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thly Archives: February 2013

‘대기에 사랑이 가득’ 마르크 샤갈

Love is in the Air – Marc Chagall at Arken Museum for Modern Art

“주변엔 온통 사랑이 가득하네, 어디를 둘러봐도, 사랑이 가득하네, 눈에 보이는 것 하나하나 귀에 들리는 것 하나하나까지..” – 1978년 댄스 뮤직 가수인 존 폴 영 (John Paul Young)은 “Love is in the Air”라는 곡으로 사랑이 대기를 온통 사로잡고 있다며 소리높여 흥겨워 노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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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펜하겐에 있는 근현대 미술관 아르켄 (Arken Museum of Modern Art) 입구 모습. Photo: Lars Skaaning. Courtesy:Arken Museum of Modern Art, Denmark.

같은 주제를 내걸고 덴마크의 수도이자 항구도시 코펜하겐에 있는 근현대 미술관 아르켄 (Arken Museum of Modern Art)에서는 마르크 샤갈의 회화전을 [2005년] 10월 8일부터 내년 초 [2006년]인 1월15일까지 전시한다.

이번 전시 『샤갈- 사랑의 세계』는 환갑을 넘긴 샤갈의 손녀딸 메레 마이어 (Meret Meyer)가 전시 기획과 진행에 직접 관여해 가며 파리 퐁피두 센터, 니스 국립 도서자료실, 독일 한노버 스프렝겔 미술관, 모스코바 국립 트레챠코프 갤러리로부터 작품들을 대여해 와서 화재가 되고 있기도 하다.

작년 여름 우리나라의 서울 시립미술관에서 ‘색체의 마술사’라는 별명을 달고 대성황리에 전시된 샤갈 순회전시에서 확인된 것처럼 화가 샤갈의 미술 세계는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널리 알려져서 폭넓은 사랑을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일단 미술 경매장에 등장했다 하면 예외없이 100억 달러 이상의 낙찰가격을 너끈히 이끌어 내는 미술 시장계의 황금알을 낳는 거위이기도 하다.

올가을 10월부터 아르켄 근현대 미술관에서 열리는 『샤갈 – 사랑의 세계 (Chagall’s World of Love)』 展을 통해서 관객들에게 전달하게 될 메시지도 역시 사랑과 관용과 조화이다. 전세계 유명 미술관 소장품들과 개인 소장품들 180여점이 한자리에 모이는 이번 전시에서 러시아 태생 유태인 화가이자 화폭의 시인 샤갈은 문화와 종교를 넘나드는 사랑과 행복이라는 보편적이고 황홀한 생의 환희를 화폭으로 옮긴 그의 작품세계를 선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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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갈의 『거울 (Le Miroir) 』종이에 수채, 펜과 잉크, 구아슈, 10 5/8 by 8 1/8″, 화가의 서명 1911-1912년 경.

마르크 샤갈(1897년 태생-1985년 사망)은 88년이라는 짧지 않은 예술 생애를 사는 동안 조물주 하느님이 사랑으로 이 세계와 피조물들에 생을 불어 넣었다는 신념을 놓지 않았다.

옛 유태인 신비주의 교리에 이르기를 조물주는 커다란 배에 피조물들을 만들어 넣었는데 너무 많아서 그 배는 내부의 압력에 못이겨 터져 산산조각이 났지만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이 세상 모든 피조물들은 제아무리 하찮고 미세할지언정 고귀한 사랑을 품고 있다고 믿었다.

모든 피조물들 속에 내재한 사랑을 노래한 그의 정신 세계와 예술은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분명 시적이고 마술적이다 못해 거룩하기까지 하다. 지난 2003년부터 현재까지 전세계 대도시들을 돌며 수많은 미술 관객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관람열풍을 모았던 것도 바로 그의 시공을 초월하는 사랑과 환희의 메시지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인생이 그의 회화 세계가 묘사하고 있던 것처럼 모조리 사랑과 환희의 불꽃놀이 만은 아니었다. 과거 소비에트 연방에 소속되어 있던 나라 벨라루스 (Belarus)의 비테브스트 (Vitebsk)라는 유태인 게토에서 출생한 그는 어린 시절부터 그림그리기에 남다른 열정을 보였다.

유태인 배경에서 태어나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샤갈은 기독교 성서 내용에 관심을 갖고 그것을 그림으로 표현하기 즐겼는데, 딱하게도 땅 위와 하늘 아래 살아숨쉬는 것들을 그림으로 그리는 일은 우상숭배라며 미술을 배척했던 유태교 특유의 교리 때문에 샤갈은 그림그리기의 꿈을 펼치기 위해서 14살 나던 1911년에 파리로 이민을 떠났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온 유럽을 뒤흔들자 샤갈은 전쟁을 피해 고향 비테브스크로 돌아와서 그의 천생연분인 벨라를 만나 결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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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보 (Der Spaziergang)』 1917/18년 작, Staatliches Russisches Museum, St. Petersburg © VBK, Wien, 2006.

그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1924년에 다시 파리로 건너가지만 제2차 세계 대전과 나치군을 유태인 박해를 피해서 1941년에 다시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지만 전쟁이 끝나고 난 후 1947년에 다시 프랑스로 건너와 남은 여생을 보내며 사랑 (love)과 생의 환희 (joie de vivre)를 노래하는 그림을 그렸다.

서구 근대 20세기의 격동의 세월에 못지않게 슬픔과 갈등에도 불구하고 샤갈의 미술 세계는 전세계 미술 관객들과 일반인들에게 문화, 종교, 세속적인 일상을 두루 관통하는 풍부한 시각 세계를 선사한다. 화가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고향 비테브스크 유태인 게토의 고즈넉한 마을 풍경을 비롯해서 성서의 구약과 신약의 이야기를 해석한 장면들, 신비로 가득한 서커스 곡예사와 음악가, 프랑스의 환상시인 겸 우화가인 쟝 드 라 퐁텐느 (Jean de la Fontaine)의 우화, 아라비안 나이트, 그리고 유태교 시나고그와 카톨릭 교회 장면들은 모두 샤갈의 붓끝을 통해서 사랑, 관용, 행복의 언어로 재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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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켄 근현대 미술관 실내 전시홀 광경. Courtesy: Arken Museum of Modern Art, Denmark.

