 난 1940년대 중엽부터 이후 35년 동안 프란시스코 프랑코 (Francisco Franco)의 민족주의 군부 독재 정권 하에서 허덕이던 스페인은 드디어 1975년이 되어서야 프랑코의 사망 후 후안 카를로스 스페인 왕의 자유주의 노선 정책으로 전환하고서 부터야 비로소 유럽과 국제 사회의 정당한 일원이 되었다.

프랑코 시절의 억압적이고 암울한 고립에서 벗어난 스페인은 1986년에 유럽 연합 회원국으로 가입하고 향후 이웃 유럽 회원국들이 20년에 걸쳐 지원해 준 1천여 억원이라는 거액의 공공 자금 후원금을 받아서 본격적인 신국가 건설 및 스페인의 문화적 정체성 구축 프로젝트로 속속 활용하기 시작했다.

문화 차별화의 전략으로서의 건축 건축 및 시각 예술을 비롯한 공간 미학만큼 유럽인들이 그들의 문화적 정체성을 판가름짓는 차별 요소로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또 있을까. 스페인이 21세기에 들어선 오늘날 현대 건축의 강국으로 각광받게 된 것은 그다지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이미 중세시대에는 아랍 건축의 절정을 이룩했다고 일컬어 지는 암할브라 궁전 (8-10세기)이 스페인 남부 그라나다에서 지금도 그 절묘한 자태를 뽐내고 있으며,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성당 (11-12세기)은 중세 로마네스크 형식의 대표적인 교회 건축물의 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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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발로스 & 헤레로스 건축사무소 (스페인)가 설계한 비토리아-가스테이즈 시의 바이오클리매틱 타워. 완공 예정년도 2006년. Photo © José Hevia.

이어서 르네상스 후기에 엘 그레코의 기괴한 매너리즘풍 미술 전통과 뛰다라 17-18세기에 걸치는 동안 스페인은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 행해졌던 것과는 또 색다른 환상주의적 요소가 담긴 바로크 건축 세계를 이룩했다. 환상적인 상상력의 바르셀로나 출신의 근대 건축의 대가 안토니 가우디 (Antoni Gaudí)와 현대 스타 건축가 산티아고 칼라트라바 (Santiago Calatrava)도 바로 스페인 출신이다.

그 후로 스페인 출신의 건축가들은 스페인 특유의 지형적 감성과 겸손함과 진지함을 주축으로 한 국민적 특성이 잘 어우러진 독특하고도 깊이있는 건축 세계를 창출해 왔다. 1980년대 중엽 이후로 1990년대에 걸쳐 지속된 전세계적인 경제 호황과 미술관 건축붐과 덩달아서 스페인에도 전에 없이 많은 국제적 건축가들이 모여들어 신건축붐 각축에 동참했다.

지난 20여년 동안 신건축물들은 스페인 여러 대도시들의 풍경을 변화시켰다. 그리고 변화된 건축으로 인한 풍경에 못지 않게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변화도 급격하게 변화해서 스페인의 대도시들은 관광, 교통, 도시 인프라 그리고 문화 생활 전반에 이르는 다양한 분야에서 전에 없는 호황과 번성을 맞기도 했다. 스페인은 이제 민주주의 정부에 의한 정치적인 재정립과 함께 지속적으로 활성화된 경제와 시민들의 문화 환경에 있어서도 국제성, 다양성, 활력을 특징으로 한 전과는 다른 새로운 자기 정체성을 부여받았다.

스페인이 추진해 온 건축 개발 사업은 이 나라가 1960년대 이후부터 줄곧 주요 국가 산업으로 지탱해 온 관광 산업에 대한 지속적인 지원을 반영해 주는 거울이기도 하다. 새로운 박물관 및 미술관, 공연장, 회담 및 회의 센터, 운동 경기장 등과 같은 문화 시설 건설 활동은 관광 산업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스페인을 중요한 현대적 신건축 건설의 실험장으로 전환시키게 해주는 촉진제가 되어 주었다.

그같은 가장 대표적인 예는 1992년에 동시에 열린 세비야 세계박람회와 제25회 바르셀로나 올림픽 경기였다. 이후 1997년에 미국의 건축가 프랭크 게리 (Frank Gehry)가 디자인 구겐하임 빌바오 (Guggenheim Bilbao) 미술관이 개관되어 실업과 절망으로 무기력에 허덕이고 있던 바스크 지방의 옛 철강 및 조선업 항구도시 빌바오는 문화의 순례지로 단숨에 거듭났다.

