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thly Archives: March 2013

마티스의 실내 풍경화 속에 나타난 안락한 코구닝

HENRI MATISSE – A NEW LIFE

„긴 세월 동안 시간이 더해줘 기품으로 윤기를 발하는 침실 가구들, 호박석 옆에서 그윽한 향취를 한껏 발산하는 이색적이고 희귀한 꽃나무 장식, 분위기 있게 페인트칠 된 천정과 깊이를 알 수 없이 신비해 보이는 벽거울, 신비한 동양풍 실내장식들 … 비밀스러운 신비의 언어로 우리의 영혼에 대고 속삭이는 이 모든 사물들 … 이들이야 말로 질서, 아름다움, 럭셔리, 고요, 즐거움이 아니고 무엇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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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마티스 (Henri Matisse)의『 검정 양치 화초가 있는 인테리어』 1948년 유화 작품. Fondation Beyeler, Riehen/Basel © Succession H. Matisse.

19세기 프랑스의 시인 보들레르는 이 세상에서 가장 이상적인 장소를 머릿 속에 상상하며 바로 이런 것들이 한자리에 조화를 이루고 있는 곳 – 바로 가정의 실내 환경을 한 편의 시로 이렇게 묘사한 적이 있다.

때는 낭만주의가 창궐하는 전염병처럼 무섭게 번지며 동시대인들의 감성을 사로잡았던 19세기 후반기. 그런 만큼 순수한 장식적 아름다움과 질서정연한  조화에서 기쁨을 찾고 싶어하는 인간 본유의 감성에 잔뜩 호소하는 예술 사조가 등장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프랑스에서 태어난 화가 앙리 마티스 (Henri Matisse)는 바로 그런 사고방식을  미술을 통해 추구한 대표적인 화가였다. 일명 야수주의로 불리는 그의 회화 양식은 강렬하고 풍부한 색채와 대담한 필치를 사용했으면서도 설명하기 어려운 친근한 매력과 흥건한 분위기가 뒤섞인 순수 아름다움을 이룩했다.

그가 화가로서 정력적인 활동을 벌이던 1910년대는 정치군사적으로는 유럽이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뼈져린 비극을 격었던 때이며, 미술사조 상으로는 추상적 입체주의를 비롯한 온갖 모더니즘 운동이 실험되고 있던 사상적 갈등기였다. 세상 밖에서 돌아가고 있던 한파와 변화의 물결에도 아랑곳 않고 마티스는 마냥 아늑하고 평화롭기만한 아늑하고 조용한 중산층 가정의 실내 광경을 그려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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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랑과 파랑이 있는 인테리어』 1946년작. Centre Georges Pompidou, Paris MNAM/CCI © Succession H. Matisse.

구시대 구사상을 청산하고 근대적 선언과 강령들로 신사상의 춘추전국 시대를 맞고 있던 20세기 근대기.

급격한 사상을 추구하던 모더니스트들은 아늑하고 나른한 중산층들의 실내 생활 광경을 다룬 마티스의 그림들은  가리켜서 안일함과 안하무인격 태도로 비춰지며 충격을 넘어 모욕이라고 비난했다. 프랑스 고전 아카데미풍 그림을 연상시키는 그의 살롱화들에는 모더니스트들이 한결같이 퇴물처리하기에 바빴던 요소들로 꽉 들어차 있었기 때문이다.

마티스의 실내 풍경화들은 환희와 기쁨을 잔뜩 내뿜는 청량한 빨강, 인디안 핑크, 초록 등 지중해빛 색상, 실내에서 한가한 오후를 보내는 가족초상과 여성상, 그리고 동서양 공예에서 영감을 받은 장식 패턴들로 그득하다.

생전 마티스는 자신의 그림이 “… 하루 일과에 시달리고 집에 돌아온 비즈니스맨이 거실 안락의자에 앉아 쉬면서 즐길수 있는 미술이 되길 바란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마티스는 분명 혁명과 사회 변혁을 위한 미술은 아니었다. 그의 그림을 사주고 감상한 고객은 사회혁명가가 아니라 하루종일 일을 하고 저녁에 집에 돌아와서 가정에서 시간을 보내는 교양있는 중산층 시민이었기 때문이었다.

앙리 마티스의 실내 풍경화를 통해서 근대기 프랑스 가정의 포근하고 조화로운 광경을 만끽할 수 있는 전시회 『앙리 마티스 – 새로운 생활 (Henri Matisse – A New Life)』는 올 덴마크 코펜하겐에 있는 루이지아나 근현대 미술관 (Louisiana Museum of Modern Art)에서 [2006년] 올 여름 계속된다. All images coutesy: Louisiana Museum of Modern Art, Denmark.

미켈란젤로가 살았던 전성기 르네상스 시대

MICHELANGELO AND HIS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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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 보나로티(1475-1564) 『가운을 입고 왼쪽을 바라보고 서있는 세남자』 1492-1496년작, Pen and brown ink, 29,2 x 20 cm, Albertina, Vienna Photo: Albertina Vienna.

인류 문명사를 통틀어서 가장 위대한 예술가를 거론할 때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 „불후의 걸작 미술“하면 의례 동의어처럼 나란히 등장하는 이름, 미켈란젤로 보나로티 (Michelangelo Buonarroti, 1475-1504).

그가 살았던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는 르네상스 시대 중에서도 예술의 깊이와 완성도 면에서 최고조의 경지를 이룩했다고 평가되는 15세기 후반 전성기 르네상스 시대로부터 16세기 중엽 매너리즘이 널리 번지고 있던 1564년 까지였다.

2003년 봄 미국에서 출간된 이래 추리소설 『다빈치 코드』(댄 브라운 저)가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떠나줄 모르면서 전세계 독자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요즘, 구미권 미술관들에서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전성기 시대를 빛낸 천재 미술가들의 예술 세계를 조명하는 전시들이 연달아 열리고 있다. 비정형과 기괴의 미가 주도하고 있는 최근 미술계에서 서양 미술사상 고대 그리스 고전기 이후로 미술이 구현할 수 있는 이상미(理想美)의 최절정을 달했다고 평가되는 르네상스 미술의 재조명은 퍽 신선한 환기가 되어줄만 하다.

올 여름 7월 9일부터 10월29일까지 오스트리아 빈에 자리한 알베르티나 (Albertina) 미술관에서는 『미켈란젤로와 그의 시대 (Michelangelo and seine Zeit)』(2004년10월26일-11월15일까지 전시)라는 제목을 단 전시가 열렸다. 미켈란젤로가 그의 조각과 회화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착상을 끄적거리고  관찰을 기록해 두었던 드로잉 및 스케치 작품을 비롯해서 동판화, 채색 목판화, 기타 판화작들을 포함해서 종이 위에 남긴  작품들 100여점을 비롯해서, 미켈란젤로가 살았던 당시 동시에 활동한 다른 거장들 , 예컨대, 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a Vinci), 라파엘로 (Rafaelo), 그리고 라파엘로의 제자들인 쥴리오 로마노 (Giulio Romano), 페리노 델 바가 (Perino Del Vaga), 폴리도로 다 카라바죠 (Polidoro da Caravaggio)의 작품들이 나란히 함께 선보였다.

그 뿐만이 아니다. 미켈란젤로는 물론이고 다 빈치와 라파엘로 3대 거장들의 양식을 두루 한데 절충결합하여 새로운 이상미를 구현했던 코레죠 (Correggio), 파르미쟈니노 (Parmigianino), 베르나르디노 뤼니 (Bernadino Luini) 등의 작품들과 그 이후로 전성기 르네상스가 진부해지고 퇴색하여 변태적인 양식으로 전환했다고 평가되는 매너리즘주의 계열의 작품들도 이 전시에 포함되었다.  이렇게 해서『미켈란젤로와 그의 시대』 展은 미켈란젤로가 르네상스 전성기는 물론이고 매너리즘, 반종교개혁 시대, 바로크에 이어지며 그 이후로 계속된 나머지 서양 미술사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는가를 폭넓게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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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 보나로티 『죽은 그리스도 애도』 1530년경, Red chalk, 32 x 24,9 cm, Albertina, Vienna Photo: Albertina Vienna.

예나 지금이나 동과 서를 막론하고 특출난 예술가는 저마다 처해 있는 권력 간의 알력의 폭풍우 속에서 조심스럽게 일행일보에 신경써야 했던 법이어서, 그 역시 정치적 권모술수에 그다지 능하지 않은 성품에도 불구하고 일평생 피렌체 도시 공화국의 메디치 가문 (The Medicis)을 비롯한 귀족 권력과 로마의 교황 권력 사이에서 빚어진 정치와 권력을 알력 속에서 갈등하면서도 능히 예술가로서의 커리어를 구축해 나갔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더불어서 르네상스적 천재적 예술가의 한 전형으로 꼽히는 미켈란젤로. 90년이 가까운 기나긴 예술 역정을 걸었던 그는 괴팍하고 고립을 좋아하는 자기도취적 성격 때문에 일평생을 한 두 명의 조수만을 둔 채로 혼자서 작업을 했던 외톨이 천재였다. 사적으로는, 60세가 넘어서 알게된 비토리아 콜로나 (Vittoria Colonna)라는 여성과의 정열적이면서도 지고순수한 사랑을 나눴던 일 외에는 단 한 번도 결혼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남색가라는 암암리의 풍문 속에서 처절하게 고독한 생을 살았던 기인 (奇人)이기도 했다.

천재에게 가해지는 갈등과 혹독한 환경은 오히려 창조의 자극제가 되어주는 법인지, 미켈란젤로는 철학적 경지의 ‚인간의 조건’을 폭넓게 섭렵하며 숭고하면서도 웅장한 아름다움과 강렬한 표현력 면에서는 동시대의 천재 미술가들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라파엘로 같은 거장들을 능가했다고 평가되고 있다.

남들에게는 없는 신이 내려 준 유일무이한 독창적 창조력과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눈부신 재능의 소유자이지만 바로 그처럼 선택받은 특권을 타고 났기 때문에 뼈 속까지 사무칠 정도로 고뇌하고 갈등해야 하는 천재 – 이 천재 (genius)의 개념은 바로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에 처음 등장했다 – 미켈란젤로는 그같은 전형에 그 누구보다 잘 부합하는 예술인이었다.

드로잉을 통해서 인체 누드의 완벽한 경지 도달
가장 이상적인 인체 묘사의 경지는 이미 고전기 고대 그리스 미술에서 구현되었다고들 말한다. 이번 알베르티나가 중점적으로 촛점을 맞춘 것은 미켈란젤로와 동시대 르네상스 미술가들이 이룩한 인체 묘사과 누드화들인데, 그 중에는 이미 잘 알려져 있는 걸작품들도 있고 아직 일반인들에게 널리 소개된 적이 없다가 이번 알베르티나 미술관에서 열린 전시를 계기로 처음  빛을 보게 된 작품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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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 보나로티 『누드의 남자상』 1501-1504년작, Pen and brown ink, 38,7 x 19,5 cm, Albertina, Vienna Photo: Albertina Vienna.

무엇보다도 빈의 알베르티나 그래픽 미술관이 오늘날 그토록 여러편의 미켈란젤로의 드로잉 및 판화작품들을 소장하고 있게된데에는 초대 알베르티나 미술관의 소장주인이던 알베르트 작센-테셴 공국의 군주 부부 (합스부르크 제국 17세기 마리아-테레지아 여왕의 사위)가 플랑드르 바로크의 거장 페터 폴 루벤스 (Peter Paul Rubens)를 애지중지하며 그의 그림을 사 모으게 된 것이 효자노릇을 했다.

알베르트 공은 루벤스의 그림을 사 모으던 중 루벤스가 소유하고 있던 미켈란젤로의 작품들까지 함께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것인데, 이유는 루벤스도 과거 시대 그 어느 거장 선배 화가들 중에서도 미켈란젤로의 드로잉과 모작품들을 관찰연구한 미켈란젤로의 흠모자였던 때문이다.

오늘날 그림을 그리는 아마츄어 미술가들이나 직업적인 화가들 사이에서 드로잉이란 작품 착상과 구성 과정에서 필히 수반되는 창조과정의 일부다. 지금으로부터 500여년 전인 르네상스 시대에 이미 드로잉은 이전 화가들이 하지 않던 새로운 창작 과정이자 그 자체로 독자적인 완성작품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독립적인 미술 쟝르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연필이나 목탄 같이 쉽게 그렸다 지울 수 있는 매체를 이용한 드로잉이 가장 흔했으나, 점차 거장들의 필치와 스타일을 보고 배우려는 후배 화가들이 참고할 수 있도록 동판이나 목판 등에 끌로 새겨 판화로 여러장 인쇄해 묶은 드로잉 지침서가 탄생했다.