코펜하겐의 해변가에 커다란 배 한 척이 서 있는 듯한 해양풍 건축을 자랑하는 아르켄 근현대 미술관은 1996년 3월에 처음 개관한 이래 덴마크의 근현대 미술과 대형 해외 순회전을 전시로 올리는 시립 문화 공간이다.

방년 25세의 나이로 미술관 건축 공모전에서 당선된 쇠렌 로베르트 룬트 (Søren Robert Lund)가 해안에 자리잡고 있는 이 미술관 자리의 독특한 입지를 고려하여 미술관 건물 내외부를 쪼개 벌어진 한 척의 거대한 해양선이 바닷가에 펼쳐져 있는 듯한 독특한 건축 내러티브를 구축한다는 컨셉에 기초하여 설계되었다.

화강암 마감재와 난간을 이용해 선실 안을 거니는 듯한 감흥을 주도록 설계된 아르켄 미술관 로비에서 부터 18미터 길이로 펼쳐지는 아트 액시스 (Art Axis) 주요 전시 공간, 로비와 아트 엑시스를 연결하는 레드 액시스 (Red Axis) 붉은색 통로 전시 공간, 그리고 대형 선박의 버팀대를 연상시키는 뮤지움 카페에 이르기까지 아르켄 미술관 건축은 샤갈의 환상적인 미술 세계와 나란히 색다른 미술 감상 경험을 안겨주는 공간이다. 홈페이지 http://www.arken.dk/

글 text| 박진아 Jina Park 사진 제공 Photos | Arken Museum of Modern Art, Denmark 출처: 『노블레스』 2005년 10월호 114페이지. * 본 내용은 노블레스 지에 실린 편집된 내용과 다소 다를 수 있습니다.

낭만주의 그림 속에 깃든 헝거리 영혼

ROMANTIC REALISM IN THE 19TH CENTURY HUNG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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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롤리 페렌치 (Károly Ferenczy)의 『오프페우스 (Orpheus)』 1894년 작품, 캔버스에 유화, 98,2 x 117,5 cm © Ungarischen Nationalgalerie, Budapest.

중유럽권에서는 흔히 “한 번 헝거리 사람이 되면 영원한 헝거리 사람”이라는 관용적인 표현이 관용구 처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곤 한다. 그만큼 헝거리인들의 국민적 정체성과 문화적 자부심이 강하다는 뜻일 것이다.

인터넷을 비롯한 동시간적 통신 수단의 발달과 급속한 문화의 전파가 시시때때로 전개되어 국가간의 경계가 모호해 지고 있는 요즘, 국민적 정체성과 자부심을 논한다 함은 어딘지 모르게 고리타분하고 시대착오적이기까지한 인상을 줄지도 모르겠다.

영국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 (Zygmunt Bauman)이 지적한 바 있듯이 포스트모던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은 자유라는 미명 아래에 정처없이 여러다른 국가와 문화권을 떠돌고 있게 된 오늘날의 자유롭고 유동적인 문화 속에서 국경과 지역적 차별성에 따른 국민적 정체성을 논하는 것이 오늘날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그같은 화두를 제기하며 오스트리아 니더외스터라이히 주의 수도이자 유서깊은 중세 도시인 크렘스 (Krems)에서는한 편의 미술 전시회를 통해서 국민적 정체성은 지리적 경계나 인종적 배경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공통된 예술적 정신을 함께 나누는 영혼적 공통체로서 정의되는 것임을 선언한다. 헝거리 부다페스트 국립 미술관과 오스트리아 크렘스 쿤스트할레가 공동으로 기획한 이번 전시는 과거 오스트로-헝거리 제국으로서 중유럽권을 지배해 온 오스트리아와 헝거리의 깊은 역사적 인연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에서는 최초로 19세기 헝거리 미술을 최초로 소개하는 뜻깊은 미술 전시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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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마다라지 (Viktor Madarász) 『영웅 라즐로 훈야디의 죽음에 대한 애도 (Die Beweinung des László Hunyadi)』[스케치 그림], 1859년 작, 캔버스에 유화, 65,3 x 81 cm © Ungarischen Nationalgalerie, Budapest.

크렘스 쿤스트할레에서는 지난 8월 13일부터 내년 2월 중순까지 근 6개월 동안헝거리의 회회 미술 속에 나타난 독특한 국민적 정서와 전통 고취 정신을 엿볼 수 있는 『헝거리의 영혼 – 헝거리인의 낭만주의와 사실주의 회화』 전을 계속하고 있다.

1989년 동유럽 공산주의 체제의 붕괴에 이어 바로 최근 2004년 5월 유럽 연합국의 새로운 회원국이 되어 변화와 활기를 맞고 있는 헝거리. 본래 헝거리는 기원후 9세기 말엽 피노-우그릭족의 일파인 마기야르 족이다뉴브 강 유역에 정착하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탄생하기 시작한 국가다.

오늘날 서쪽으로는 오스트리아와 체코 공화국, 북쪽에는 슬로바키아, 남쪽으로는 과거 유고슬라비아 국가들, 그리고 동쪽으로 루마니아에 접한 채 자리하고 있는 내륙의 중유럽 국가로 알려져 있는 헝거리는 다양한 종족의 여러 주변 부족들이 합쳐져 오래 세월 동안 혼합된 다민족 국가일 뿐만 아니라 외부의 침략과 정복으로 인한 시련과 격동의 역사를 경험해 왔다.

그러다 보니 헝거리의 전통 문화는 집시 문화를 비롯한 다양한 지역의 농민들 중심의 민속 문화와 이웃 독일 및 오스트리아로부터 강요되었던 독일계 및 유태인계의 도시적 메트로폴리스 문화가 한데 뒤섞여 있는 문화의 멜팅폿으로서의 면모를 강하게 띠고 있다. 특히 농민과 서민을 중심으로 한 문화 운동은 여러 민족으로 구성된 헝거리를 통합하는 수단이 되곤 해서 언제나 정치적인 성향을 강하게 띠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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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탈란 세켈리 (Bertalan Székely)의 『탈출하는 미할리 도보지와 그의 아내 (Mihály Dobozy und seine Gemahlin)』 1861년 작, oil on canvas, 133 x 155 cm © Ungarischen Nationalgalerie, Budapest.