또 그런가 하면 스페인 정부는 젊은 유망 건축가들의 발굴 육성책의 일환으로 40대 이하의 건축가들을 위한 건축 프로젝트 공모전을 개최해 오고 있는데, 예컨대 푸엔산타 니에토 (Fuensanta Nieto) & 엔리케 소베하노 (Enrique Sobejano)  건축사 설계로 2002년 세비야에서 완공된 SE-30 공공주택 프로젝트와  에두아르도 아로요 (Eduardo Arroyo) 설계로 2003년 빌바오 시 외곽에 완공된 축구경기장이 그런 예들이다.

스페인의 블랑카 예오 에스투디오 데 아르키텍투라와 네덜란드의 3인조 건축사무소 MVRDV가 공동 설계한 거주용 아파트 아데피시오 미라도르는 마드리드에 있다.

대중의 주거를 위한 공간 – 주택, 호텔, 관광 시설 스페인에서 숫적으로 가장 많이 건설되어 온 건축물들은 단연 주거용 주택과 숙박 관광객 수용을 위한 호텔이었다. 현재 빅토리아-가스테이즈 (Victoria-Gasteiz) 시에 준공중에 있는 4개짜리 바이오클리매틱 타워 (Bioclimatic Tower, 스페인의 아냐키 아발로스 (Inaki Abalos), 후안 헤레로스 (Juan Herreros), 레나타 센트키비츠 (Renata Sentkiewicz) 공동설계)는 태양열을 이용한 냉난방과 통풍 시설을 완비한 친환경 건축물이다.

2007년에 완공을 앞둔채 바르셀로나의 디자인 호텔로 탄생될 호텔 하비탓 (Hotel Habitat)은 에리크 루이즈-젤리 (Enric Ruiz-Geli), 클라우드 나인 아콘치 스튜디오 (Cloud 9 Acconci Studio), 루이 오타케 (Ruy Ohtake) 등 국제 건축 디자인팀들이 동원된 국제적 건축 프로젝트로서 현란한 조명 디자인 효과에 못지 않은 화재를 모으고 있다.

바스크 지방의 전통적이고 풍부한 와인 및 음식 문화를 극적으로 대조적 현대적인 분위기에서 음미할 수 있는 바르셀로나의 호텔 앳 마르케스 데 리스칼 와이너리 (Hotel at Marqués de Riscal Winery)는 프랭크 게리의 최첨단식 티타늄 건물 외장을 갖춘채 올가을에 개장을 앞두고 있다.

마드리드에서 2005년에 완공을 본 에디피시오 미라도르 (Edificio Mirador)는 스페인의 블랑카 예오 에스투디오 데 아르키텍투라 (Blanca Lleo Estudio de Arquitectura)와 네덜란드의 3인조 건축팀인 MVRDV가 공동으로 설계했다. 이 건물은 건물 하반부를 공공 시민용 야외 전망대로 상반부는 거주용 아파트로 설계하여 사적 주거 공간과 공공 대중 공간을 한 건축물 속에 잘 융합시킨 사례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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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쳐드 로저스 건축사무소와 에스투디오 라멜라의 협력으로 설계된 마드리드 바라하스 국제공항 터미널 내부. Copyright © 2013 Rogers Stirk Harbour + Partners LLP.

주택용 건축을 공동체적 공간으로 탄생시킨 또다른 좋은 예로는 중저급 시민들을 위해 개발한 셰어링 타워 (Sharing Tower)를 들 수 있을 것이다. 2007년 완공을 앞두고 있는 발렌시아의 셰어링 타워는 15인의 건축가들이 각각 한 건물씩 도맡아 총 15개 아파트 건물로 지어지게 될 아파트 단지로서 주민들이 텔레비젼, 세탁소, 컴퓨터 등을 사용할 수 있는 공유 공간이 주요 생활 공간으로 전환시켰다. 엘리베이터는 건물 외벽에 설치하고 취침, 수세, 탈의 등을 위한 사적 공간은 아파트 주변 공간 구석구석에 배치해 넣은 건축 컨셉은 능히 미래주의적이라할 만하다.