조숙한 나이에 남다를 재능을 보여서 화가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Domenico Ghirlandaio)의 화실에 견습공으로 들어갔다가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며 1년 만에 박차고 나온 미켈란젤로가 14세부터 깊숙이 품고 있던 열정은 인체에 대한 연구였다. 그는 교회의 특별한 허락을 받아서 시체공시장에 들어가 신체해부도 스케치에 골몰했다.

당시 미켈란젤로에 대한 평전을 썼던 평론가 죠르죠 바자리 (Giorgio Vasari)는 『위대한 미술가들의 생애 (Lives of the Artists)』에서„ 예술성의 극치에 다달은 미켈란젤로의 드로잉 인쇄물들을 보고 주변 미술가들은 경악과 놀람을 금치 못했다. 그림을 본 이들은 그 성스럽기 짝이없는 인체 묘사를 보고 그같은 것은 이전에 어디서도 본 적이 없으며 그에 필적할 만한 천재적 재능가도 알지 못한다며 극찬을 했다”고  적은 바 있기도 하다. 바자리가 이 책을 썼을 당시 미켈란젤로는 아직도 버젓이 살아 활동하는 생존 미술가였으니, 지금으로 치면 미켈란젤로는 살아서 이미 빛을 볼 만큼 본 인정받는 스타 미술가였음도 엿볼수 있다.

동시대와 후대 미술가들로부터 격찬과 동경의 대상이 되었던 미켈란젤로의 작품은 바로 『카시나의 전투 (Battle of Cascina)』였다. 흔히 그의 미술사가들은 인체 묘사 양식을 두고 ‚영웅적 (heroic)’이라고 표현한다. 영웅이란 본래 고대 근동과 그리스 신화에서 등장하는 초인간적 정신력과 육체적 강인성으로 시련과 난관을 극복하여 신의 경지에 필적하는 위대한 업적이나 과업을 성취한 인간 또는 반신반인(半神半人)을 뜻하는데, 미켈란젤로가 묘사했다고 하는 바로 그 ‚영웅적인 인간의 몸’은 강인하고 근육이 움찔거리듯 생동하면서도 마치 인물의 에너지와 열정이 스며나오는 듯 내면세계까지 표현해 냈기 때문이었다. 미켈란젤로가 고대 그리스 고전기 조각상에서 구현된 완벽한 인체의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한 단계 승화시켜서 내면세계의 표현력과 결합한 가장 완벽한 경지의 인체 누드화를 이 르네상스 시대에 완성시켰다고 일컬어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레오나드로 다 빈치와의 앙숙 관계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 사이의 앙숙적인 관계는 여러 편의 에피소드로도 전해질 정도로 유명하다. 피렌체에서 미술가로서의 명성을 굳힌 후 밀라노에 가서 더 유명해진 다 빈치는 자신의 재능과 명성에 의기양양해 져서 피렌체로 돌아왔지만 어느새 갓 스무살 난 청년 미켈란젤로라는 천재 조각가가 피렌체시의 귀족층으로부터 비호를 한 몸에 받으면서 그 유명한 『다비드』 상 (1501-1504) 조각 주문을 따낸 사실을 발견하고 분개하기도 했다. 동시대 어떤  화가가 전하는 한 일화에 따르면, 미켈란젤로는 유별난 성격과 미술 주문자들과의 잦은 불화로 인해서 작품을 중간에 중단하거나 미완성으로 남겨두곤 했던 다 빈치를 비아냥거리기곤 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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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 (1452-1519) 『반신 사도상』 1493-1495년작, Silverpoint, pen and brown ink, 14,6 x 11,3 cm, Albertina, Vienna Photo: Albertina Vienna.

이 『카시나의 전투』 그림과 연관시킬 수 있는 재미있는 일화도 바로 다 빈치와 떼 놓을 수 없다.  이 작품은 미켈란젤로의 경쟁자이자 30년뻘 선배인 다 빈치의 작품 『안기아리의 전투』의 정맞은 편에 그려져 경쟁한 그림으로서, 본래 피렌체에 있는 팔라쪼 베쿄 (Palazzo Vecchio) 시의회 집무실 실내 벽면을 장식하기 위해 그린 대형 프레스코 그림이었다.

당시 시의회에서는 미켈란젤로의 그림 반대편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시켜 프레스코화를 그리도록 주문을 했다. 전해지는 기록에 따르면 이때 다 빈치가 이룩한 누드 인체 묘사력은 인체해부학과 관상학으로 경륜이 쌓일대로 쌓인 손재주와 관찰력의 결과 탄생한 감성과 표정의 표현력의 극치였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다 빈치의 『안기아리의 전투』는 이미 소실되어 지금은 원형을 확인할 길이 없지만 적어도 그가 남긴 인물 두상 스케치와 드로잉 기록은 그가 당시 접어든 새로우면서도 섬뜩하게 날카로왔음을 잘 보여준다.

미켈란젤로가 젊은 후배 라파엘로에게 끼친 영향
1504년,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 사이의 티격태격하는 두 천재의 경쟁 일화들과 그 둘이 나란히 팔라쪼 베쿄 시의회 집무실에 작업한 두 걸작 프레스코화 『카시나의 전투』와 『안기아리의 전투』를 둘러싼 자자한 명성을 듣고 피렌체 도시 공화국을 찾아 온 한 젊은이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갓 20살난 라파엘로였다. 이번 알베르티나에서의 전시가 중점적으로 보여주고자 한 점은 미켈란젤로가 이 시기 청년 화가 라파엘로에게 얼마나 지대한 영향력을 끼쳤는가를 입증해 주었다.

미켈란젤로의 『카시나의 전투』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신체 묘사를 보고 있노라면 개별 인물마다 이상화된 아름다움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서로서로 동떨어져 고립된 일련의 부조 조각을 보는 듯하다. 라파엘은 바로 그같은 점을 한층 개선하여 인체 표현을 한층 근육이 불거진듯 생동감 살린 질감을 더하고 곡선감을 한층 더 강조해 그렸다.

라파엘이 화면 구성상 전체적인 조화를 이룩했으며 고대 그리스에서 높이 평가했던 절대적인 이상미에 더 한층 근접했다고 평가되는 이유는 그가 인물 얼굴과 신체 묘사를 할때 미켈란젤로 보다 한결 부드럽고 자연스러워 보이도록 개선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비평가들에 따라서는  라파엘로를 유능한 절충주의자였다라며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며 또 혹자는 너무 완벽하고 조화로운 화면 구성과 양식을 구현한 나머지 오히려 따분한 형식주의자였다라고 비난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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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로 (1483-1520) 『석류를 손에 든 마돈나』 1504년경, Dark grey chalk, 41,2 x 29,5 cm, Albertina, Vienna Photo: Albertina Vienna.

어쨋거나 라파엘로는 타고난 재능 외에도 미켈란젤로와 다 빈치 두 선배들이 지니지 못했던 특유의 원만하고 외교적인 성격 덕분에 그로 부터 4년 후에 24살의 나이로 로마로 불려가 스탄자 델라 세냐투라 (Stanza della Segnatura)의 벽화 그리기 작업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의 벽화 실력도 실은 미켈란젤로가 1508년부터 3년 동안 그리다가 교황에게 살짝 공개한 로마의 시스틴 채플 (Cappella Sistina) 천정화를 엿보고 나서 크게 감명받은 결과였다고 전해진다.

그 결과 라파엘로는 미켈란젤로의 시스틴 채플 그림을 보고 자신이 그동안 해 오던 회화 양식을 전면 개편해서 인물 묘사를 한층 조형적이고 조각같은 느낌이 나도록 변형시켰다.

이 회화 작품 역시 안타깝게도 지금은 남아있질 않지만 현재 알베르티나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디스푸타, 아테네 학파, 파르나수스 기록물 등에 스케치 그림들을 통해서 그가 이 회화 작품에 그려 넣었을 준비용 드로잉 습작들을 엿볼 수 있다. 그런 한편 4년 동안 400점이 넘는 대형 인물상을 교회당 천정에 누운 자세로 그리는 고역을 치뤘던 미켈란젤로는 그림이 완성되고 바깥에 나갔더니 „그동안 너무 늙어서 자기를 알아보는 자 하나 없었는데 당시 나이는 37살에 불과했다“고 그는 전기에서 고백했다.

영악한 라파엘로는 자신이 그려 둔 그 비범한 스케치 그림들을 로마에서 알게 된 마르칸토니오 라이몬디 (Marcantonio Raimondi)에게 시켜서 일일이 동판화로 새겨 두도록 했던 덕택에 오늘날 우리는 라파엘로가 당시 이룩해 놓은 절정기 르네상스 회화의 세계를 드로잉과 스케치로 나마 짐작해 볼 수 있게 해 주고 있다. 특히 그가 남긴 『베들레헴 유아살인 사건』은 미켈란젤로가 그린 『카시나의 전투』에서 보고 영향받은 흔적이 매우 짙게 나타나 있다.

로마 바티칸 교회에서 널리 촉망받은 라파엘로는 30살이 갓 넘은 나이로 교황 레오 10세의 의뢰로 바티칸의 스탄자 델린첸디오의 벽화를 그렸는데, 여기서 그가 묘사한 『노인을 등에 업은 젊은이』 (아에네아스가 안키세스를 구출하는 고대 그리스 신화에 대한 도해) 그림은 미켈란젤로가 이룩해 놓은 인체 묘사법을 체득한 흔적이 다분히 엿보이는 작품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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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로 『노인을 등에 업은 젊은이』 1514년작, Red chalk, 30 x 17,3 cm, Albertina, Vienna Photo: Albertina Vienna.

후대 화가들에게 미친 미켈란젤로의 예술 정신
르네상스 전성기가 최고조에 달했을 즈음, 라파엘로 화파 (School of Rafael)라는 화가 집단이 생길 정도로 라파엘로는 로마에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전성기의 미술계를 평정하다시피 했다. 라파엘로가 로마에서 카톨릭 교회와 교황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던 사이, 미켈란젤로는 1530년대, 그러니까 그가 50대 중반 라파엘로는 40대 중반이 된 나이가 될 때까지 피렌체에서 머물고 있었다.

라파엘로와는 달리 조수나 제자를 일체 두지 않고 혼자서 작업을 직접했던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미술 양식을 체계적으로 전수할 수 있는 후학 양성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수의 작품을 통해서 파급된 그의 영향력은 동시대는 물론 후대 화가들에게도 영향을 끼치기에 충분했다.

1527년,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가 각각 50대와 40대 중반일 무렵에 로마는 프랑스왕 샤를르  5세의 침략으로 도시 전체가 약탈당하는 고초를 겪어는데 이를 계기로 로마에서 프랑스로  도망친 수많은 화가들이 미켈란젤로로 부터 배운 미술을 이탈리아 지방 곳곳과 유럽의 다른 나라로 널리 전파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특히 미켈란젤로의 제자였던 로쏘 피오렌티노(Rosso Fiorentino)는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와 퐁텐블로에서 황실 전속 화가로 일을 하면서 미켈란젤로풍의 알레고리 프레스코화를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미켈란젤로의 걸작 그림들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시스틴 채플에 있는 최후의 심판 장면 스케치 습작과 예수의 죽음을 다룬 그의 말기 작품들을 놓치지 말 것이다. 현재까지 알베르티나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습작 스케치 모음들은 당시 이 걸작 프레스코 회화작품들이 탄생하기까지 착상에서 부터 창작 과정을 일일이 보여주고 있다. 시스틴 채플에 남아 있는 최후의 심판은 8년에 걸쳐 제작된 역작으로 바쵸 반디넬리, 도메니코 베카푸미, 프란체스코 살비아티 같은 동시대 신진 화가들이 양식을 구축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 작품의 대표적인 경우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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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 바르톨로메오(1472-1517), 『공중의 천사』 1505-1507년작, Black chalk, heightened with white, 29,7 x 20,3 cm, Albertina, Vienna Photo: Albertina Vienna.

최후까지 조각가 미켈란젤로
회화와 드로잉 분야에서 발휘한 탁월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미켈란젤로는 이미 어린 시절부터 죽음을 맞을 때가지 스스로를 조각가로 여겼다. 1550년, 미켈란젤로는 75세 되던 해부터 회화에서 손을 떼고 세상을 뜰 때까지 조각과 건축에만 전념했다.

„살아있는한 신이 내려주시는 미술 작업을 수행하는 나는 불쌍하고 보잘것없는 사람일 뿐이다“라고 한탄했던 노쇄한 미켈란젤로는 가난, 고독, 고된 작업에 묻힌 여생을 건축과 조각에 전념하면서 보냈다.