특히 19세기 초부터 문학, 연극, 음악을 비롯한 공연 예술 분야는 헝거리 국민들의 국가적 자부심을 고취시키고 외부국가의 침략으로 부터 저항하는 정신적 지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담당하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황실로부터의 압력에 저항했던 헝거리인들 사이에서 국민적 정신성을 일깨워주는 시인이나 문학가들은 국가적 위기 속의 영웅 대접을 받았고 서민들의 민속 문화 전통에 대한 재발견과 재평가를 통해서 국민대중은 서구 유럽에서 몰려 온 급속한 근대화와 도시화로부터 토착적인 문화를 보호할 수 있었다.

이번 전시가 유독 관심있게 주목하고 있는 주제는 전 유럽을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열품으로 몰아 넣었던 19세기, 헝거리의 화단에서 불어 닥친 특유의 민족주의적 성향과 그 속에 담긴 사회적 의미이다. 19-20세기 전환기 경, 유수한 과학자는 물론 문학가, 프란츠 리스트 (Franz Liszt, 1881-1886)와 벨라 바르톡 (Béla Bartók, 1881-1945) 등을 비롯한 작곡가를 배출한 바 있는 헝거리는 미술계에서도 그에 필적할 만한 화가들을 배출했다. 여러 전문가들에 따르면 지금도 헝거리인들의 정신 세계를 사로잡고 있는 헝거리적 민족성의 근원 시기를 19세기 낭만주의 시대에서 찾고 있다.

때는 19세기 초엽, 헝거리는 150여 년이라는 세월 동안 터엌키의 오즈만 제국 하의 지배에서 막 벗어났지만 곧 서부에 있는 이웃나라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제국의 지배 체제 하로 접어든 위기의 시대였다. 헝거리인들은 합스부르크 제국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어 보다 밝고 자립된 미래를 구축하겠다는 신념 하에 1848-49년에 둑립 혁명을 일으켰지만 결국 수많은 국민들의 피를 뿌리고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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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할리 문카치 (Mihály Munkácsy)의 『장작거리 나무를 진 여인 (Holz tragende Frau)』 1873년 작, 목판 위의 유화, 99,7 x 80,3 cm © Ungarischen Nationalgalerie, Budapest.

그 결과 지배자의 전보다 더 강한 정치적 압박에 시달리게 된 헝거리는 자유를 향한 투쟁 정신이 남긴 파토스와 채 가시지 않은 독립에 대한염원을 달래기 위하여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한 예술 운동으로 헝거리인들의 내면을 배출하기 시작했는데, 19세기 헝거리의 영혼’이라고도 불리는 헝거리 낭만적 사실주의 미술 운동은 이를 가장 잘 표현해 준 예술적 자취라고 여겨지고 있다.

예컨대 이 시대 헝거리인들의 총체적인 내면적 정서를 가장 잘 표현했다고 평가받고 있는 미할리 문카치 (Mihály Munkácsy)는 외부 세력의 오랜 정복  하에서 국민들이 겪은 슬품과 고통, 자유를 향한 갈구 욕망이 잘 어우러져 보는 이의 가슴에 찡한 하는 감동을 안겨줄만큼 헝거리인들의 심금을 자극하는 작품을 이룩했다고 일컬어지고 있다.

헝거리의 미술 전통은 그보다 일찌기 거슬러 올라간다. 서구 유럽에서 르네상스와 바로크 양식이 거듭하여 전개되던 15-16세기와 17-18세기, 카톨릭 교회가 막대한 정치적 위세를 발하던 헝거리에서는 교회 권력을 위시로 한 건축과 도시 건설 사업이 주로 이루어 졌으며 회화 예술도 교회를 위한 종교화와 역사화가 주를 이루었다. 종교화와 역사화는 조각과 더불어서 건축 실내를 화려하고 아름답게 장식해 주는 인테리어 장식 수단으로 애용되었는데 그 결과 초상화 쟝르도 급속하게 발달하게 되었다.

예컨대 19세기 전반기에 활동한 미클로시 바라바스 (Miklós Barabás)는 1848-49년 헝가리 독립 운동을 이끈 국가적 영웅들의 초상을 연작으로 여러편 그려서 국가적인 화가로 떠 올랐으며, 풍경화 그리기에 유능했던 칼로리 마르코 (Károly Markó)와 초상화가 요제프 보르쇼시 (József Borsos)도 헝거리인들의 국민적 감성에 호소하는 그림들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서부 유럽에서 전파되어 온 낭만주의의 영향이 번지기 시작한 19세기, 헝거리에서도 새로운 미술 운동이 일기 시작했든는데, 이로하여 비로소 헝거리 화가들은 주변 강국의 침략과 정복이라는 정치적 상황을 멜랑콜리한 서정으로 전환시킨 역사화를 즐겨 그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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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 진예이 메르제 (Pál Szinyei Merse)의 『양귀비 꽃이 핀 들판 (Wiese mit Klatschmohn)』 1896년 작, 캔버스에 유화, 39 x 63,2 cm © Ungarischen Nationalgalerie, Budapest.

그러나 가장 유명한 헝거리 출신 화가들은 특히 1848-49년 독립 운동이 실패로 끝나고 난 19세기 중엽 이후에 와서 비로소 줄줄이 탄생하기 시작했다.