움직이는 도시인을 위한 건축 – 도시 설계 건축 스페인이 도로 대정비와 교통 노선 인프라 구축 사업을 대대적으로 착수하기 시작한 때는 유럽 연합이 이 나라의 재건을 위해 예산금을 보조해 주기 시작한 1986년부터였다. 특히나 해외 관광객 유치와 국제 교통 활성화를 위해서 국제 공항은 지난 6년 동안의 공사 끝에 올초에 리쳐드 로저스 파트너십 (Richard Rogers Partnership)과 에스투디오 라멜라 (Estudio Lamela)가 공동으로 설계한 마드리드 바라하스 국제 공항 터미널 제4관이 개통되어 하루에 4천만명의 탑승객들이 오가는 남유럽의 교통 요충지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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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리케 미랄레스와 베네데타 탈랴부에가 설계한 바르셀로나의 산타 카테리나 재래시장, 2005년에 완공되었다. Photograph courtesy of Roland Halbe.

또 건축은 도시 토목 설계상의 풍광 변화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2004년에 테루엘 (Teruel)에 완공된 파세오 델 오발로 (Paseo del Ovalo) 도보 통로 (영국의 데이빗 치퍼필츠 아키텍츠 (David Chipperfield Architects)와 스페인의 b720 아르키텍토스 공동 설계)는 마드리드를 감싸고 있는 옛 성터벽 위에 산책거리 공간을 개통하여 도시 보행자들이 아름다운 도시 경관을 내려다 보며 시내 안팎을 오갈 수 있도록 한 획기적인 명소로 떠올랐다.

카스타냐, 카탈로냐, 바스크 등 서로의 지방적 문화적 언어적 정체성이 뚜렷하게 구분되어 있는 스페인에서는 최근들어 그 지방 마다의 독특한 문화성을 반영된 신건축 트렌드가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예컨대 주택, 사회 복지, 의료, 스포츠 오락 등과 같은 공공 기관의 덩치를 최소화하고 비중앙화하는 전통을 변함없이 고수해 오고 있는 카탈로냐 지방 답게 그 대표 도시인 바르셀로나에서는 중앙집권화된 병원이나 복지 시설 대신에 41개 소지역으로 세분화된 구별마다 보건 및 복지 센터를 지어 운영하고 있다.

마리오 코레아 (Mario Corea)와 루이스 모란 (Lluis Moran) 설계의 보건 센터 (2003년 완공)이나 산타 카테리나 재래 시장 (Santa Caterina Market, 베네데타 탈랴부에 (Benedetta Tagliabue)와 엔리크 미랄레스 (Enric Miralles) 공동설계로 2005년 완공)은 카탈로냐 특유의 무지개풍 색채 감각과 문화의식을 반영한 물결치는 타일 지붕이 도시의 광장 공중에 웅장하게 드리워져 있다. 그런가 하면, 테네리파에 올 겨울 완공을 앞두고 있는 운동경기장은 스페인 남부의 돌과 도기공예품을 연상시키는 투박한듯 하면서도 자연친화적인 미를 표현한 것이 엿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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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텔리에 쟝 누벨 건축사무소와 알베르토 메뎀 건축사무소가 협동 설계한 마드리드 레이나 소피아 국립박물관 확장관. 2005년 완공. © Roland Halbe.

문화 인프라와 미술관 건축 지난 2005년 연말, 스페인의 수도이자 역사 도시에서 이 나라가 제일 큰 문화적 자랑거리로 여기는 프라도 박물관/레이나 소피아 국립미술센터/티센-보르네미자 박물관 등 마드리드 3대 박물관들이 약 8천여억 달러의 정부 문화부 예산의 지원으로 건물 새단장과 확장을 하고 재개관했다는 보도가 전해져서 전세계 건축계 인사들과 문화 애호가들의 주목을 받을 적이 있다.

국가의 얼굴과도 같다고 할 만큼 한 나라의 문화적 외양과 내면을 동시에 과시하는 국가적 차원의 박물관 건축 사업인 만큼 이번 ‘마드리드 뮤지엄 마일 (Madrid’s Museum Mile)’ 프로젝트는 프랑스의 쟝 누벨 (Jean Nouvel), 스페인의 라페엘 모네오 (Rafael Moneo)와 알베르토 메뎀 (Alberto Medem) 등과 같은 초호화급 국제 건축가들에게 설계를 의뢰해 완성되었다.