17세기에나 와서 완공을 끝낸 캄피돌료 로마 국회당 건물 (Campidoglio)과 성베드로 성당은 각각 그가 63세와 71세 때 설계를 맡은 것들이다. 그는 손에서 망치와 정을 놓지 않고 조각일도 계속했다.

성모 마리아와 죽은 예수를 형상화한 피에타 조각들 중에서 플로렌틴 피에타는 조각가가 스스로 팔과 다리 부분을 깨부수어 버렸고, 론다니니 피에타는 미완성인채로 남아있다. 몸이 너무 노쇄해 버려서 잠도 자지 못했던 미켈란젤로는 늦은 밤 어두운 작업실에서 망치와 정을 든 양손으로 돌을 깨기 위해서 종이 헬멧에 촛불을 세워 만든 야간작업용 헬멧을 발명한 장본인기도 하다.

신비의 화가 다 빈치, 고전미 구현의 라파엘로와 더불어 황금률과 고귀한 정신성을 통일한 미켈란젤로의 미술세계는 고귀하고 웅장하다. 올 여름 빈 알베르티나 미술관의 『미켈란젤로와 그의 시대』를 놓친 관객을 위해서 이 전시는 스페인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으로 옮겨져 내년 2월말까지 계속된다.

전시 제목: 미켈란젤로와 그가 살았던 시대 (Michelangelo and his Era) | 전시 장소: 스페인 빌바오 구겐하임 (Guggenheim Museum Bilbao) | 전시 기간: 2004년 11월15일-2005년 2월까지

* 이 글은 본래 세종문화회관 월간 회원지 『문화공간』 2004년 12월에 실렸던 글을 다시 게재하는 것임을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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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아트 두바이 미술페어

 

Aysh by Pascal Hachem, 2007,130L x 85H cm. Courtesy of Selma Feriani Gallery.

Aysh by Pascal Hachem, 2007,130L x 85H cm. Courtesy of Selma Feriani Gallery.

올해로 제7회를 맞는 2013년판 아트 두바이 국제 현대미술 페어가 3월 20일부터 23일까지 4일 동안 열렸다. 아트 두바이는 이른바 메나사 권 (MENASA: Middle East, North Africa, South Asia 지역 이슬람권)을 아우르며 가장 권위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는 국제 미술 페어. 게이트빌리지 본관 페어그라운드에서 전세계 32국가에서 찾아온 75개 사설화랑들이 참여한 갤러리 전시에서 특히 주목해 볼 만한 작품들을 골라봤다.

See selected arts from Art Dubai at penccil: Art Dubai 2013

아트 두바이 선별작품 보기 penccil: Art Dubai 2013

로스앤젤레스의 현대미술 대창고

MOCA LA – Museum of Contemporary Art, Los Angeles

모카 엘에이 – 로스앤젤레스 현대미술관

moca_asiana0402_2sm-212x300현대미술은 여전히 일반인들에게 멀고도 가깝게 느껴지는 대상이다. 그런 연유로 아직도 일반 대중과 관광객들은 현대미술관 보다는 역사 박물관이나 대중적으로 잘 알려져 있는 고전 미술이나 근대 유명 미술가들의 작품이 소장되어 있는 유명 대형 미술관들을 더 찾곤 한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 시대에 창조된 현대 미술은 미래 언제가는 과거의 미술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고려해 본다면 지금 한창 전개되고 있는 현대미술에 관심을 갖고 모으고 관리하는 개인 소장가나 미술관의 역할은 적잖이 중요해 질 수 밖에 없다.

그같은 자각 의식은 오늘날 로스앤젤레스에 자리하고 있는 엘에이 현대미술관 (Museum of Contemporary Art, Los Angeles)이 탄생하게 된 불씨였다. 일명 현대미술관이라는 영문명칭의 알파벳 머리글자를 딴 모카 (MOCA)라는 별칭으로 두루 통하는 이 미술관은 80년대부터 현재 캘리포니아 플라자 (California Plaza)에 위치한 모카, LA 리틀 도쿄 (Little Tokyo) 안에 있는 모카 게펜 컨템포러리 (MOCA at Geffen Contemporary), 그리고 가장 최근 문을 연 웨스트 헐리우드의 퍼시픽 디자인 센터 모카 갤러리 (The MOCA Gallery at the Pacific Design) 등 3개 건물로 나뉘어 현대 미술 작품을 소장하고 기획전시해 오고 있다.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 (LACMA: Los Angeles County Museum of Art)과 유럽 고전미술을 구경할 수 있는 게티 미술관 (Getty Museum) 등을 찾아 볼 수 있는 로스앤젤레스에서 70년대말까지 현대 미술만을 전문적으로 관리하고 지원하는 기관은 단 한구데도 없었다. 이같은 사실을 자각한 로스앤젤레스의 일부 유지들과 시민들의 의견이 수렴되어 모카가 설립된 해는 1979년 봄. 로스앤젤레스를 배경으로 활동하는 미술인들과 개인 컬렉터들을 포함해서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미술관 관련인들과 큐레이터들이 여기에 합세했으며, 당시 이 도시의 시장이던 톰 브래들리의 제정적 지원이 어우러져 모카가 탄생했다.

현재 캘리포니아 플라자에 위치해 있는 모카 메인 건물 – 현 모카 캘리포니아 플라자 – 은 일본의 건축가 아라타 이소자키의 설계로 19xx년 개장에 앞서, 미술관측은 리틀 도쿄 안의 한 창고 건물을 개축하여 1983년 가을부터 모카의 첫 전시를 부치는 것을 출발로 임시 전시장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과거 철물 재고품을 쌓아두고 경찰차를 세워두던 창고 겸 차고로 사용되어 오던 이 임시 갤러리 자리는 시정부와의 의논끝에 년간 임대료 1달러라는 터무니없이 저렴한 가격으로 5년 계약으로 얻게 된 이야기는 지금도 이 미술관 설립 초기 역사에서 잊혀지지 않고 회자되는 일화이다. 현대 미술에 대한 지원과 문화적 기여도를 인정받아 로스앤젤레스 시정부는 2038년까지 템포러리 컨템포러리 전시장 공간을 이용할 수 있는 임대 계약을 체결하는가 하면 5백만달러의 후원금을 지원받기도 했다.

moca_asiana0402_4sm미술관은 캘리포니아를 배경으로 활동하던 건축가 프랭크 게리 (Frank Gehry, 뉴욕 맨하탄에 백색 나선형 설계디자인으로 유명한 솔로몬 구겐하임 미술관과 빌바오의 구겐하임 미술관 설계를 맡은 스타 건축가로 유명)의 재설계로 사실상 모카의 첫 전시장 역할을 하기 시작한 셈이었다. 리틀 도쿄라는 독특한 지리적 배경을 고려해 두드러지기 보다는 젊잖고 차분한 분위기를 강조한 이 템포러리 컨템포러리 – 현재의 모카 게펜 컨템퍼러리 (MOCA Geffen Contemporary) – 전시장은 그래서 미술관 후원인들과 평론가들 및 여론으로부터 접근하기 쉽고 비형식적이며 겸손한 현대 미술관이라는 평가를 받아, 이후 줄곳 ‘일반대중과 친근한 미술관’이라는 이미지를 굳혀 나가기 시작했다.

현대 미술관답게 모카가 바로 이 템포러리 컨템포러리 전시장에서 개최한 전시회 제1호는 1983년 9월 열린 『어베일러블 라이트 (Avaliable Light)』라는 제목의 미술 퍼포먼스였다. 음악은 존 아담스,무대 디자인은 프랭크 게리, 무용 안무는 루신다 차일즈, 그리고 무대 의상은 로널두스 샤만스크가 담당한 이 퍼포먼스는 기존의 작품을 재탕해 디스플레이하는 방식의 전시 형태를 피해 이 전시만을 위해 참가 예술인들에게 특별히 지시해 창조된 주문작이라는 점에서 이미 초기부터 미디어 미술과 퍼포먼스 미술에 대한 이 미술관의 신념과 지원을 표시하는 선언이기도 했다.

이후 1986년까지 같은 자리에서 모카는 당시 떠오르기 시작한 신진 작가들을 연이어 기획했다. 60년대와 70년대부터 부상하기 시작한 조나단 보로프스키 (Jonathan Borosfsky), 존 챔벌린 (John Chamberlain), 댄 플라빈 (Dan Flavin)을 비롯해서, 레드 그룸즈 (Red Grooms), 앨런 루퍼스버그 (Allen Ruppersberg), 제임스 터렐 (James Turrell) 전시가 연이어 기획전시되는 것으로 당시 미국의 현대 미술에서 즐겨 거론되던 개념적 미술과 규모면에서 장대한 설치 미술을 선보여 미술관의 실험적 면모를 과시하기도 했다.

역시 전시에 포함된 바 있던 마이클 애셔 (Michael Asher), 마이클 하이쩌 (Michael Heizer), 마리아 노드먼 (Maria Nordman), 로버트 테리엔 (Robert Therrien) 등은 모카가 주문한 신작들 처음 선보이는 것으로 미술계의 관심을 모은 신인 작가들로 꼽힌다. 모카의 영구 소장품 컬렉션에는 미래 세대를 위해 1940년대 이후로 지금까지 창조돼온 모든 형태의 현대 미술을 소장하고 전시하고 해석하고 장려한다는 대취지 아래 현재까지 이 미술관이 영구 소장품으로 보유하고 미술 작품수는 5천여점에 이르고 있다.

* 이 글은 본래 『아시아나 (ASIANA)』월간 기내지 2002년 4월호에 실렸던 글을 다시 게재하는 것임을 밝혀둡니다.

ARE YOU A CREATIVE TALENT?

CREATIVITY IS A UNIVERSAL TALENT. IT MEANS EVERYONE IS BORN CREATIVE.

THE 5 QUALITIES OF CREATIVE PEOPLE: ARE YOU ONE, TOO?

wilde_americaCreativity is a universal talent. Everyone is born creative, although the degree of specific talent might vary from individual to individual. Just watch children play – they are uninhibited about their imagination and expression, and, most of all, have fun with what they do. In complex times such as now we are in dire need for creative and ingenious solutions to wicked problems.

Today, more than ever, needs creative imagination and passion. The writer Tom Robbins once said, “It is never too late to have a happy childhood”. It is also never late to be passionate about being creative. Benjamin Franklin said that “our whole life is but a greater and longer childhood.” So what are some of the qualities you find in people who manage to maintain this universal talent which many adults left behind in their childhood?

  1. FLEXIBLE MIND: When someone is constantly fixated within the already existing boundaries of things in the face of situations requiring solution or change, there will most likely be no way out of trouble. Imagine. Dream. Don’t circle around in the same track. Jump off the track and think outside of the box. Work hard to make brilliant ideas reality.
  2. EMBRACE CHAOS: Creativity thrives in messy surroundings. People working in creative fields often live and work in seemingly chaotic homes and studios. But don’t be fooled. What might look unruly and dishevelled to visitors actually are treasure troves of inspiration. For creative people, chaos is just another word for creative order.
  3. KNOW YOUR PERSONAL STRENGTHS: Knowing one’s ego and talent sets you apart from others. Outstanding creative people throughout history always had a strong inner drive to externalize their visions. But having a self-conscious ego does not mean being arrogant and impolite to others. A great talent transcends into a beautiful reality when it is combined with character.
  4. REAL MOTIVATION COMES FROM WITHIN: Ask someone who is in a creative job why he/she is doing it. They will most likely say it is because they like to do what they do. Psychologists call it “intrinsic motivation.” Creative people have a innate compulsion to create. They cannot help keep generating new ideas, experimenting with new forms, making drawings and building models, and having the irresistible desire to see their vision and inventions realized and presented to the world. A reward for the work one does is sweet. But without creative motivation and hard work, how can there be a reward?
  5. HAVE FUN: Being creative is fun. The whole creative process from ideation and conceptualization to implementation is an immersive experience. Human beings are by nature made to play. Creative people like to mix work and pleasure. There is no question that people who enjoy their work also are much more creative, thus, perform far better than those who are doing their job because they are forced to work.

 

런던 고미술품 박람회에서 골동미술 쇼핑법 배우기

WHERE COLLECTORS AND SAVVY SHOPPERS MEET

2004년 겨울철 올림피아 박람회

Fair_sm„안목이 뛰어난 사람들이 올 겨울 크리스마스 쇼핑을 하러 가는 곳“이라는 재치있는 홍보 모토를 앞세우고 개막을 올린 런던 최고의 고미술품 박람회가 지난 11월8일 런던에 있는 올림피아 그랜드 홀 (Olympia Grand Hall)에서 개막의 막을 올렸다.