베르탈란 세켈리 (Bertalan Székely)는 『탈출하는 미할리 도보지와 그의 아내 (Mihály Dobozy und seine Gemahlin)』(1861년 작) 등 당시 헝거리를 사로잡았던 역사적 사건들을 극적인 분위기로 묘사했고, 유명한 대표작 『영웅 라즐로 훈야디의 죽음에 대한 애도』(1859년)를 그린 빅토르 마다라지 (Viktor Madarász)는 그 특유의 “민족성 호소적”인 분위기와 웅장한 분위기 연출력을 발휘하여 저멀리 서구 유럽 파리의 화단에서까지 인정을 받았다. 역시 역사적인 그림을 기념비적인 초대형 화폭으로 옮겨서 역사화 쟝르에서 독자적인 경지를 이룩한 귤라 벤추르 (Gyula Benczúr)도 오늘날까지 헝거리인들의 뇌리에 깊이 자리잡고 있다.

19세기 후반기 헝거리의 낭마주의파화가들은 헝거리의 전통적인 민속 미술로부터 영감을 얻었다. 특히 헝거리인드 사이에서 인기가 높은 미할리 문카치 (Mihály Munkácsy)는 이른바 헝거리적 ‘민속적 사실주의 (folk realism)’의 새 장을 열었다고 평가받고 있는데, 『장작거리 나무를 진 여인』(1873년)을 비롯한 수 편의 그의 작품들은 헝거리의 순수 회화 미술 분야에서 의미심장한 초석을 쌓았다고 인정받을 정도이다.

문카치와 더불어서 팔 진예이 메르제 (Pál Szinyei Merse)도 헝거리의 자연 풍경을 아련하고 낭만적인 시각으로 화폭에 옮겼는데, 특히 『양귀비 꽃이 핀 들판』(1869년)은 작품은 같은 시기에 프랑스 퐁텐블로의 야광파에 준할 만한 서정적인 농촌 외부 풍경화라 할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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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 홀로지 (Simon Hollósy)의 『옥수수 밭 (Beim Maisschälen)』 1885년 작, 캔버스에 유화, 151 x 100,5 cm © Ungarischen Nationalgalerie, Budapest.

전 유럽이 모더니즘이라는 새로운 창조적 기운으로 꿈틀대고 있을 20세기 초엽 헝거리의 화단에서도 파리에서 번진 아르누보 운동이라든가 인상주의 및 후기 인상주의풍에서 영향받은 풍경화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틸바다르 손트바리 코츄카는 그같은 운동을 처음으로 주도한 화가였고 비슷한 시기에 나기야브냐 미술가 집단이 탄생했다.

니기야브냐 미술가 집단은 헝거리 화단의 야광파의 창시자로 일컬어지는 시몬 홀로지 (Simon Hollósy)의 주도로 창설되어 『오르페우스』를 그린 유명한 화가 카롤리 페렌치 (Károly Ferenczy)의 미술 세계가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자양분 역할을 해 주었다.

당시 야광파풍으로 풍경화를 즐겨 그리던 헝거리 화가들은 고국의 천연 자연 환경과 화가마다의 내면적 환상 세계가 뒤섞인 오묘한 분위기의 사실주의 화풍을 구축함으로써 급진적인 아방가르드주의가 전개되던  파리를 위시로 한 서구 유럽의 모더니즘 경향과는 또 색다른 길을 구축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을 넘처 초超포트스모더니즘을 향해 질주하고 있는 21세기, 인류는 왜 또다시 국민적 정서와 민족성을 재차 논하고 있을까? 적어도 유럽의 역사를 되돌이켜 보건대 인류는 지역주의와 거국적이고 보편적인 세계주의 사이를 오가는 치열한 패권 다툼과 이합집산을 경험해 왔다.

20세기 전세계를 뒤흔든 두 차례의 유럽의 대전은 모두 방대한 대국적 정치 파워와 그 주변의 소수 국가들의 민족주의 간의 갈등이 화근이 되어 촉발되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지역주의와 유토피아적 세계주의라는 두 상반되는 사상은 인간 본유의 사회적 기질을 엿볼 수 있게 해 주는 단서가 되어 준다.

영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 (Eric Hobsbawm)은 그의 저서중 하나인 『전통의 발명 (The Invention of Tradition)>에서 오늘날 우리가 한 국가의 유서깊은 전통 및 의례들중 상당수는 19-20세기 유럽 전역 여러 국가에서 불거졌던 민족주의 운동의 결과 고안된 ‘발명된 전통’임을 증명해 보인바 있다.

그런 점에서 내년 겨울까지 크렘스에서 전시가 계속될 『헝거리의 영혼』 展은 초고속 신매체 커뮤니케이션, 국제 여행의 대중화, 경제와 문화의 세계화를 경험하고 있는 현재 유럽 연합의 갈등 상황을 넌지시 시사하는 가운데 관객들이 헝거리의 19세기 낭만주의 미술을 통해서 국민적 자아정체성에 대하여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고 있다. Images courtesy: Kunsthalle Krems.

* 이 글은 본래 『오뜨 (HAUTE)』  2006년 10월호 아트뉴스 컬럼에 실렸던 글을 다시 싣는 것입니다.

화가가 된 귀족녀 – 타마라 데 렘피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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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실에서 병회복중인 여인』 1932년 목판 위의 유화. 개인 소장© VBK, Wien, 2004.

나른과 호색의 아름다움에서 헐리우드 글래머로 잠자리에서 방금 일어나 앉은듯 퀭하고 나른한 눈길의 여인. 값비싼 비단과 우단의 광채가 흐르는 외투 차림을 한 귀족 남성. 쇼울을 두르고 자욱한 담배 연기를 뿜으며 유혹하는 풍만과 에로스의 여인 – 아르데코 미술을 거론하는 자리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여류 화가 타마라 데 렘피카 (Tamara de Lempicka)의 초상화들은 최근 미술계와 컬렉터 사회에서 외면하고 지나칠 수 없는 미술 아이콘으로 떠오르고 있다.

코코 샤넬과 엘사 스키아파렐리가 재단한 파리 오띄 쿠튀르 의상을 완벽하게 차려 입고 1920년대 파리와 1930년대 LA 와 뉴욕 사교계를 드나들었던 타마라 데 렘피카는 흡사 여배우 그레타 가르보 (Greta Garbo) 또는 마를레네 디트리히 (Marlene Dietrich)의 자매 격은 능히 되고도 남을 만큼 퍽 세련되고 현란한 외모를 자랑한 사교계 미녀이자 직업 화가였다.