특히 18세기에 지어진 옛 병원 건축물에 알루미늄 및 아연을 이용한 세련된 초현대적 건축 요소를 융화시켜 명실공히 세계 최대 규모의 근현대 박물관으로 재탄생한 레이나 소피아 국립 미술관은 신구의 조화가 기대되는 건축 프로젝트가 되어 짜임새 있는 소장품과 최신식 건축적 자태를 한껏 뽐내고 있다.

스페인의 여러 지중해권 문화와 상업의 접점 도시인 발렌시아에서 건설중에 있는 발렌시아 근대미술관 IVAM (Institut Valencia d’Art Modern) 확장 프로젝트는 일본의 가주요 세이지마와 류에 니시자와 (Kazuyo Seijima + Ryue Nishizawa)가 설계를 담당했다. 백색 강철 스크림 소재의 헐렁한 조개 모양의 지붕을 기존 미술관 건물에 덧씌워서 새로운 전시 공간과 사무 및 카페 공간을 창출한 것이 특징적이다.

카트타제나의 국립 해상고고학 박물관 (기예르모 바즈케즈 콘수에그라 (Guillermo Vazquez Consuegra) 설계, 2007년 완공 예정)등을 비롯한 박물관 및 미술관 건축 이외에도 스페인의 민족적 전통을 재활성화시키기 위한 방책으로서 카디즈 시 (Cadiz)에는 라 시우다드 델 플라멩코 (La Ciudad del Flamenco) 플라멩코 댄스 센터 (스위스 건축가팀인 쟈크 헤르초그와 피에르 드 뮈론 (Jacques Herzog + Pierre de Meuron) 설계, 2008년 완공 예정)와 산탄더 (Santander) 시에 칸타브리아 지방 역사 박물관 (Museum of Cantabria (에밀리오 투뇽 (Emilio Tunon)과 루이즈 M. 만시야우 (Luis M. Mansilla0) 공동설계, 2009년 완공 예정)이 차례로 개관을 앞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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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건축가 위르겐 마이어 (Jürgen Mayer H. Architects)가 설계한 세비야의 메트로폴 파라솔 
(Metropol Parasol)은 나무를 소재로 한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 구조물이다. 완공 예정일: 2007년 경.

스페인 건축계의 지형을 변화시킨 건축가들로는 유럽의 위르겐 마이어 (Jürgen Mayer), 일본의 도요 이토 (Toyo Ito), 미국의 프랭크 게리 파트너스 (Frank Gehry & Partners) 등에서 해외 수입해 온 기라성 같은 현대 건축계의 수퍼스타들도 있지만 역시 그들의 대다수는 거장들과 젊은 세대를 포함한 스페인 출신들이 차지하고 있다.

이제 프랑시스코 레이바 이보라와 마르타 가르시아 같이 이제 갓 30대를 넘긴 신세대 건축가들의 건축에는 20세기 후반 스페인에 그늘처럼 드리웠던 정치적 억압과 암울함은 눈에 띄지 않는다. 그 대신 그들은 노장 거장 건축가 알바로 시자의 전통적인 미학과 최첨단 초스타 건축가 자하 하디드풍의 미래주의적 감수성을 결합하여 그동안 고립되어 있던 스페인의 공간 문화를 현대적인 건축 공간으로 전환하는데 주력한다.

스페인에서 지칠줄 모르고 계속되고 있는 현대 건축붐은 앞으로 얼마나 더 승승장구할 것인가? 문화가 국가적 정체성 확립과 경제적 기회 창출의 핵심 추진력으로 인정받고 있는 시대가 계속되는 한 국제급 스타 건축가들과 스페인의 자생적 건축인들이 벌이는 창조적 폭발도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기대된다.

올 [2006년] 2월부터 뉴욕 근대미술관 (Museum of Modern Art)에서 전시중인 『스페인의 신 건축 (On-Site: New Architecture in Spain)』(2월12일-5월1일) 전은 지난 20여년 동안 스페인에서 폭발적으로 전개된 현대 건축의 현주소를 53편의 건축 프로젝트들을 통해서 점검하는 기회를 마련한다. Photos courtesy: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 이 글은 본래 『공간사랑』 2006년 6월호 “DesignNation” 연재 컬럼에 실렸던 글을 다시 게재하는 것입니다.