2004년 겨울철을 맞아 7일 동안 열린 올림피아 파인아트 앤 앤티크 페어 (Olympia Fine Art and Antiques Fair Winter 2004)는 미술품과 골동품 애호가들과 관심있는 관람객들을 잔뜩 유혹했다. 런던 도심부 얼스 코트 (Earls’ Court) 지하철 역 근처 자리하고 있는 올림피아 그랜드 홀 박람회장은 이 행사 주최자가 매 년마다 봄, 여름, 겨울 년3회에 걸쳐 이 행사를 개최해 온지 30년이 넘어 유서깊은 고미술품 박람회 명소로 자리잡아 왔다.

부활절을 제외하고 구미인들이 일 년중 가장 가슴을 설레이며 기다리는 명절은 크리스마스다. 다가오는 크리스마스에 대비하여 많은 사람들은 11월부터 본격적인 성탄 쇼핑에 돌입하는데, 이 쇼핑 시즌 만큼은 어쩐지 유명인과 갑부들이 유명한 고급 쇼핑가인 옥스퍼스 스트리트와 고급 백화점에서 유명인들과 갑부들을 여간해서 찾아보기 어려워졌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언제부터인가 미술품 애호가들은 물론이고 연예인이나 사회 유명인들은 올림피아 고미술 및 골동품 박람회에 가서 가까운 친지와 친구들을 위한 성탄 선물을 구입한다는 비밀아닌 비밀이 그 이유였다. 유명 디자이너 발렌티노를 비롯해서 갑부 상속녀인 제마이마 칸, 영화배우 제러미 아이언스도 박람회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이번 박람회 참관객들과 기자들의 눈에 띈 것만 봐도 그렇다.

한 해에만도 전세계 대도시에서는100여가 넘는 고미술품 및 골동품 관련 박람회 행사가 줄기차게 열리고 있지만 정작 연말에 즈음하여 유럽 내에서 구경할 만한 수준급 행사로는 런던에서 열리는 겨울철 올림피아 고미술 박람회가 유일하다. 본래는 32년 전 영국 내에서 찾아온 고미술품 업자들과 화랑들이 주축이 되어 시작된 이래 가장 영국적인 고미술 박람회의 전형으로 자리잡아 왔으나, 최근 몇 년 동안 이 행사를 참여하기 위해 찾아온 해외 전시참가자들이 부쩍 늘면서 어느새 국제적인 색채를 띠는 박람회로 발돋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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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태양왕 루이 14세 양식으로 제작된 기압계. 전시상: Derek & Tina Rayment Antiques.

영국을 포함해서 해외에서 참가 신청을 한 총전시참가들 수는 올해 240여곳으로 그들이 선보이는 고미술품들은 고급 고가구, 회화와 판화 작품, 장신구, 동양 미술품, 도자기, 은공예품, 아르데코 장식 용품, 골동품, 고서, 희귀 직물, 시계, 유리 제품, 조명, 조각품 등 다양한 미술 분야를 두루 포함한다.

박람회에 전시판매되는 이들 고미술품들은 사전 감정을 통과한 진품들로서, 제작 년도, 양식, 보존 상태 등등에 따라 최하 영화 1백 파운드(우리돈 약 20여만원)짜리 소품에서 최고 50만 파운드(우리돈 약 10억여 만원)에 이르는 초고가 품목에 이르기까지 취향과 예산 사정에 따라 관람객들이 선택할 수 있는 제품별 가격대는 폭넓고 다양하다.

국제 미술 시장의 중심지인 뉴욕과 런던에서 유수의 경매 시장들이 매년 시시철철 경매 시장에 토해내는 경매 미술품들은 그칠줄 모르고 미술품과 골동품 애호가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일반인들과 전문 미술품 수집가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가 높아서 최고가 매매 가격을 구가하는 인상주의 미술과 20세기 미술을 비롯해서 요즘에 들어서는 생존하는 인기 현대 미술가들의 최근작들까지 매우 비싼 가격에 불티나듯 팔려나가는 현상을 보이고 있어서 미술품 경매 시장은 부진한 국제 경제 상황에도 아랑곳 않고 지속적인 호황을 누리고 있다는 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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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보니 흑목, 야자수 등 열대산 목재를 혼합해 제작한 휘귀 자마이카 테이블로 19세기에 만들어졌다. 전시상: Nadin & Macintosh.

그런 가운데에서도 골동품 (antiques)과 장식 미술품 (decorative arts)은 미술 경매 시장에서 또 빼놓을 수 없는 미술품 분야인데, 특히 이 분야는 일시적인 미술 시장의 유행을 쫏는 구매자들이나 미술투자가들  보다는 골동 미술품에 대한 꾸준한 관심과 수집활동을 하는 안정된 계층의 고정 컬렉터들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런던과 뉴욕 외에도 전세계 대도시마다 지사를 두고 미술품 매매 시장을 구가하고 있는 소더비 (Sotheby’s)나 크리스티 (Christie’s) 같은 간판급 미술품 경매회사들 외에도 런던의 필립스 드 퓌리 & 룩셈부르크 (Phillips de Pury & Luxembourg) , 본햄스 (Bonhams), 본햄스 앤 버터필즈 (Bonhams & Butterfields), 뉴욕의 스완 갤러리 옥셔니어 (Swann Gallery Auctioneer), 미국 뉴잉글랜드 지역 메사츄세스의 스키너 (Skinner), 오스트리아의 도로테움 (Dorotheum), 스위스 제네바의 콜러 옥션하우스 (Koller Auction House), 그리고 영국치펜데일 (Chippendale) 등은 고미술품과 골동품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꼭 기억해 둘만한 구미권 미술 경매 시장계界의 주요 옥션 하우스 (art auction house) 이름이다. 미술품 옥션 하우스는 미술품 전문가들과 경험있는 감정사들의 감정을 거친(vetted) 후에 경매에 들어가기 때문에 작품의 진위(眞僞) 여부를 걱정할 필요 없이 진지한 미술품 컬렉팅을 하고자 하는 구매자들이 믿고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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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호가니목으로 된 베르제르 팔걸이 의자. 19세기 중엽 작품. 전시상: Patrick Sandberg Antiques.

고미술품과 골동품들이 컬렉터를 만나고 제주인을 찾아갈 수 있는 기회는 미술품 경매 시장이 주도하는 경매실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근현대 순수 미술이 거래되는 오늘날에 와서도 만들어진지 몇 백년이 된 오래된 미술품과 골동품이 전시거래되며 여러 주인들의 손을 거쳐가는 그곳은 바로 박람회이다.

미술 박람회 일정이 실린 년간 미술 달력을 훑어보자면 한해 열두달은 아주 굵직한 국제급 혹은 국가별 대표급에 상당하는 미술 박람회 행사들만 120곳이 훌쩍 넘는데 그 가운데 절반 가량 이상은 고미술품과 골동품을 취급하는 앤티크 박람회라는 사실은 적잖이 놀랍다.

박람회들도 특히 미술품 경매 문화가 일찌기 자리잡은 유럽과 미국 여러 주요 도시들에서 개최되는 박람회들은 특정 미술품을 꾸준히 찾고 있는 전문 컬렉터들과 박물관 관계자들, 골동 미술품을 좋아하고 수집하기 좋아하는 아마츄어 컬렉터들, 그리고 고미술품을 일상생활 속에서 향유하고 싶어하는 일반 관람객과 구매자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품격있는 미술품 거래장이다.

아름답고 고풍스러운 고미술품과 골동품이 한 자리에 모이는 장소라는 점에서 보면 올림피아 고미술품 박람회는 신고(新古)의 전시참여자들과 미술품들의 집합소이기도 하다. 매년 이 행사를 참여해 온 단골 전시참가자 에드워드 허스트 (Edward Hurst)가 선보인 조지 3세 양식의 높이 3미터의 마호가니목 집무용 서랍장은 이번 전시에 출품된 가구 품목중 하일라이트로 꼽혔다.

그런가 하면 리쳐드 프레데릭스 (Richard Fredericks)가 선보인 베르제르 도서관용 의자는 19세기 중엽에 토마스 치펜데일 2세가 운영하던 런던 목가구 공방에서 제작된 명품 의자이다. 마호가니목으로 제작된 이 의자는 당시 영국에서 유행하던 길로우스 가구풍과 프랑스 나폴레온 제국주의 양식을 교묘하게 혼합한 세부묘사가 특징적이라고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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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를 활짝 펴고 있는 풍뎅이 모양을 한 이집트 복고 양식의 은 브로치. 전시상: Borsdorf.

비록 전문가들 사이에서나 알려져 있는 미술사 뒤안길의 주인공들의 이름일지언정 회화와 조각 분야에서도 과거 유럽의 문화와 생활상을 엿볼수 있는 흥미로운 주제를 뛰어난 손재주로 묘사한 화가와 조각가들의 작품들이 방문객들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우수한 드로잉 작품을 전문적으로 수집하여 거래하는 릴리앤 프레데릭스 (Liliane Fredericks)는 프렌치 로코코풍의 달콤하면서도 낭만적인 목가풍 여인상과 풍경이 담긴 그림을 선보였다.

한편 19세기 런던에서 큰 인기를 끌면서 작업했던 영국 출신의 풍경화가 시드니 리쳐드 퍼시 (Sidney Richard Percy)는 그 특유의 템즈강 물풍경으로 지금도 전세계 미술품 경매장에서 높은 가격으로 거래되고 있는 화가중 한 사람이 되었다. 그런가 하면 베번 파이 아트 (Bevan Fine Art)는 20세기초 독일 출신 조각가였던 길베르트 베이스 (Gilbert Bayes)의 기마상 조각품들과 독일 여류 조각가였던 크리스타 빈즐뢰 (Winsloe)의 페미니즘적 성향 강한 유겐스틸 양식의 삽화집을 판매대에 내 놓았다.

자기를 박아 넣어 만든 프랑스제 오페라 관람용 이안 망원경. 전시상: Alexandra Alfandary.

자기를 박아 넣어 만든 프랑스제 오페라 관람용 이안 망원경. 전시상: Alexandra Alfandary.

고풍스러운 가정 실내 공간을 장식하는데 관심이 많은 관람객들이 눈여겨 보는 아이템들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장신구들일 것이다. 올해에는 보즈도르프 (Borsdorf)와 리히트 & 모리슨 (Licht & Morrison)이 나란히 약속이나 한듯 아르데코 양식의 악세서리를 소개했다.

보르스도르프 딜러는 1920년대 아르데코가 한창 유행하던 시기에 널리 활용되던 고대 이집트 복고주의풍으로 풍뎅이 형상을 한 은제  브로치를, 그리고 리히트 & 모리슨은 플래티넘과 금 모지에 루비와 다이아몬드를 박아 넣어 제작한 크리스마스 트리 장식용 핀은 색다르면서도 우아한 크리스마스 선물을 찾는 관람객들에게 안성마춤으로 보인다.

품목별 혹은 주제별 수집품을 좋아하는 수집애호가들은 스미스 & 로빈슨 (Smith & Robinson)이 선보인 체코식 아르데코 양식으로 디자인되어 유리와 남옥을 소재로 삼아서 손으로 직접 깍아 만든 유리병 시리즈, 롤스로이즈 엠블레을 따서 만든 술병 및 술잔 세트 일체, 그리고 자개를 박아 넣어 만든 오페라 관람용 프랑스제 망원경 등을 보고 발걸음을 떼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winter_fair_odyssey_stand-cropped_sm고미술 전문가나 골동 애호가가 아니더라도 가을에서 겨울로 접어드는 11월 초겨울 날씨 속에서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내년 2005년에 또다시 런던 중심부 해머스미스 스트리트 가(街)를 찾아가볼 이유는 있다.

전세계 명품 가구, 티파니의 스타일시한 장신구와 악세서리, 고급 백화점들이 선사하는 테이블웨어가 더 이상 나만이 독점할 수 있는 유일한 명품이 아니라면, 숨은 역사와 사연을 담은채 세상에 복사판 없이 홀로 남아 전해지는 고미술품과 골동품에서 풍겨나오는 유일무의의 품격은 그야말로 색다른 소유의 경험이 되어 줄 것이다.

지금까지도 유럽의 수많은 골동상들이 먼지와 세월에 아득해진 골동품들을 사모으로 경매소들이 앞다투어 희귀 고미술품을 발굴하며 미술 시장으로 유입하는데 애쓰는 것도 바로 고미술품과 골동품 수집 삼매경에 푹빠져 사는 수집가들이 있기 때문이다.