나른한 눈매와 선홍색 립스틱으로 화장을 하고 초록색 부가티 자동차 안에 몸을 싣고 앉아 있는 여인은 바로 다름아닌 타마라 데 렘피카 그녀 자신의 모습이었다. 본래 독일 여성잡지 『디 다메 (Die Dame)』 誌의 표지 그림을 그려달라는 주문을 받아서 제작된 이 작품에서 고급 이탈리아제制 스포츠카인 부가티 (Bugatti) 자동차는 거칠 것 없이 전진하는 ‚스피드 (speed)’를 상징한다.

운전대를 쥐고 있는 주인공은 그 어떤 남성 배우자나 운전기사 없이도 홀로설 수 있는 독립된 여성상과 ‚여성 해방주의’를 거침없이 내뿜고 있다. 머리에 꽉 끼는 아르데코풍 에르메스 패션 모자와 긴 팔목 가죽 장갑으로 치장하고 화장기 짙은 매혹과 ‚글래머’를 잔뜩 발산하는 주인공의 초상은 1920년대 여성들이 꿈꾸던 신여성상을 한 편의 그림 속에 모조리 구현한, 이른바 ‚팜므 파탈 (femme fatale)’ 이미지의 종합 결정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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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끝물경 파리의 하이소사이어티에서 가장 인기있는 초상화가로 부와 명성을 거머쥐면서 본격적인 호가로서의 커리어를 굳히기 시작한 그녀가 자신감에 가득한 자신의 모습을 한 편의 초상화로 담은 1929년 완성작 『자화상』.

근대와 신여성, 럭셔리와 글래머, 극도로 세련되고 다듬어진 아름다움, 개인주의와 성해방이라는 서구 20세기 초엽의 신사고를 핵심 주제어로 삼고 구축된 타마라 데 렘 피카의 아르데코 미술 세계와 팜므 파탈 (femme fatale des Art Deco) 이미지들이 유명인들과 연예인들 사이에서 인기를 끄는 이유는 어찌 보면 당연하다.

무대와 은막을 강타하는 화려한 조명과 반들거리는 광채, 다소 드라마틱하다 싶을 만큼 연출된 초상 주인공들의 표정과 제스쳐, 배우들 가슴속 깊숙이 자리잡은 부와 명성에 대한 야심 등은 1920-30년대 헐리우드 영화계에서 은막을 뒤흔든 스타들을 실제 삶과 영화 속 시나리오와 너무도 흡사하다. 타마라의 그림 속 주인공들은 부와 명성, 쾌락과 환상을 오가며 생활하는 사교계 유명인사들이나 인기 연예인들 바로 자신의 자화상인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타라마 데 렘피카는 1930년대말에 독일 나치군을 침략을 피해서 – 그녀의 혈통은 부분적으로 유태계였기 때문이다 – LA로 이민을 온 이후로 그림그리기를 계속하던 중에 『어느 아름다운 근대식 아텔리에 (Un bel atelier moderne)』라는 단편 영화에 디바 여주인공으로 직접 연기하기까지 했다.

폴 포아레 (Paul Poiret) 가 제작한 영화 『비인도적인 (L’inhumaine)』(1923년), 아르데코 스타일 전형의 팜므파탈 여배우 그레타 가르보 (Greta Garbo)가 출연한 영화 『키스 (The Kiss)』(1929년), 루비 킬러 (Ruby Keeler)와 진저 로저스 (Ginger Rogers)가 출연한 뮤지컬 영화 『42번가 (42nd Street)』, 진저 로저스와 프레드 에스테어 (Fred Astaire) 주연의 뮤지컬 영화 『탑 햇 (Top Hat)』(1935년) 등은 모두 타마라 데 렘피카가 그림 속에 묘사했던 시대적 사고방식과 유행 감각이 영화 필름으로 재현된 대표작들이다.

그래서일까. 타마라 데 렘피카의 작품은 요즘들어 유독 구미의 유명인들 사이에서도 너나없이 한 점씩 갖고 싶어하는 인기 수집용 아이템으로 각광받고 있다. 헐리우드에서는 유명 배우 잭 니콜슨이 타마라 데 렘피카의 그림 한 점을 갖고 있는 것으로 소문이 나 있다. 최근 미술품 수집에도 손을 뻗힌 팝음악계의 여왕벌 마돈나도 2점을, 미국의 패션 디자이너 도나 캐런이 한 점을 소장하고 있으며, 독일출신의 패션 디자이너 볼프강 요옵도 최근 타마라 데 렘피카의 작품을 여러점 사들여 개인 미술품 컬렉션을 한층 더 부풀리고 있는 데 렘피카의 애호가라고 소문이 자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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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리엘 콘스탄티노비치 대공작의 초상』 1926년경 그려진 유화로 높이 1미터가 넘는 (크기 116 x 65cm) 대작이다. 현재 미국 헐리우드 영화배우 잭 니콜슨의 개인 소장품이다. J. Nicholson, Beverly Hills, California © VBK, Wien, 2004.

서양 미술의 고전미와 감각적인 스타일은 20세기 근대인들 외에도 오늘날 현대인들의 눈에도 쉽게 친근감을 주는 대중적 위력을 발휘함을 입증하고 있다.

2004년초 영국 런던의 빅토리아 앤 앨버트 뮤지엄 (Victoria & Albert Museum, London)에서 큰 대중적 성공을 거뒀던 『아르데코 (Art Deco)』展은 곧 같은해 봄 미국 보스턴에 있는 파인 아트 뮤지엄 (Museum of Fine Arts Boston)으로 옮겨져서 다시 한 번 아르데코 미술에 대한 대중 관객들의 관심을 한껏 불지폈다.

20세기 양차 대전 사이 기간인 1920-30년대에 반짝 등장했다가 자취를 감춘 아르테코 미술 운동은 본래 파리와 뉴욕을 연결하며 유행한 실내 장식과 디자인 분야의 응용미술 운동이었지만, 정작 이 『아르테코』전을 통해서 현대인들 사이에서 대중적 주목을 받으며 재각광을 받기 시작한 것은 타마라 데 렘피카의 그림들을 통해서였다는 점은 흥미롭다.