21세기의 눈으로 다시 본 독일 표현주의

THE SOUND AND FORM OF SOUL – GERMAN EXPRESSIONISM REVIS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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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른스트 루드비히 키르히너 (Ernst Ludwig Kirchner, 1880-1938)가 그린 『베를린 거리 풍경 (Berliner Strassenszene)』, 캔버스에 유채, 47 7/8 x 35 7/8 in. (121.6 x 91.1 cm.) 1913-1914년경 작. 2006년 11월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로널드 로더에게 38,096,000 달러에 낙찰되었다.

감성과 영혼의 미술 표현주의 회화 (Deutsche Expressionismus)를 향한 새로운 주목  독일을 위시로 한 나치주의 정권의 반인륜적 행위와 제2차 세계 대전의 패배라는 오명 때문에 특히 20세기 근대기 독일 미술은 여간해서 미술사학자들이나 컬렉터들이 기피해 온 분야로 남아 있었다. 특히 19세기 말엽부터 20세기 초 제1차 세계 대전 전후로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 독일어권 유럽에서 불거져 나온 표현주의 미술은 거칠고 표현이 단도직입적이라는 이유로 해서 오랜 세월 동안 주류 화단에서는 한낱 주변적인 미술 운동 정도로 여겨져 온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지금도 영국의 테이트 미술관에는 독일의 표현주의 선구적인 화가로 꼽히는 에른스트 루드비히 키르히너 (Ernst Ludwig Kirchner)의 작품 한 점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 전부이며, 천재 오스트리아 표현주의 화가인 에곤 실레 (Egon Schiele)의 미술 세계는 각각 1960년대와 1980년대에 와서야 비로서 영국과 미국의 미술관에서 처음 소개되었을 정도로 심한 외면을 받았다.

최근 구미권 유명 미술 경매장 매출 보고와 미술 박람회에서 들려 오는 미술 시장 소식에 따르면 세계적 미술관들과 미술 컬렉터들은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표현주의 회화에 대하여 전에 없이 새로운 관심을 보이고 있다. 특히 미국에서 독일과 오스트리아 표현주의 미술을 향한 관심이 커졌다.

바로 지난 11월 8일 뉴욕에서 열린 인상주의 및 모더니즘 미술품 경매에서 키르히너가 그린 『베를린 거리 풍경 (Berliner Strassenszene)』 11점 연작 중 한 작품은 본래 1천8백-2천5백만 달러의 가격으로 낙찰될 것이라는 전망을 뒤엎고 그의 두 배에 가까운 가격인 3천8백만 달러  즉, 우리돈으로 환산하면 약 3백6십억원이라는 어마어마한 가격에 낙찰되어 화장품 업계의 거물 인사 겸 유명 미술 컬렉터인 로널드 로더가 소유한 뉴욕의 노이에 갤러리 (Neue Galerie)에로 넘겨졌다. 그런가 하면 미술 시장에서 계속되고 있는 실레의 인기는 경매장에서도 이어져서 그의 『단독 주택들 (Single Houses)』은 2천2백4십만 달러(2십1억2천 여만원)에 낙찰되었다.

Karl Schmidt-Rottluff_Herbstlandschaft in Oldenburg_1907_c Museo Thyssen Bornemisza_sm

카를 슈미트-로틀루프 (Karl Schmidt-Rottluff)의  『올덴부르크의 가을 풍경 (Herbstlandschaft in Oldenburg)』 1907년 작 © Museo Thyssen-Bornemisza 슈미트-로틀루프는 베를린에 다리파 미술관 설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독일 및 오스트리아 표현주의 미술에 대한 구미권 미술계의 집중 현상은 최근 연거푸 국제 법정의 주요 기사거리로 오르내리는 나치 약탈 미술품에 대한 반환 소송건 소식이 큰 자극제 역할을 하는게 사실이다. 특히 미술사에는 기록이 되어 있으나 시장성 면에서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던 일부 20세기 화가들의 작품의 경우 국제 법정에서의 반환 소송건은 작품가격을 몇 배로 높일 수 있게 해 주는 최적의 홍보 역할을 한다.