* 이 글은 본래 『오뜨 (HAUTE)』 지 2004년 12월호 아트뉴스 컬럼에 실렸던 글을 다시 게재하는 것임을 밝혀둡니다.

디자인이란 의미있는 질서를 부여하기 위한 의식적인 노력이다.

DESIGN FOR THE REAL WORLD

빅터 파파넥의 『진정한 세상을 위한 디자인』 중에서
1968년에 『포춘』 誌는 산업 디자인 직종의 종말을 예언하는 기사를 게재했다. 예상했던 대로 디자이너들은 경멸과 공포로 반응했다. 그러나 나는 『포춘』 지가 제기한 핵심 주장들이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이제까지 알고 있는 그런 식의 산업 디자인은 이제 그만 사라져야할 때가 되었다. 디자인이 쓰잘데기 없는 „성인용 장난감“, 번쩍이는 날개가 달린 살인 무기, 그리고 타이프라이터, 토스터기, 전화기, 컴퓨터에 덧다는 „보기 좋은“ 가리개나  조작해 내는 일에 종사하고 있는 한, 산업 디자인은 존재할 이유를 모조리 상실한 것이나 다름없다.
디자인은 인간의 징정한 요구에 반응할 수 있는 혁신적이고 고도로 창의적이며 상호학제적인 도구이어야만 한다. 디자인은 보다 연구지향적이어야만 하고, 우리는 저급하게 디자인된 물건들과 구조물들로 지구를 더럽히는 일을 그만두어야만 한다.
[…]
인간이라면 누구나가 디자이너다. 우리가 항상 하는 일은 모두 디자인이다. 디자인이란 모든 인간 활동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어떤 기대하고 예측가능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계획하고 패턴화하는 행위는 디자인 과정에 포함된다. 디자인을 그 자체로 독립적인 것으로 규정하려고 시도한다 함은 인간 생활의 근본적인 기초로서 디자인의 내재적인 가치에  거스르려 드는 것과 같다. 서사시를 짓고, 벽화를 그리고, 걸작 그림을 창조하며, 협주곡을 작곡하는 것은 디자인이다. 그러나 또한 책상 서랍을 청소하고 재정돈하고, 매복치를 뽑아 내고, 사과 파이를 굽고, 뒷뜰 야구 시합에서 응원할 팀을 결정하며, 아이를 교육시키는 것도 디자인이다.
디자인이란 의미있는 질서를 부여하기 위한 의식적인 노력이다.

papanek_coverExcerpts from Design for the Real World by Victor Papanek
In February of 1968, Fortune magazine published an article that foretold the end of the industrial design profession. Predictably, designers reacted with scorn and alarm. But I feel that the main arguments of the Fortune article are valid. It is about time that industrial design, as we have come to know it, should cease to exist. As long as design concerns itself with confecting trivial “toys for adults,” killing machines with gleaming tailfins, and “sexed-up” shrouds for typewriters, toasters, telephones, and computers, it has lost all reason to exist.
Design must be an innovative, highly creative, cross-disciplinary tool responsive to the true needs of men. It must be more research-oriented, and we must stop defiling the earth itself with poorly-designed objects and structures.
[…]
All men are designers. All that we do, all the time, is design, for design is basic to all human activity. The planning and patterning of any act towards a desired, foreseeable end constitutes the design process. Any attempt to separate design, to make it a thing-by-itself, works counter to the inherent value of design as the primary underlying matrix of life. Design is composing an epic poem, executing a mural, painting a masterpiece, writing a concerto. But design is also cleaning and reorganizing a desk drawer, pulling an impacted tooth, baking an apple pie, choosing sides for a back-lot baseball game, and educating a child.
Design is the conscious effort to impose meaningful order.

단어 및 어구 해설
foretold foretell의 과거형. foretell은 미리 예견하다, 예지하다, 예측하다라는 뜻. 라틴어 어원에서 유래된 fore는 시간이나 공간적으로 앞, 전(前)을 의미하며, tell은 판단하다, 말하다라는 의미
end 끝, 종말
industrial design 산업 디자인
profession 직종, 직종 by ~ 직업으로 (예) He is a designer by profession. 그의 직업은 디자이너이다.
react 반응하다, 반항하다
scorn 경멸, 멸시 = contempt
alarm 놀람, 공포, 겁, 불안, 경각
argument 논지, 논의, 주장, 논증    argue 논쟁하다
valid 정당한, 타당한, 근거가 있는, 설득력 있는
as long as ~하는 한
concern oneself with   ~하는데 열중하다, ~에 종사하다
confect 제조하다, 만들어 내다, 조작하다. 특히 제과 제빵 만드는 일에 사용되는 단어. 제과점 혹은 제과업은 confectionery
trivial 하찮은, 사소한, 진부한, 평범하고 속된
gleaming (다소 속된 느낌이 강하게) 번쩍이는, 윤이 번들번들한
tailfin 문자 그대로 풀자면 꼬리 지느러미라는 뜻이 되는데 번쩍 들린 날개 같은 장식물 정도로 해석하면 되겠다
sexed-up 성적 매력을 한껏 담은, 즉 ‘매력적으로 보이도록 잔뜩 꾸민’ 이라는 뜻으로 풀면 되겠다. 시각 예술 분야에서 흔히 어떤 것이 ‘섹시 sexy’하다고 표현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성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기 보다는 ‘매우 매력적인’ 혹은 ‘많은 관심을 끄는’이라는 의미로 보는게 옳다.
shroud 천조각, 허접스런 장식물
reason to exist 존재할 이유, 존재 이유. 흔히 같은 의미의 프랑스어 표현인 raison d’être를 대신 사용할 수 있다
cross-multidisciplinary 상호 학제적인
tool 툴, 도구, 수단
responsive 민간하게 반응하는, 이해가 빠른
research-oriented 연구 지향적인 = flexible 융통성 있는
defile 더럽히다, 불결하게 하다
human activity 인간 활동
planning 계획하기, 기획하기
patterning 양식 또는 패턴을 만들다, 모방 및 정돈하다
end = 목적 (purpose), 목표 (goal), 결과 (result)
constitute 구성하다, 구성 요소가 되다
design process 디자인 과정, 디자인 프로세스
thing-by-itself 그 자체로서의 것, 홀로 독립적인 것
work counter to  ~에 역으로 작용하다, ~의 순리를 거스르다
inherent 내재적인, 고유의, 타고난
underlying 밑바탕에 깔려 있는, 기본적인, 근본적인
matrix 기반, 모체
compose a poem 한 편의 시를 짓다
execute 실행하다, 실행에 옮기다
mural 벽화
masterpiece (미술, 음악 등 여러 예술 분야에서 이룩된) 걸작, 명작
concerto 콘체르토, 협주곡. compose a concerto = 협주곡을 쓰다
impacted tooth 매복치
choose sides (한쪽에) 편을 들다, 편을 들 쪽을 정하다. be on one’s side = 누구의 편을 들다, 누구의 편에 서다
conscious effort 의식적인 노력
impose order 질서를 부여하다, 질서를 가하다

빅터 파파넥 (Victor Papanek, 1927년 태생 -1998년 사망)은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나고 영국에서 성장해서 미국에서 디자인과 건축을 공부한 후 미국, 카나다, 엔마크, 스웨덴, 영국 등지의 대학에서 디자인을 가르쳤던 교육자였음과 동시에 유엔 교육부, 유네스코, 세계 보건 기구 같은 국제 기구를 통해서 자연친화적 디자인의 실천을 전파한 사회운동가 였다. 이 글을 발췌한 그의 저서 『진정한 세상을 위한 디자인 : 인간 생태학과 사회 변혁 (Design for the Real World : Human Ecology and Social Change)』은 1971년 처음 출간된 이래 현재까지 20개가 넘는 언어로 번역되어 환경 문제와 디자인에 관심있는 전세계 독자들에게 읽혀오고 있다. 영국 건축가 디자이너 벅민스터펄러 (Buckminster Fuller), 미국의 녹색당 정치가 랄프 네이더 (Ralph Nader), 그리고 환경운동가 레이첼 카슨 (Rachel Carson) 등의 주장과 이론에 기초해 쓰여진 이 책에서 저자 파파넥은 산업 디자인에 종사하는 산업 디자이너들은 불필요하고 위험하며 환경적으로 해로운 디자인 제품을 생산함으로써 자연 환경과 천연 자원을 낭비하고 있다고 경고한다.

일리카페로부터 배우는 커피 마케팅

ILLYCAFFÈ ILLYMIND

ILLY_CUP_05_2-300x216라이프스타일 무브먼트에서 시작한다 일리카페 (Illycaffè)는 바릴라, 안티노리 파스타 등과 더불어 이탈리아 식음료 산업계를 대표하는 브랜드이자  이탈리아 식음료 문화를 전세계적인 식음료 문화로 전파하는 글로컬 브랜드(Glocal Brand)의 대명사. 미국식 패스트푸드 문화와 일반 대중 소비자를 겨냥한 많은 식음료 브랜드들과는 대조를 이루면서 일리카페는 „슬로우푸드(Slow Food)“ 운동 – 이탈리아에서 성공을 거두고 있는 여유있는 고급 음식즐기기 문화을 전파하는 마케팅 전략이자 식품 브랜드의 하나다. Continue reading

북구 유럽에 동튼 근대의 새벽

핀란드의 20세기 모더니즘 미술

NORDIC DAWN Modernism’s Awakening in Finland, 1890-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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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셀리 갈렌-칼렐라 <봄> 1900년 경 작. 오스트리아 빈 국립 벨베데레 갤러리 소장.

핀란드의 민족 정신을 일깨워준 불씨 – 모더니즘 미술
서양 미술을 거론할 때마다 20세기초 유럽의 모더니즘 미술 운동을 빠지는 일은 없다. 특히 프랑스 파리를 중심으로 하여 독일, 이탈리아, 네덜란드, 벨기에, 오스트리아, 심지어는 동유럽의 여러 대도시들에서 20세기 전후 시기에 가뭄 끝에 산불 붙듯 번진 모더니즘 예술 운동은 학계에서는 물론 일반 문화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더이상의 설명이 필요가 없을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핀란드의 모더니즘에 대하여 들어본 적이 있는가? 20세기 모더니즘 운동이란 종주국인 유럽에서는 물론이고 저멀리 미국, 일본 등에까지 전해졌던 전지국적 국제 예술 운동이었던 만큼 유럽 대륙에 속해 있던 핀란드에서도 모더니즘이 능히 발생과 전개를 경험했을 것이라고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하지만 핀란드의 독특한 지리적 위치와 역사를 알고 나면 핀란드의 모더니즘은 유럽 중심부의 주류 모더니즘 운동과는 색다른 발생 배경과 전개 양상을 발견하게 된다.

광활한 자연과 신비한 구술 전설의 나라라는 전형화된 이미지로 알려져 있는 나라 핀란드에 대해서 일반인들의 지식은 대체로 표면적이다. 하물며 우리나라 일반인들에게 뿐만 아니라 유럽 대륙에서도 일반인들이 핀란드의 미술에 대해서 알고 있는 바는 더우기 널리 알려진 것이 많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오스트리아 국립 벨베데레 갤러리 (Österreiche  National Galerie Belvedere)에서는 『북구 유럽의 새벽 –모더니즘에 눈뜬 1890-1920년기 핀란드 (Nordic Dawn – Modernism’s Awakening in Finland 1890-1920)』 展을 올 초여름인 [2005년] 6월 15일부터 전시로 부치고 있다.

모더니즘 미술이라는 역사적으로 중요하고 육중한 미술사 연구 분야에서도 핀란드의 모더니즘 미술이라는 분야는 자타가 인정하듯 여전히 많은 연구가 채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널리 대중화되어 있지도 않은 미개척 영역으로 남아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 한편으로 항상 새로운 전시 주제와 미술 시장 개척에 혈안이 되어 있는 서구 미술계에서 핀란드의 모더니즘 미술을 향한 새로운 관심은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를 일이다.

이번 빈 국립 벨베데레 갤러리에서는 무려 100점이 넘은 근대기 핀란드의 미술 작품들을 대거 한자리에 모아서 보여주고 있어서 대중화된 유명 거장 미술품들이 전세게 대도시들을 번가아 돌며 남발되는 대형 블록버스트식 빅네임 미술 전시회들의 홍수 속에서 한줄기 신선한 소나기 같은 색다른 미술 감상의 기회를 마련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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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카 할로넨 <얼음 붙은 강가에서 빨래하는 여인> 1990년 작. 헬싱키 아테네움 미술관 소장.