아르데코 미술에 대한 대중 관객들의 관심을 반영하기나 하듯, 런던의 왕립 아카데미 미술관에서는 서둘러 미술 전시 사상 처음으로 타마라 데 렘피카의 개인전을 기획하여 5월 중순부터 8월말까지 전시로 부쳤고, 같은 전시는 작년 가을 9월 중순부터 빈으로 옮겨져서 올해 1월초까지 순회전을 계속한다.

화려, 낭만, 퇴폐, 드라마로 그득한 그녀의 작품 세계 못지않게 여류 화가 타마라 데 렘피카의 예술 한평생도 파리의 보헤미풍 낭만, 헐리우드식 글래머, 퇴폐와 쾌락의 화신, 신여성이 가부장적 체체로부터 해방의 심볼을 그녀와 미술과 예술 인생으로 모조리 구현한 그 자체 한 편의 드라마였다.

기록에 따르면 신비의 여인 타마라 데 렘피카는 마리아 고르스카 (Maria Górska)라는 이름으로 1898년 모스코바에서 돈많은 폴란드인 어머니와 러시아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그녀의 정확한 생년월일과 출생도시(그녀가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서 태어났다는 설도 있다.)에 대한 진실은 다소 분분한채로 남아 있다.

근대 전환기 러시아 상류사회의 부유하고 귀족적인 분위기에서 성장한 덕분에 타마라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감 넘치고 당당한 성격의 주인공으로 러시아 상류층에서 사교적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했으며, 14세라는 지금으로 보면 어린 나이에 타데우즈 렘피키 (Tadeusz Lempicki)라는 이름의 귀족 청년과 사랑에 빠져 결혼의 서약을 맺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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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크 드레스』 1927년도 유화작품. Caroline Hirsch 소장 © VBK, Wien, 2004.

얄굳은 근대 역사의 흐름은 갓 결혼한 렘피카 부부가 신혼의 단꿈을 채 맛보기 시작할 무렵 그 둘을 러시아로부터 몰아냈다. 때는 1912년 짜르 귀족 체제가 전면 몰락한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기였고, 귀족 상류계층 출신이라는 이유로 렘피카 부부는 어린딸 키제트 (Kizette)를 데리고 1919년에 프랑스 파리로 피신했다.

변호사 남편이 새 보금자리인 파리에서 직장을 찾지 못한채 고전을 계속하고 있는 가운데 심각한 생계의 위기에 내몰린 타마라 데 렘피카는 어린 시절 깊숙이 감춰 두고 있던 미술에 대한 열정을 되살려 직업적인 화가업을 생계 수단으로 삼기로 결심한다.

상류층 사교계로 재진입하고 싶어했던 그녀의 사회적 지위욕 때문이었든 아니면 임박한 생계 위기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임기응변력 때문이었든, 이렇게 직업적 화가로서 첫 발을 내디디게 된 타마라 데 렘피카의 출발은 성공적이었던듯 하다. 먼 훗날 딸 키제트가 회고한 바에 따르면 어머니 타마라는 ‚킬러의 본능’으로 직업 화가로서 그리고 파리 사교계 인사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벌여나갔다고 했을 만큼 성공을 향한 집념은 요즘 시대의 맹렬 직업여성들의 그것을 방불케하는 것이었다.

직업적 화가로 인생을 개척할 것을 결심한 타마라가 겨냥한 미술 세계의 목표 의식은 처음부터 분명했다. 화려하고 풍족했던 성장 경험, 어린 시절 이탈리아로의 미술 여행, 광채와 화려로 가득한 부유층 사교계에 대한 익숙함과 개인적 친화성 등은 그녀가 아르테코풍 그림그리기로 뛰어드는데 직접적인 영향력으로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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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스토프 왕자의 초상』 1925년도작 유화, 65 x 92cm. Courtesy: Barry Friedman Ltd. New York 개인 소장품 © VBK, Wien, 2004.

파리에 당도해서 얼마 되지 않아서 그녀는 그랑 쇼미에르 미술 아카데미 (Adadémie de la Grande Chaumière)에 입학하여 이탈리아 르네상스풍 그림을 열심히 관찰하여 배끼는 수업에 착수했다.

그러던 중 상징주의파 화가 모리스 드니 (Maurice Denis)에게 사사하면서 당시 고갱을 위시로 해 한창 유행하던 상징주의와 색면주의풍 그림을 배웠다.

그러나 결국 타마라가 이 엄격하고 완벽주의자인 것으로 정평이 높던 스승 모리스 드니로 부터 1년 동안 사사한 결과 얻은 것은 그림의 스타일 보다는 그림그리기 작업 과정이 요하는 자기 규율과 완벽주의적 태도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타마라 데 렘피카가 그녀만의 야한듯 화려하고 조명을 받은듯 화려한 초상화 세계를 구축하기까지 끼친 결정적인 스승은 누구였을까? 그는 바로 20세기초 파리에서 화가 겸 미술평론가로 활동하던 앙드레 로테 (André Llote)였다. 오늘날 일반 대중 사이에서는 다소 낯설은 이름이지만 당시 20세기 전반기 서양 근대 미술을 중심지인 파리에서 앞다투어 전개되고 실험되던 온갖 미술 사조와 유행을 손바닥 처럼 알고 있던 앙드레 로테는 타마라가 파리 상류층 미술 애호가들과 사교계 인사들의 입맛에 딱 맞는 그림 양식을 찾아내는데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무엇보다 타마라는 로테의 아텔리에에서 사사를 받고 있던 때는 바로 20세기 미술의 거장인 피카소가 피사체를 수많은 정방형 형상으로 분해해석하여 그리는 이른바 ‚종합적인 큐비즘 (synthetic cubism)’을 한창 실험하고 있던 시기이기도 했다. 유행이 유행었던 만큼 타마라는 그녀가 그리기 좋아하는 고전주의풍 여성 누드 그림을 피카소식 큐비즘 양식과 섞어서 그려보기도 했는데, 예상대로 사교계와 부유층 그림 고객들의 반응은 매우 긍정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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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캔버스에 유화 그림 1927년도 작. 뉴욕 Toni Schulman 소장품 © VBK, Wien, 2004.