예컨대 올 11월 뉴욕 크리스티스 경매에서 키르히너의 『베를린 거리 풍경』은 최근 나치로부터 압수되었다가 반환된 유태인 소유의 미술 작품에 대한 법정 소송 사건으로 더더욱 유명해진 클림트의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이 작품은 이번 뉴욕 경매에서 8천7백9십만 달러 (우리돈 8백3십2억 여원)에 낙찰되었다.]과 더불어서 나치군에 의해 강제 압수되었던 것을 되찾은 한 유태인 후손이 경매에 내놓은 작품이어서 더 화재가 되었다.

이미 독일 표현주의 그림을 소장하고 있는 미술관이나 개인들에게는 분명 좋은 소식이다. 그같은 추세에 덩달아서 독일 및 오스트리아 표현주의 미술품에 대한 인기는 당분간 더 상승세를 구가할 것으로 전망된다.

미술계의 그 같은 대세를 반영하듯 지난 [2006년] 9월28일부터 오스트리아 빈에서는 『독일의 표현주의자들 (Deutsche Expressioninsten)』이라는 전시로 관객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 전시를 기획 전시중인 레오폴트 미술관 (Leopold Museum)은 뉴욕 노이에 갤러리와 더불어서 에곤 실레의 작품을 세계에서 가장 방대하게 소장하고 있는 곳으로서, 이번 전시를 통해서 스페인 마드리드에 있는 티센-보르네미자 미술관 (Thyssen-Bornemisza Collection)이 대거 소장하고 있는 독일의 표현주의 회화 작품들과 나란히 선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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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헤켈 (Erich Heckel)의 『단가스트의 집 (Haus in Dangast)』 1908년 작 © Carmen Thyssen-Bornemisza Collection on loan at the Museo Thyssen-Bornemisza.

프랑스에 인상주의가 있다면 독일에는 표현주의가 있다. 때는 근대기 서양 미술이 새로운 창조적 폭발을 거듭하고 있던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엽, 새롭게 부각되기 시작한 근대적 신사고와 지성적 합리주의를 여러 미술 운동의 철학적인 기초로 삼았던 파리에서와는 반대로 독일을 비롯한 북유럽의 화가들은 감정과 영혼에 호소하는 표현적인 미술이 전격적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때는 에곤 실레가 뒤틀린 사지와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듯한 인물 초상화와 누드화를 그려서 포르노 화가로 몰려 감옥 신세를 졌던 때이며, 저멀리 북부 스칸디나비아의 노르웨이에서는 에드바르크 뭉크 (Edvard Munch)라는 청년이 급변하는 19-20세기 전환기 근대인들의 불안과 공포를 『절규』라는 충격적인 그림으로 표현했던 때이기도 했다.

흔히 서양 미술사에서는 세잔느의 정물화가 입체주의의 시초라고 보듯, 19세기 말엽 빈센트 반 고흐가 그린 소용돌이치듯 강렬하고 격렬한 필치의 그림을 독일 표현주의의 선구적인 양식이라고 추적한다. 비슷한 시기 프랑스에서는 색채의 마술사 마티스가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의 거칠음을 뜻한 야수파 (Les fauves)라는 사조를 이끌며 강렬한 색채과 대담한 필치를 구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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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른스트 루드비히 키르히너 『나무로 깎은 의자 앞의 프랜치의 초상 (Fränzi vor einem geschnitzten sessel』 1910년 작 © Thyssen-Bornemisza Collection © VBK Wien 2006  다리파 초기 드레즈덴에서 활동중이던 키르히너의 작품 속의 여성상은 어딘지 모르게 불편한 성적 긴장감을 발산한다. 독일 표현주의의 잉태는 그 모든 외부적인 영향 보다는 독일 미술가들 내면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던 자생적인 예술혼과 표현욕구로부터 자연스럽게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독일 표현주의의 잉태는 그 모든 외부적인 영향 보다는 독일 미술가들 내면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던 자생적인 예술혼과 표현욕구로부터 자연스럽게 비롯된 것이었다. 독일을 포함한 북유럽의 미술가들은 이미 중세 시대부터 급격한 사회 변혁의 시대마다 인간이 겪는 내면적 공포와 영혼적 위기감을 합리적인 이성주의로 소화하기 보다는 왜곡과 과장의 미학을 빌어 격정적이고 폭발적으로 표현하는 경향을 발휘해 왔다.