유럽 대륙 최북단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스웨덴과 러시아의 사이에 광활한 숲과 청명한 호수의 나라 핀란드. 자연 조건 면에서, 북극 랩랜드 기후를 지닌 핀란드는 우리나라 남북한을 합쳐서 21배가 넘는 크기인 30만 평방 킬로 미터에 이르지만 전체 인구는 5십만명 밖에 안되어 유럽에서 이웃나라 스웨덴과 아이슬랜드를 뒤이어 가장 인구밀도가 낮은 나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좀 더 안을 들여다 보면 핀란드는 이 나라 국민들이 어딜가나 가장 큰 자랑거리로 여기는 천재 건축가 겸 디자이너 알바 아알토 (Alvar Aalto)가 수도 헬싱키 안팎을 특유의 단순간결한 근대 미학으로 수놓은 나라이며, 전세계를 통틀어서 그 우수성을 자랑하는 공공 교육 제도와 사회보장 복지 제도를 이룩한 민주국가이기도 하다.

20세기 근대미술, 핀란드의 정치적 독립의 기폭제
이번 전시 『북구 유럽의 새벽 – 모더니즘에 눈뜬 1890-1920년기 핀란드』 전에서 유독 주시하고 있는 촛점은 바로 핀란드의 모더니즘의 탄생과 추진력의 배경은 19-20세기 전환기 핀란드에 불어닥친 핀란드판 민족주의다. 그리고  ‚핀란드식 민족주의 정서’를 규명하고 그것이 핀란드의 미술을 포함하여 건축, 문학, 음악 등과 같은 여타 예술 영역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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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렌 테슬레프 <메아리> 1890-1891년 작. 개인 소장품.

어느 나라 국민이나 정치가들이 봐도 한 번쯤은 시샘의 눈초리를 주기에 충분할 만큼 잘 사는 나라 이 핀란드도 실은 과거 그다지 평탄치 만은 않은 역사를 헤쳐왔다. 12세기 중세시대 핀란드 대륙에 진입해 온 스웨덴 제국으로부터 7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지배를 받아오다가 1809년부터 1917년 독립국가로서 독립을 하기까지 약 100년 가까이 러시아 절대주의 짜르 황실의 지배 하에 억눌려 있던 핀란드에서 근대기에 본격적으로 불거져 나온 민족주의 운동은 핀란드인들에게 새로운 국민적 정체성과 자주 의식을 심어주는데 기폭제 역할을 했다.

문화는 정치적인 목적을 달성하는데 더없이 효과적인 수단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예는 바로 핀란드의 근대사가 잘 입증해 주고 있다. 이에 자극을 받은 핀란드인들은 이제까지도 공식언어던 스웨덴어 외에도 핀란드어를 공식 행정 언어로 지정해 사용하기 시작했다.

19세기 초엽, 스웨덴 제국의 지배력이 점차 약화되는 조짐이 보이자 핀란드인들은 1827년 수도 대화재 사건을 계기로 투르쿠 (Turku)에서 헬싱키 (Helsinki)로 수도를 이전하고 핀란드 고유의 예술, 과학, 교육 체제를 구축하기 시작했는데, 핀란드가 자랑하는 국립 대학 및 과학 예술 학회들도 바로 이 시기에 설립된 것들이었다. 1809년 스웨덴 제국의 퇴각 이후 스웨덴 제국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관대적인 정책을 폈던 러시아 제정 하에서 핀란드의 독립을 위한 채비를 서서히 갖춰나가기 시작했다.

스웨덴과 러시아 제정의 지배하에서 설움 받던 유럽 북쪽의 주변국가 핀란드는 어느새 미술, 건축, 문학, 음악을 매개 삼아서 유럽 대륙 중심부로 그 정체성을 알려나가기 시작했다. 특히  핀란드 시인 엘리아스 뢴로트 (Elias Löhnnrot, 1802-1884)이 지은 핀란드 민족 서사시 『칼레발라 (Kalevala)』는 그동안 스웨덴 지배와 언어 속에서 무참하게 파괴되고 상실된 핀란드 고유 전통과 언어에 대한 국민들의 감성을 회복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핀란드 근대 사의 문을 활짝 열은 것으로 유명하다.

1935년에 출판된 『칼레발라』는 핀란드 민족들이 오랜 세월 간직해 오던 신화적 구술 서사시 형식을 빌어 핀란드 언어에 대한 국민들의 감수성을 흠뻑 적시는데 적중했다. 당시 핀란드를 가장 전형적으로 대표한 화가로 이름을 널리 알렸던 민족주의 화가 악셀린 갈렌-칼렐라 (Akseli Gallen-Kallela, 1865-1931)는 1900년도 파리에서 열린 세계박람회에서 『칼레발라』에서 묘사된 장면들을 민족적 상징들로 재해석하여 핀란드 전시장을 장식적인 프레스코화로 꾸몄는데, 이렇게 해서 연출된 그의 독특한 핀란드적인 미학과 정서는 당시 파리의 언론과 문화애호가들의 관심을 주목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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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셀리 갈렌-칼렐라 <심포지움> 1894년 작. 개인 소장품.

핀란드판 민족주의 정서의 표본 칼레발라 서사시 어느 나라나 그 나라 국민들의 영혼의 주축이 되어 주며 세월을 초월해 심금을 울리는 전통 서사시 한 편 쯤은 갖고 있는 법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의 호머 이야기 『일레아드』와 『오디세이』, 고대 메소포타미아인들의 영웅 서사시 『길가메시』, 고대 인도의 『라마야나』, 그리고 중세 독일 의 『니벨룽겐』 등이 그런 예들 일텐데, 뢴로트가 집결했다 하는 『칼레발라』 서사시도 핀란드 전통적인 민간 구전 서사시를 처음으로 문자로 기록화한 민족적 역작이다.

민족 서사시가 흔히 그렇듯이 『칼레발라』 역시 빙하 시대 말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선사시대부터 거슬러 올라가서 신비로운 천지창조설, 흥미진진한 영웅들의 무용담, 기상천외한 주술사과 마법사들의 기담들을 잔뜩 담고 있는데, 이 서사시 속 이야기를 통해서 핀란드들을 강제적으로 기독교로  개종시킨 스웨덴 제국에 맞서 정신적 영혼적 독립을 선언하도록 부추기는데 기여하게 된다.

19세기까지만 해도 스웨덴 문화와 전통에서 갈피를 못잡고 있던 핀란드인들은 『칼레발라』 서사시를 통해서 민족주의적 감성을 주축으로 한 새로운 예술적 영감에 부풀기 시작했다. 요한 루드비히 루네베르크 (Johan Ludvig Runeberg, 1804-1877)는 핀란드의 농경상과 아름다운 자연을 시로 묘사하여 19세기 핀란드가 자랑하는 민족 시인이 되어서 그의 시 『엔사인 스탈Ensigh Stal)』의 일부는 이후 핀란드 국가國歌 가사로 쓰일 정도가 되었다.

또 알렉시스 키비 (Aleksis Kivi), 아르빗 예르네펠트 (Arvid Järnefelt(1863-1937), 민나 칸트 (Minna Canth), 유하니 아호 (Juhani Aho) 등은 지금도 핀란드 문학사에 길이 남아 있는 문학가들로 인정받고 있다. 20세기에 접어들자 핀란드 문학은 핀란드 특유의 서정적 감성에 호소하는 상징주의와 신낭만주의풍의 서정시로 회귀했는데, 그 결과 핀란드는 일찌기 프란스 에에밀 실란패애 (Frans Eemil Sillanpää) 같은 노벨문학상 수상 소설가를 배출하는 쾌거를 일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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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트 에델펠트 『카우콜라 물가의 저녁 노을』 1889-1990년 작. 헬싱키 아테네움 미술관 소장.

본래 민간인들 사이에서 『칼레발라』는 노래 형식으로 구전되어 왔다고 한다. 핀란드에서는 대륙권 중부 유럽에 비해서 세련된 음악 문화가 발전할 수 있는 토양이 마련되지 못했으나 적어도 『칼레발라』의 유행을 계기로 하여 핀란드의 민족주의적 감성이 표현된 신음악이 새롭게 개척되었다.

우리의 귀에도 낯설지 않은 핀란드 출신의 근대 고전음악 작곡가 쟝 시벨리우스 (Jean Sebelius, 1865-1957)는 핀란드가 낳은 가장 위대하고 유명한 근대 작곡가일 것이다. 이른바 ‚교향시 (symphonic poem)’라고도 불리는 시벨리우스의 웅장한 음악 세계는 1890-91년 동안 잠시나마 음악의 도시 빈에서 체류하면서 경험한 교향악과 전통 핀란드 음악에서 받은 시적 감성의 혼연일체였다.

20세기 근대기 핀란드 미술의 조형 언어 – 민족적 서정과 사회비판적 통찰
핀란드의 근대 미술이 탄생한 시기는 1980년경 즉, 이번 『북구 유럽의 새벽』 전이 설정하고 있는 핀란드의 모더니즘기가 시작될 즈음이 되겠다. 그 이전부터 알베르트 에델펠트 (Albert Edelfelt, 1854-1905) 같이 18세기 프랑스 아카데미 화풍과 야광파 화풍을 결합한 사실주의 회화를 그리는 화가들이 있었지만 미술을 표현의 수단으로 삼아 작업하는 화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전후에 들어서 부터 본격화 되었다.

핀란드는 지리적으로 유럽 대륙의 주변부에 밀려 있다는 자괴감을 느끼고 있었지만 미술가들은 파리, 뮌헨, 생페터스부르크 등 유럽의 미술 중심 도시를 방문하면서 당시 유행하던 근대 아방가르드 미술을 직접 호흡하고 실험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19세기말 프랑스에서 유행하던 파스텔조의 아련한 인상주의 풍경화풍을 비롯해서 상징주의 (Symbolism), 폴 고갱 풍의 종합주의 (Synthetism), 그리고 보다 강렬한 색채적 실험성이 돋보이는 야수주의 (Fauvism)와 인상주의에 영향을 준 점묘주의 (Pointilism)에 이르기까지 핀란드 화가들의 실험 정신은 폭넚게 발휘되었다.

예컨대 마그누스 엔켈 (Magnus Enckel, 1870-1925)은 인간의 성애(性愛)를, 후고 심베르크 (Hugo Simberg, 1873-1817)는 핀란드 전통 민담과 사적인 내면 세계라는 매우 개인적이고 은밀한 주제를 상징주의 풍경화로 표현했고, 베르너 토메 (Verner Thomé)와 알프레드 윌리엄 핀치 (Alfred William Finch)는 별다른 이념이나 상징을 내포하지 않은 화사하고 온화한 색채가 지배적인 인상주의풍 순수 풍경화를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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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너 토메 <해수욕하는 소년들> 1910년 작. 헬싱키 아테네움 미술관 호빙 컬렉션 소장.

그러나 20세기가 본격화 되자 핀란드 화가들을 예외없이 사로잡은 화두는 뭐니뭐니 해도  ‚민족주의적 감수성’이었을 것이다.

근대에 접어들자 산업의 발전과 도시의 확장 등과 같은 근대적인 환경 변화가 급속히 전개되면서부터 화가들은 급격히 주변에서 눈에 띄는 물리적 사회적 변화를 그림으로 포착해 내기 시작한 것이었다.

자연 속에 파묻혀 노동에 육체 노동에 전념하는 광부나 나뭇꾼의 초상화 외에도 도시 광경, 산업 지대의 공장 건물과 노동자들의 모습, 무역 항구의 모습이 보이는 수경 풍경 등을 통해서 근대 시대가 잉태하는 사회적 변화상과 그에 따른 부조리를 지적하는 그림들이 속속 등장하였다.

전설적인 핀란드 출신 화가 악셀리 갈렌-칼렐라를 위시로하여 19-20세기 이행기 근대 핀란드의 미술계를 이끌던 화가들은 급변하는 나라의 모습을 재빨리 포착하여 풍경화와 초상화 같은 전통적인 쟝르로 화폭에 담아내는 일에 특히 몰두하였다. 악셀리 갈렌-칼렐라의 절친한 동료이자 19세기말 핀란드 사실주의 회화 운동의 주축적인 인물이던 에에로 예르네펠트는 고국의 산천을 구석구석 여행하면서 아름다운 가을철 산하 풍경을 멜랑콜리한 분위기로 그려내는데에 능했던 화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개인적인 출신 배경 면으로 보나 미술 세계로 보나 핀란드 근대화가들 중에서 가장 핀란드인 답다고 평가되고 있는 화가 유호 리사넨 (Juho Rissanen, 1873-1950)은 노동가 가정 출신답게 시골의 척박한 생활상, 빈곤, 춥고 예측하기 어려운 겨울철 기후와 그 속에서 싸우는 농민들의 모습을 화가가 직접 어린시절 겪은 고통스러운 기억과 한데 버무려 그림으로 그렸다. 역시 근대시대 핀란드인들의 척박한 일상 생활을 화폭으로 옮기되 보다 화려한 색채와 긍정적인 분위기로 그림 속 주인공들을 묘사한 티코 살리넨 (Tyko Sallinen)의 화풍은 한결 표현주의적인 냄새가 강하게 풍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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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셀리 갈렌-칼렐라 <쿨러보스의 저주> 1899년 작. 헬싱키 아테네움 미술관 안텔 컬렉션 소장.