타마라 데 렘피카가 여성 누드를 주로 그리기로 결정하게 된 데에는 당시 1920년대 파리의 퇴폐문화의 유행에도 눈설미 있게 적절히 응한 결과였다. 때는 파리에서는 최초로 흑인 여성 무용가 조세핀 베이커 (Josephine Baker)가 바나나 껍질로 만든 스커트를 입고 무대에서 춤을 추면서 아프리카의 여성의 이국적 에로티즘과 원시주의를 발산하며 근대 미술가들의 영감을 자극할 때였다.

또 그런가 하면 대서양해 건너 미국 뉴욕에서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같은 아르데코식 초고층 마천루 건물들이 속속 들어서가는 가운데 도시적 섹스 판타지와 시크함이 건축과 실내장식 미술로 급격하게 번지고 있었다.

실제로 그녀는 예술과 낭만의 파리 레프트뱅크에 살면서 무기력과 생활고에 찌든 남편을 뒤로 한채 동성애에 잔뜩 탐닉하는 것으로써 현실로부터 도피하고 싶어했던 공공연한 레즈비언이기도 했다. 그에 대한 선언이나 하듯, 프랑스 신고전주의 화가인 앵그르의 19세기풍 그림 『터어키 탕』을 본따서 타마라가 아르데코풍으로 재해석한 여성 집단 누드화는 파리 부르조아들 사이에서 드높은 인기를 끌었다.

자신이 그린 초상화 속 미인들에 못지 않게 그녀 자신이 늘씬한 곡선미와 화려한 화장과 옷차림을 한 아르데코풍 디바 겸 욕망의 여신으로 사교계에 등장하길 좋아했던 적극적인 자기PR가 타마라 데 렘피카. 그렇다고 해서 이 섹스와 욕망의 화신이 밤인생과 파티 세계 만을 주름잡은 방탕녀였기만 했으리라 상상하는 것은 섣부른 판단이다. 스승 모리스 드니의 가르침을 잊지 않고 그녀는 하루 평균 9시간 이상을 아텔리에 밖혀 그림그리는 일에만 몰두했던 일중독자이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그녀는 당시 파리 여러 소규모 개인 화랑은 물론 페미니즘 성향의 파리 근대 여성 화가 살롱과 밀라노의 개인전 출품을 위해서 작업에 열중했다. 그같은 전시 발표 기회를 통해서 사교계에 발을 넓히고 자신의 그림을 주문해 줄 후원자를 찾는 일은 열심히 그림을 그리는 일에 못지 않은 중대한 전략이었던 때문이다. 어려운 파리로 이민온 후 실질적인 가장이 된 그녀의 입장에서는 그림그리는 일은 예술로 여가를 삼은 낭만과 자기성취의 취미활동이 아니라 생계 유지라는 보다 절박하고 실용적인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직업활동이었음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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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합꽃이 있는 아를레트 부카르의 사진』 베니어 합판 위에 유화 그림 1930년작. 이 작품은 독일출신의 유명 패션 디자이너인 볼프강 요옵이 소장하고 있다. Sammlung Wolfgang Joop © VBK, Wien, 2004.

하늘은 무심하시지 않았는지 곧 타마라 데 렘피카의 가차없이 맹렬한 직업적 미술 활동은 얼마안가서 부와 명성이라는 댓가로 확인되기 시작했다. 그녀는 잦아드는 상류층 인사들의 초상화 주문으로 바빠졌지만 덕분에 그로 모은 돈으로 파리 예술인 구역에 저택 아파트를 살 수 있을 만큼 돈을 모았다.

파리의 유명한 내과 의사 피에르 부카르 (Pierre Boucard) 박사는 온 가족의 개인 초상화를 포함해서 타마라가 즐겨 그리던 레즈비언풍의 집단 여성누드화를 무더기로 주문했다. 또 독일 귀족 퓌르스텐베르크-에르드린겐 백작은 타마라의 손을 빌어 프랑스 해군 복장과 베레 차림의 초상화를 그려 갔다.

그런가하면 사교, 소비, 향락을 존재이 이유로 삼고 살던 구시대 귀족들은 스스로를 조롱하는듯 표현한 화가의 풍자적 시각을 내심 좋아했던 것 같다. 러시아 짜르 왕가의 사촌뻘 귀족인 가브리엘 콘스탄티노비치 대공작도 군복 차림을 한채 놀랍도록 공허하면서도 냉소적인 표정을 하고 서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핑크 드레스를 입고 포즈를 취하고 있는 프랑스 귀족 로마나 데 라 쌀르 공작 부인의 초상화도 특유의 위풍장대한 초대형 규모의 캔버스 위에 주인공 특유의 권위 의식과 생에 대한 씁쓸함이 교묘하게 섞여 있는 모습으로 표현된 특이작이다.

그녀는 우선 특유의 적극적이고 자신감 넘치는 성격을 한껏 발동시켜서 그림 모델에서 부터 상류층 사교계 남성들에 이르기까지 남녀를 불문하고 상대를 애인으로 만드는데 천부적인 재능을 발휘한 마력의 여성이었다고 널리 알려져 있었다. 예컨대, 그녀가 자신의 여성 초상화의 모델로 세웠던 라파엘라라는 이름의 아름다운 젊은 여성은 한 늦은밤 타마라가 밤거리를 배회하다가 유혹한 거리의 여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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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나 드 라 쌀르 공작부인의 초상』 1928년도 유화작품. Sammlung Wolfgang Joop © VBK, Wien, 2004.

1929년 남편 타데우즈와 이혼한 후, 타마라는 머리끝부터 팔목까지 휘황찬란하고 요란한 보석과 장신구로 꾸미고 파티장에 등장하곤 했는데 그러는 가운데 파리에 모인 여러 유럽 아방가르드 미술계 남성들을 하나둘씩 점령해 나갔다.