독일에서 불거지기 시작한 표현주의 미술 운동은 20세기가 열리자 마자 표면화되었지만 그 잠재력은 이미 19세기 독일을 사로잡았던 낭만주의 화가 카스파르 다피트 프리트리히 (Caspar David Friedrich)가 특유의 고요하고 신비로운 분위기의 풍경화에서 비극과 고독의 멜랑콜리를 잠잠하게 표현했다. 독일 표현주의 운동은 일찍이 19세기 독일을 뒤흔들었던 신 칸트주의 철학에서 이론적인 바탕을 삼았다.

특히 19세기 초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라는 기념비적인 책을 쓴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 (Arthur Schopenhauer)는 개인의 내면 세계와 의지가 외부로 향한 표현의 창 (window)이 되어야 한다고 주창했는데, 그의 철학은 의지를 발휘하면 인간의 내면과 직관은 외부 세계로 전달될 수 있다고 믿은 당시 젊은 독일 표현주의 화가들 사이에서 두 팔 벌려 환영받았다.

드레스덴의 다리파 – 비문명 상태로의 회귀 독일땅 동쪽 끝의 역사 도시 드레즈덴 (Dresden)에서는 에른스트 루드비히 키르히너가 주도하여  1905년 다리파 (Die Brücke)가 결성되었다. 피카소의 입체주의에 나타난 아프리카 원시 미술, 북유럽의 뭉크의 절박함, 오스트리아의 에곤 실레와 오스카 코코슈카 (Oskar Kokoschka)의 실존적 고통이 표현된 그림을 본 후 독일만의 자체적인 아방가르드 미술운동이 필요함을 느낀 키르히너는 ‘문명 (civilization)’이라는 거름장치를 거치지 않은 인간 내면의 천연순수의 창조력을 외부로 표출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다리파는 삐죽삐죽하고 각진 형태, 튜브에서 갓 짜낸 배색되지 않은 강한 물감 원색, 여과되지 않은 화가의 감정이 그대로 드러난 그림들을 그렸다. 다리파 화가들은 그 때까지 주로 광고 인쇄물에나 사용되며 중세 시대 이후로 사실상 잊혀졌던 목판화를 부활시켰는데, 목판화가 자아내는 조악함은 거칠고 노골적인 감정 표현에 매우 효과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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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밀 놀데 (Emil Nolde)의 『여름 구름 (Sommerwolken)』 1913년 작 © Museo Thyssen-Bornemisza, Madrid. 덴마크 태생 독일 화가 에밀 놀데는 다리파와 잠시 인연을 맺으며 드레즈덴에서 그림을 그렸다.

다리파 동인들은 문명을 떠나 자연의 단순성과 원시성을 되찾자는 취지에서 모리츠부르크 호수가에서 난잡한 생활에 탐닉하기도 했지만 얼마 안있어 다시금 도시로 눈을 돌려 미술적 영감을 찾았다. 프랑스의 인상주의 화가들이 그랬듯이 독일의 표현주의 화가들 역시 신작대로가 뚫리고 나날이 인구가 늘어나며 상업과 활동이 번화해지던 근대 유럽의 도시화 현상에서 영감적인 매료를 느꼈던 때문이다.

급변하던 도시상을 그림으로 포착하기 위해 다리파 동인들은 1911년 독일 수도 베를린으로 근거지를 옮기고 급변하는 도시의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다. 특히 베를린 거리 풍경, 버라이어티 극장가, 아텔리에 실내 풍경화 속에 표현된 남녀 간의 동물적이고 성적 기장, 언제 분출할지 알 수 없는 억눌린 감정은 키르히너 회화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발견되는 특징이다.

뮌헨의 청기사파 – 음악과 그림의 만남 한편 독일의 남쪽 도시 뮌헨에서는 곧 터질 제1차 세계 대전의 암울한 분위기에도 아랑곳 없이 한결 조화롭고 시적인 분위기를 추구하는 젊은 화가들이 1911년에 청기사파 (Der Blaue Reiter)의 결성을 선언했다. 음악을 미술과 결합시켰다 하여 일명 ‘음악적 표현주의 (Musical Expressionism)’라는 별명으로도 불리는 청기사파 회화는 다리파 보다 감정을 절제하고 외부로의 거침없는 감정적 발산 보다는 내면적 조화와 균형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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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콘라트 펠릭스뮐러 (Konrad Felixmueller)의 『물랭 루쥬 앞의 밤거리 풍경 (Nacht vor dem Moulin Rouge)』 1925년 작. Lindenau Museum, Altenburg © VBK, Wien 2006.