전세계에서 가장 일찌기 여성의 투표권이 실행된 남녀평등국가 핀란드에서는 이미 19세기 말부터 핀란드 국립 미술 아카데미에서 정식 미술 교육을 받고 직업적인 화가로 활동한 여류 화가들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당시만해도 유럽권에서는 대체로 미술에 대한 남성에 못지 않은 열정과 재능에도 불구하고 정식 미술 학교에서의 교육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서 취미로 그림을 그리거나 아텔리에 조수로서 미술사의 뒤안길에서 서성이다가 간 여러 여성 미술가들이 많았다는 사실과 견주어 볼 때 분명 핀란드의 여성 화가들은 분명 상대적으로 운이 좋았다.

엘렌 테슬레프 (Ellen Theleff, 1869-1954)는 핀란드 미술 학회에서 정식 미술 수업을 마친 후에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여행하면서 색채와 형태의 오묘한 환상 세계가 담긴 회화 세계를 개척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런가 하면 헬레네 셰르프벡 (Helene Schjerfbeck, 1862-1946)은 이루 설명하기 어려운 부동(不動)의 정적감과 잔잔함으로 관객들을 사로잡는 묘한 매력을 풍기는 그림들이 특징적이다. 고관절 부상으로 평생 제대로 걷지 못하는 불구의 몸으로 작품 활동을 했던 이유 때문인지 지칠줄 모르는 그림그리기와 후학 배출이라는 활발한 경력을 누렸으면서도 셰르프벡의 그림 속에는 언제나 멜랑콜리한 실내 광경, 인간의 나약함과 노화에 무방비로 노출된 여성의 나약함, 죽음을 예견하는 듯한 비탄이 여지없이 스며 나온다.

핀란드의 모더니즘 미술은 있었는가? 물론이다. 핀란드의 모더니즘 미술은 유럽 대륙권과는 다른 ‚핀란드의 전통 문화와 민족적 정서’를 되살려 핀란드적 정체성을 규명하는데 견인차 역할을 한 정치적인 예술 운동이었다. 이 전시는 빈 국립 벨베데레 갤러리에서 10월2일까지 계속되며, 곧 이어서 네덜란드의 헤이그의 게메엔테무제움 (Gemeentemuseum in Den Haag)으로 옮겨져서 순회전시를 계속할 예정이다. Photos courtesy : Österreiche National Galerie Belvedere Wien.

미술품 소장에서 디자인 작품 소장의 시대로

COLLECTING DESIGN

구미 선진국에서는 디자인 소장 붐 (boom)이 번지기 시작하면서 유명 디자인 제품의 가격 인상을 부추겨 투자적 소장가치를 높이고 있다. 지난 4-5년 동안 뜨겁게 달아 올랐던 미술품 컬렉팅이 점차 차분해지고 있는 가운데 일부 테이스트메이커들은 디자인 컬렉팅으로 관심을 전환하고 있다.

디자인은 라이프스타일을 대변하는 아이콘? 아니면 값진 투자 소장품?
디자인이란 용어는 20세기 이후 대량생산체제가 등장한 이래, 순수 미술 (fine art)에 대한 상이한 개념으로서 분류되어 온 전시대의 공예 (crafts) 혹은 장식 미술 (decorative arts)에 대한 다른 이름이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디자인은 미술관이나 미술 전문 저널에서는 흔히’ 20세기 장식 미술’이라는 별칭으로도 구분되고 있기도 하다. 디자인이 미술 작품적 가치는 지닌 소장품으로 소비자 및 미술 애호가들이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시기는 대략 지금으로부터 15여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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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스탁이 디자인한 주방 디자인 용품 쥬시 살리프 레몬즙 짜기는 1990년대를 대표하는 디자인 아이콘. Photo: Alessi.

디자인은 부와 취향의 상징?
필자가 듣기론 벌써 80년대부터 서구 유럽에서는 스타 디자이너들이 디자인한 제품들을 거실 공간이나 주방에 장식해 놓고 스스로를 첨단 라이프스타일을 영위하는 신세대임을 과시하는 젊은세대 전문직 여피들에 대한 이야기에 접하곤 했다.

프랑스의 스타 디자이너 필립 스탁이 디자인한 세련된 의자 아이템들이나 거미모양의 주방용 레몬즙 짜기 (쥬시 살리프, Juicy salif), 혹은 이탈리아의 감성 디자인 업체인 알레씨가 유명 디자이너들을 초청해 디자인 생산한 깜찍스런 주방용품 시리즈들은 바로 그같은 소위 ‚디자인에 관심많은 (design-conscious)’ 소비자들이라면 적어도 한 두점씩 사들였던 디자인 아이콘들에 속한다.

그같은 소비자들이 호스트가 되어 초대한 파티에서는 의례 새로이 각광받고 있는 디자이너들의 제품이나 관련 관심사들이 대화의 화제거리로 떠오른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예컨대 필자가 최근 본 영화 가운데 제니퍼 제이슨 리가 제작하고 연기한 『결혼기념일 파티 (The Anniversary Party)』에서도 그런 유사한 장면이 등장한다). 또, 어떤 호스트는 요즘 가장 분위기와 디자인 감각이 독특하여 유행을 끄는 레스토랑에서 파티를 열어 자신의 ‚고상한’ 취미를 과시해 보이기도 한다.

디자인 갤러리와 딜러 호황
지난 한두해 동안, 디자인하면, 고가구 및 골동품점이 주를 이루던 빈에서는 뒤늦게나마 빈 응용미술대학 미술관 뮤지움 숍 (MAK Design Shop)을 비롯해서 개인이 운영하는 전문 디자인 숍 (혹은 상업적 딜러, Engelhorn21이나 designfunktion 등))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뉴욕이나 프랑스처럼 미술 및 디자인 관련 산업이 월등히 활발한 도시에서는 이미 열 손가락이 모자랄 정도로 많은 수의 디자인 전문 숍 및 딜러들이 우후죽순 등장하여 미술 시장에 활기를 던져주고 있다고 한다.

뉴욕의 부유층들이 모여사는 어퍼 이스트 사이드 구역에만도 배리 프리드만, 미켈 사코, 라르캉센느, 데로렌쪼, 루이스 보퍼딩, 리즈 오브라이언, 메종 제라르 등과 같은 고가 디자인 제품 딜러들이 자리잡은지 오래고, 뉴욕 다운타운에 자리한 트라이베카, 소호, 노호 구역 등에서도 보다 작은 규모의 신생 디자인 딜러들이 앞다투어 등장하는 것만봐도 알 수 있다.

파리에서는 쟈크 드 보, 도리아, 바테예, 캬마르, 타쟝, 크레오 등이 특히 손꼽히는 디자인 딜러들로 알려져 있어, 제 각각 다른 시대의 장식 미술품 및 디자인 제품을 전문적으로 취급하고 있다고 한다. 디자인은 미술작품에 비해 저렴하고 덜 난해한 고가 사치품으로서 일반인들의 취향을 적절히 만족시켜 주기에 적합한 대상인 때문이기도 할 게다.

게다가 최근 전세계적 경제 침체에 따른 미술 시장에서 소더비, 크리스티, 필립 등과 같은 유명 미술 경매소들은 20세기 디자인 제품들을 경매에 부치는 것으로 매출 수익을 올리고 있다. 인터넷 상에서도 디자인 제품을 구하기란 어렵지 않다. 한창 닷컴붐과 인터넷 상거래가 호황을 누리던 90년대말부터, 미국의 온라인 경매장인 이베이(e-bay.com)가 제법 값나가는 미술품에서 값싼 개인용품에 이르기까지 인터넷 경매에 부쳐 판매해 오고 있는데, 여기서도 디자인 아이템들은 역시 소비자들이 크게 관심을 모으는 아이템들로 자리잡았다.

디자인 컬렉터들은 누구?
그렇다면 이들 디자인 제품들 사모으기에 혈안을 한 주인공들은 어떤 사람들이며 어떤 디자인 제품에 관심을 갖고 있을까? 프랑스 혹은 이탈리아제 고가 패션 감각을 추구하며 디자인에 관심이 높은 중상층의 젊은 전문직업인들이 그런 컬렉터들의 대수를 이룬다. 그리고 그들이 주로 관심을 갖고 구입하려는 아이템들은 인테리어 장식과 관련된 가구 및 장식 용품들이 주를 이룬다.

그같은 유행은 헐리우드 스타 배우들 사이에서도 널리 번진지 오래여서 마돈나, 브래드 피트, 레니 크레비츠 등이 바로 그같은 야심찬 디자인 컬렉터로 떠 오르고 있다고 알려지며, 그같은 고객들을 상대하는 각종 오피스 공간이나 병원등에는 고가의 유명 디자이너 의자며 테이블들로 즐비하게 장식되어 있곤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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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 아라드가 디자인하여 2006년에 생산판매되기 시작한 최근작품 블로 보이드 의자 시리즈 한정판으로 소량 생산되어 고급 디자인숍에서 판매되고 있다. Photo: Design Miami Basel.

전문 미술 컬렉터라기 보다는 주머니 사정이 넉넉한 일반 소비자들이 한때 잡지나 도록에서 본 적이 유명 디자이너의 의자나 램프 혹은 테이블웨어를 직접 사서 스스로의 가정에 들여 놓고 싶어하는 심리가 크게 작용하는듯 하다.

디자인 제품은 원본 1점만이 존재하는 순수 미술작품과 달리 복수로 생산되므로 수량 공급면에서 일반소비자들에게 구입 가능성이 더 열려 있는 편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덕분에 최근 디자인 작품 가격은 터무니없이 인상된 인프레이션 현상까지 보이고 있다. 예컨대 과거 약 20여년전만해서 우리돈 100만원 이하에 구입할 수 있었던 20세기 유명 디자이너作 가구 디자인 아이템들은 디자이너의 생사 여부와 생산된 수량에 따라 현재 그의 50배인 5천만원대 안팎을 호가하는 정도이다.

제품 가격 인플레이션 현상은 20세기말 제작된 작품들로 이어져서, 몇 년전만해도 소비자들은 1920년대 전후의 아르데코 컬렉션 붐을 일으켰으나, 얼마전부터는 30-40년대의 스칸디나비아의 유기적 기능주의 계열의 작품이 주목을 받기 시작했으며, 아주 최근에는 다시 50-60년대의 미국적 기능주의 계열로 관심이 옮겨가고 있다.

스탁, 멘디니, 솟사스 같은 80년대의 스타 디자이너들의 제품들(이미 상당히 비싸져 버린 상태이지만 유명 딜러들은 적어도 한두점씩 취급하고 있다) 외에도, 90년대의 디자인 아이콘 론 아라드와 마크 뉴슨같은 신세대 디자이너들의 제품들을 지금부터 하나둘 사모으기 시작한다면 그들 또한 얼마안가 수십배의 소장가치로 껑충 뛸 것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일반인들의 디자인에 대한 관심과 소장욕구 증대는 지난 한두해 다수 집중적으로 열린 대규모 미술관들의 디자인 전시회들과 언론의 부추김이 적잖이 작용했다고 보인다.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Metropolitan Museum of Art)에서는 1999년도말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20세기 디자인 예술을 4시기로 구분하여 시대별 디자인 양식을 조망하는 『한 세기의 디자인(A Century of Design) 4부작』 展과 『미국 디자인』 展 (2000년 봄 여름 전시)을 기획 전시해 왔고, 뉴욕 모마 (MoMA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의 디자인 전시와 쿠퍼휴잇 디자인 박물관의 디자인 트리에날레 (Cooper-Hewitt National Design Museum, 2000년 봄여름) 및 각종 기획 전시를 부쳐 경쟁하고 있다. 그같은 추세는 미국 서부 로스앤젤레스와 샌프란시스코에서도 마찬가지다.

최근에는 미국 동서부 대도시 말고도 그보다 중부 지역에서도 디자인관련 전시회들이 줄지어 열리고 있다. 그같은 예 가운데 하나로, 현재 가장 주목을 끌고 있는 전시로는 오하이오주의 웩스너 미술 센터와 콜로라도의 덴버 미술관에서 열리는 『1975-200년 동안의 미국 디자인』이라는 전시로 평상시 미술관을 멀리하던 관객들을 끌어들이려 애쓰고 있다. 2000년 3월에 『타임』誌는 그래서 그같은 미술관 전시 트렌드와 더불어 미국의 경제적 풍요에 따른 대중의 미에 대한 감수성 증대라고 평가하는 – 다소 심플하고 깊이감 떨어지는 – 특집 기사를 싣기도 했다.

이제 구미의 웬만한 신문 문화면을 뒤적이다보면 미술관 전시 계획표에는 디자인 전시회가 목록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도 쉽게 발견할 수 있는데다가, 지금 한창 줏가를 올리고 있는 스타 디자이너나 건축가들은 언론이나 대중들 사이에서 마치 인기 연예인과 다름없는 인기등락과 유명세를 누리곤 한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요즘의 청소년들과 젊은이들은 연예인 다음으로 디자이너가 되는 것이 장래 희망이라고 대답한다고 하지 않던가.

* 이 글은 본래 2002년3월 5일자 『디자인 정글』에 실렸던 글을 다시 게제하는 것이므로 글 내용의 일부는 최신 정보가 아닐 수 있음을 밝혀 둡니다.

스웨덴 모더니즘의 거장 브루노 마트손의 건축과 디자인

BRUNO MATHS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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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의 브루노 매트손의 작업 모습. Photo: Bruno Mathssons arkiv, Värnamo.

20세기 스웨덴이 낳은 유명한 가구 디자이너 브루노 마트손이 건축디자이너로서 다시 한 번 대중들에게 소개되어 서구 모더니즘 건축 디자인에 끼친 그의 영향력을 평가받고 있다. 50여년이라는 긴 디자인 여정 동안 마트손이 이룩했던 디자인 작업은 그가 활동하던 당시에는 항상 최첨단을 시험하는 혁신의 가도를 주도했지만 그가 세상을 뜨고 나서 더의 20년이 되어가는 지금에는 시공을 뛰넘는 모더니즘의 고전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미 1970년대에 서구 근대 디자인사에 기여한 그의 작품 세계를 기리는 뉴욕 근대미술관 (Museum of Modern Art)에서의 대대적인 회고전을 기하여 『뉴욕 타임즈』 지가 “브루노가 우리 미국인들과 함께 하기 위하여 돌아왔다!”라며 반가워했을 정도로 브루노 마트손이 그의 모국인 스웨덴에서는 물론이려니와 국제 근대 디자인계에서 차지하고 있는 중요성은 자못 의미심장하다.

북유럽 목공예 전통과 모더니즘의 혁신주의의 만남
4대째 캐비넷을 만드는 목가구공 카를 마트손 (Karl Mathsson)의 아들로 태어난 브루노 마트손 (Bruno Mathsson, * 1907년 – ✝ 1988년 )도 타고난 목공장이였다. 예로부터 목공예로 잘 알려져서 지금도 디자인 중심지로 알려져 있는 베르나모 (Värnamo)에서 태어난 그는 스웨덴 남부 지방의 자연을 벗한 나무 소재와 친숙한 스칸디나비아 지방의 목공예 전통을 어릴적부터 깊이 호흡하며 목공예에 관한 세세한 노하우와 기법을 익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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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뚜기 의자, 1931년 작품 Photo: Bruno Mathssons arkiv, Värnamo

1920년대와 1930년대 사이 기간 동안 전유럽을 뒤흔들고 있던 기능주의 모더니즘 미학에 깊이 매료된 그는 당시 구할 수 있었던 문헌들과 정간물을 탐독하며 모더니즘과 기능주의 이론을 독학으로 섭렵했다.

그렇게 해선 탄생한 브루노 마트손의 디자인 명작 제1호는 그가 1930년에 스톡홀름에서 열린 가구 박람회를 방문하고 한껏 영감을 얻어 말 안장 모양으로 디자인 한 1931년작 일명 “메뚜기 의자 (Gräshoppan)”였다.

“메뚜기 의자”는 그의 고향에 있는 베르나모 병원의 접수실 공간용 의자로 설치되었는데 그의 혁신성은 당시의 스웨덴인들의 눈에 낯설어 보인 나머지 기괴하고 흉칙스러워 보인다는 불평을 받고는 창고로 밀려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하지만 대중들의 그같은 미지근한 반응에 오히려 더 의욕을 느꼈던 그는 목재를 가열하여 굽히는 기법 (이 기법은 이웃나라인 핀란드에서 알바 알토가 이미 1920년대에 실험했다.)을 활용하여 등받이가 있는 긴 안락의자 시리즈를 계속해서 실험했다.

그 결과 1937년 파리 박람회에서 그의 작품들은 대륙권 유럽과 미국으로부터 온 관람객들의 시선을 한 몸에 사로잡게 되었고 급기야 뉴욕 근대 미술관으로부터 방문객용 의자를 디자인해 달라는 주문을 받게 되면서 본격적인 국제 디자이너로서의 명성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자연과 인공의 유기적인 융합
브루노 마트손 디자인의 핵심어는 자연과 디자인을 연결하는 인체공학적 해법, 공간적 사고, 그리고 건축이다. 모더니즘 건축가 디자이너들의 관심사가 그랬듯이 그 역시 가구, 인테리어, 건물 디자인 상의 보편적이면서도 특정한 문제점을 규명하는데 관심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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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뢰자쿨 자택의 거실 광경 (Sitting-room in Frösakull). Photo: Bruno Mathssons arkiv, Värnamo.

새로운 생활 환경, 근대적인 라이프스타일, 과학기술의 진보에 걸맞는 새로운 표현 언어를 찾기를 원했던 그는 그래서 건축 외부와 실내 공간 및 개별 가구 아이템들이 유기적으로 소통하는 총체적인 공간을 실험했다. 자연과 잘 조율되는 날렵하고 유기적인 가구 형태는 프뢰자쿨 (Frösakull)에 지은 주말 별장의 인테리어 디자인에서 잘 나타나 있다.

양차 대전과 파시즘의 대두 등 격동과 소용돌이의 근대사를 거쳐 오는 가운데 브루노 마테손은 자타가 공인하는 자랑스러운 모더니스트이자 국제주의자 (internationalist)였다. 그의 국제주의적 활동 반경은 1930년대와 1940년대에 미국에서 한창 전개되던 공공 주택 사업과 미래지향적 비젼과 관련하여 상당수 미국과 함께 이루어졌다.

특히 1940년대에 뉴욕 근대 미술관의 에드가 카우프만 큐레이터의 주선으로 아내 카린과 함께 한 기나긴 미국 여행 동안에 브루노 마트손은  전후 시대 미국 건축과 디자인의 개척자 찰스 이임즈 (Charles Eames), 나치의 예술적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온 독일 바우하우스의 설립자 발터 그로피우스 (Walter Gropius), 뉴욕의 고급 사무용 가구 생산업체 크놀 (Knoll), 그리고 미국의 거장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라이트 (Frank Lloyd Wright) 같은 건축디자인계의 거물인사들과 친분을 구축하는 행운도 맞았다.

이 여행을 계기로 마트손은 지금도 그를 그토록 유명하게 해 준 일명 “유리 주택 디자인 (Glass House)”을 탄생시키게 되었다. 실제로 마트손은 겨울이 길고 일조량이 짧은 스칸디나비아를 벗어나서 기후가 따뜻한 남유럽 포르투갈로 건너가서 유리로 된 자택을 직접 디자인하여 그곳에서 겨울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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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닐라 1 (Pernilla 1) 안락의자. 1943년 작 Photo: Bruno Mathssons arkiv, Värnamo.

또 그는 개방적인 사고와 도전적인 창의력이 높은 인정을 받는 나라 덴마크를 매우 좋아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을 흠모했던 그는 덴마크 출신의 건축가 겸 디자이너였던 피에트 하인 (Piet Hein)과 협동으로 그 유명한 “이클립스 테이블 (Eclipse table)”을 디자인했으며, 1970년대에는 일본과도 디자인 계약을 맺고 지금까지도 일본의 가구생산 업체인 히오스 (Hios )디자인 사의 라이센스로 가구 용품들이 생산판매되어 오고 있다.

그가 줄기차게 옹호해 온 이른바 “마트손의 궁극적 의자 문화 (ultimate sitting)” 철학은 그가 디자인한 의자와 테이블에 세심하게 고려된 곡선 감각에서 잘 반영되어 있다. 자연히 그는 현대인들이 점차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무실 공간을 위한 환경과 가구를 디자인하는데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사람들이 누운 자세로 일을 하면 훨씬 더 창의적인 사고를 할 수 있고 효율적으로 일처리에 임할 수 있다는 제안을 하기도 했는데, 사무실이란 엄숙하고 진지해야 한다는 당시의 노동 문화의 견지에서 볼 때 두 말 할 것 없는 혁신적인 주장이 아닐 수 없다. 그가 1940년대 초엽에 차례로 선보인 “페르닐라 (Pernilla)” 의자 시리즈와 1960년대의 “젯슨 (Jetson)” 의자는 뒤로 누을 수 있는 긴 안락형 작업 의자의 대표적인 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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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에 제작생산된 “아니카 (Annika)” 테이블.

주관이 강하고 고집스럽고 영리한 머리를 소유자 마트손은 단순하면서도 꼼꼼한 우아함이 돋보이는 형태에 대한 남다른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단순함과 기능성이 결합된 아름다움은 유리 주택을 비롯한 50차례에 넘게 수행했던 건축 디자인 프로젝트들과 나무를 가열하여 굽혀 만든 라미네이트 목재 가구 용품에서 잘 드러난다.

특히 가구 아이템들에 그는 여성의 이름을 달아주곤 했는데, 예컨대 에바 (Eva), 미나 (Mina), 미란다 (Miranda), 페르닐라 (Pernilla) 등은 각 의자 모델마다 지닌 독특한 개성을 한층 강조해 주는데 효과적이었다.

환경주의 미래를 위해 또다시 평가받는 브루노 마트손의 건축 세계
마트손이 건축을 통해서 생전 자연과 인간 사이의시각적으로 지속가능한 개발과 상호작용의 가능성에 쏟은 열정은 지금도 미래의 건축이 가야할 방향을 제시해 주는 혜안을 제시해 준다. 최근들어 지속가능한 (sustainable) 환경친화적 건축 디자인을 연구하는 젊은 세대의 전문가와 대중들 사이에서 이미 수십년 전에 마티슨의 철학과 건축 디자인에 응용했던 기법을 재발견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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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뇌 (Tånnö)에 있는 브루노 마트손의 자택, 1964-65년. Photo: Åke E:son Lindman.

그는 미국 여행을 다녀 온 후 1950년대에 고향 메르나모의 한 가구 전시장에서 당시로서는 전혀 새로운 바닥 전기 히터가 설치된 콘크리트재 유리 주택을 지어 선보였었다. 그는 사방벽 중에서 한 면은 벽돌로 쌓아 올리고 나머시 세 면은 질소가 주입된 3중 유리창을 벽대신 설비해 넣는 마트손 고유의 “브로노 유리창 공법 (Brunopane)”을 선보이고 특허인가까지 받았다.

자연을 가까이 하고 싶어하는 스칸디나비아인들의 성향과 자연광을 최대한 활용한 우수한 미하적 경제적 디자인 해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공법은 안전상의 이유로 건축허가청의 관료적 난관에 부딛히곤 해서 결국 그가 그토록 바라던 대중화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지금도 웁살라의 파르마시아 (Parmacia) 실내 장식(1973년), 단더리드의 핵가족용 주택(1955년), 쿵쇠르의 가족 주택(1954년), 브루노의 자택들에 간직된 다시금 자연과 가까이 하고 싶어하는 현대인들에게 환경친화성과 기법적 혁신성이 한데 융홥된 합리적인 아름다움을 재발견하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기에 충분하다.

그의 건축 디자인 50년이 남긴 유산은 오늘날 현대인들이 모색하는 보편적 건축 디자인의 문제에 새로운 빛을 던져주고 있기 때문이다. 『브루노 마트손 건축 디자인 (Bruno Mathsson – Designer and Architect)』 전시회는 스웨덴 스톡홀름에 있는 건축박물관 (Arketektumuseet)에서 [2006년] 2월9일부터 8월27일까지 전시된다. Photos courtesy Copyright © Arkitekturmuseet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