청기사파의 결성 멤버였던 바실리 칸딘스키(Wasily Kandinsky)는 음악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데 매우 심취했던 화가였는데, 그래서 칸딘스키가 빈 출신의 근대 작곡가 아놀드 쇤베르크 (Arnold Schönberg)와 남다른 예술적 교감을 나누며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또다른 청기사파의 대표적인 화가 프란츠 마르크 (Franz Marc)는 가시적인 외부 세계에 대한 깊은 불신감을 청산하기 위하여 자연 속의 동물들의 영혼과 교감하면서 인간적 영혼에 대한 자기 성찰을 시도했다. 동물과의 교감 시도라니 심원난해한 소리처럼 들리지만 마르크의 ‘자연을 통한 자기 성찰 (Durchgeistigung)’은 이미 19세기 독일 낭만주의 미술에서도 시도된 바 있는 어찌보면 매우 독일적인 전통의 연속인지도 모른다.

독일 표현주의와 그 후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과 종전까지 독일 표현주의는 독일 내에서는 여전히 가장 주도적인 미술 사조로 명맥을 유지했다. 그러나 고된 전쟁과 패전 후의  독일인들의 경제적 사정과 일상 생활은 말할 수 없이 피폐해졌고, 그에 따라서 표현주의 미술가들 사이에서는 전에 없는 냉소주의와 사회적 비판정신이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전후 독일 사회 속에 팽배한 냉소주의, 고립과 소외, 환멸감은 보다 사실주의적인 그림으로 표현되었는데, 예컨대 게오르크 그로스 (Georg Grosz)와 오토 딕스 (Otto Dix) 등은 사실주의적 기법과 날카로운 사회비평적 시각이 담긴 이른바 ‘신즉물주의파 (Neue Sachlichkeit)’를 주도한 대표적인 화가들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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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오르크 그로스 (Georg Grosz)의 『쿠르퓌르스텐담 구역의 거리 풍경 (Strassenszene Kurfuerstendamm)』 © Museo Thyssen-Bornemisza, Madrid. 쿠르퓌르스텐담 (Kurfuerstendamm)은 독일 베를린의 부유한 고급 상가 구역. 화가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대로상을 오가는 사회 각층의 군상을 통해서 사회의 불평등과 부조리를 꼬집고 있다.

신즉물주의파의 그림은 다리파와 청기사파의 것에 비해 눈에 뛰게 사실주의적인 묘사 기법을 택하고 있지만 관객의 감성에 호소하는 충격적 감흥과 위력 면에서 여전히 독일 표현주의의 전통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그 같은 시각적 효과는 양차 대전 사이기 기괴하면서도 드라마틱한 독일 표현주의 영화 운동으로 이어져서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1919년)이라는 공포 영화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제1차 세계 대전을 패전으로 끝낸 독일 사회에서 표현주의 미술은 1920년대를 고비로 하강 국면을 면치 못했다. 화가 개인의 감성을 앞세워 사회적인 주제를 외면하는 표현주의 미술은 자기도취적이고 목표가 불분명한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고 여겨졌던 것이 주 원인이었다.

결정적으로 표현주의가 공식적인 종말을 맞은 때는 1933년. 나치주의 정권이 독일 표현주의 미술을 퇴폐 미술이라고 낙인한 이래 표현주의 화가들이 미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로 망명을 떠나 흩어지게 되면서 독일 표현주의는 독일인들 사이에서는 물론 구미 여러 나라들조차 기피하는 미술 사조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런 점에서이번 전시회는 다시금 독일 표현주의를 새로운 역사적 시각으로 바라보고 감상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아닐 수 없다. 『독일 표현주의자들』 전은 내년 [2007년] 1월 10일까지 레오폴트 미술관에서 계속된다.

* 이 글은 본래 『오뜨』 지 2006년 12월호 아트뉴스 컬럼에 실렸던 글을 다시 게재하는 것임을 밝혀둡니다.

Andy on Artis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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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람들은 예술가들은 특별하다고 생각하나요? 한낱 직업일 뿐인데요.” – 앤디 워홀

“Why do people think artists are special? It’s just another job.” -Andy Warho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