이탈리아 미래주의파 화가인 마리네티, 프랑스의 지성인 겸 미술인 쟝 콕토, 이탈리아의 귀족 사교가인 가브리엘 다눈초는 하나같이 타마라의 매혹적인 마력에 무릎을 꿇었던 그런 남성들이었다.

사교계 연인 나탈리 바니가 운영하던 여성 동성애자 클럽을 즐겨 드나드는 단골 마담 역할을 했으며, 프랑스의 문호 앙드레 지드와는 마약을 나눠 쓸 정도로 절친한 사이였던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몰락해가는 구시대 귀족들과 상류 부르조아들의 취향에 봉사하는 사랑받는 초상화가로서 그리고 독립적인 미술가 커리어와 자유로운 신여성으로서의 인생을 한껏 누리던 타마라 데 렘피카는 파리에서의 어느 한 파티에서 오스트리아에서 온 한 열렬한 팬이자 컬렉터를 만나게 된다. 1933년 35세라는 나이로 그녀는 곧 20세 연상의 이 귀족 출신 라울 쿠프너 남작과 생의 두번째 결혼식을 올린다.

그러나 어쩐지 그 후로부터 근 5년간 이유를 알 수 없는 심한 우울증에 걸려 정신과 병원과 요양원을 드나드는데 바빴고 여간해서 다시 그림붓을 잡지 못하고 만다.

귀족과의 결혼과 안정은 그녀를 움직이게 하던 힘 즉, 상류사회의 남성들, 젊고 매력적인 레즈비언 여성들, 화려한 파티장과 환락의 나이트클럽을 오가는 쾌락과 자유의 세계를 뒤로 해야 했던 데에서 오는 무기력함과 방향상실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1938년 한겨울, 오스트리아의 한 한적한 휴양지에서 남편과 아침식사를 하던 타마라는 독일 나치군과 히틀러 청년단의 행진소리를 듣고 이내 미국으로의 이민을 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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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 II』 목판 위에 유화 그림으로 1930년대에 그려졌다. 패션 디자이너 볼프강 요옵의 개인 소장품. Sammlung Wolfgang Joop © VBK, Wien, 2004.

미국 LA 베벌리힐즈에서 머물던 타마라 데 렘피카는 파리 시절의 명성을 되살려 수많은 헐리우드 배우들을 모델 삼은 초상화를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제2차 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대에 뉴욕으로 보금자리를 옮긴 타마라는 한동안 잭슨 폴록과 윌렘 드 쿠닝을 위시로 한 추상표현주의 미술에 감명을 받고 1960년대에와서 한동안 고무 주걱으로 추상 회화 그리기를 시도해 보았지만 그녀를 정작 유명하게 해주었던 아르데코풍 회화의 성과나 예술적 완성도에는 감히 미치질 못했다. 어차피 타마라 데 렘피카는 추상 미술가가 아니었다.

저물어 가는 계급체제를 자조하던 귀족들의 냉소와 공허, 부유층 특유의 음탕한 눈초리와 거만한 태도, 철없고 젊은 여인네들의 자기도취 섞인 시선 – 진정 그녀가 능했던 것은 한 편의 캔버스로 차갑게 얼어붙은 듯 그녀만의 조형 언어로 승화시켜 누가 봐도 보기에 호감하고 대중적인 초상 이미지를 붓끝으로 표현하는 일이 아니었던가.

시대의 파란과 인간의 만가지 욕망은 한낯 덧없는 먼지와 같다고 말하려는듯, 타마라 데 렘피카는 멕시코의 한 작은 고을에서 92세라는 나이로 한 줌의 재가 되어 자연으로 귀의했다. Photos courtesy: Kunstforum Wien.

* 이 글은 본래 『HAUTE』 지 2005년 1월호 아트뉴스 컬럼에 실렸던 것을 다시 게재하는 것입니다.

 

알레싼드로 멘디니와의 인터뷰

INTERVIEW WITH ALESSANDRO MENDI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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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Z:IN Recreate 프로젝트를 담당한 이탈리아의 전설적인 디자이너 알레싼드로 멘디니[왼쪽]와 동생 프란체스코 멘디니.

Q: 멘디니 당신의 주요 작품을 따라 이탈리아를 여행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오메냐의 알레시 주방 프로젝트, 포럼 박물관, 나폴리의 빌라 코뮤날레를 위한 파빌리언에 대해 간단하게 소개해주세요.

A: 이탈리아 북부 알프스산 끝자락에 붙은 작은 마을 오메냐 (Omegna)에 알레시 가문이 세운 알레시 디자인 공장 (Alessi Design Factory)이 세워진 때는 1921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 회사를 세운 죠반니 알레시(Giovanni Alessi) 설립자자는 원래 금속 세공을 잘 하는 장인이었는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이탈리아 경제 재건의 물결을 타고 1950년대 이탈리아 디자인 산업을 이끈 전설적인 이탈리아 가업으로 성장했지요.

Atelier Mendini

오메냐의 포룸 뮤지엄외 입구.

그들의 디자인이 창조적 폭발을 터뜨린 때는 1970년대, 창업자 죠반니의 손자인 알베르토가 가업을 이어 알레시 디자인 공장을 지휘하면서 부터였습니다. 알베르토는 알레시를 디자인 실험 연구소로 여겼고 그가 지닌 사교성과 알레시 가문의 넓은 디자인계 인맥을 활용하여 당대 거물급 디자이너들을 초빙하여 주방용 디자인 용품들을 디자인케 하여 생산해 냈습니다.

나와 알레시 사의 디자인 철학은 모래에 물이 스며드는 이차와도 같다고 할까요? 뭐라고 한마디로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깊고도 넒은 관계이지요. 알레시 일에 대한 나의 관여는 매우 광범위하지만 동시에 알레시가 안고 있는 디자인, 창조, 경영 등 디자인에 관여하는 아주 세부적인 내용들까지도 내 일처럼 잘 알고 있습니다. 내게 알레시는 디자인과 창조을 지성적 영혼적 경지로 끌어 올린 디자인 공장입니니다.

역시 오메냐에 있는 포룸 뮤지엄은 원래 19세기부터 1960년대 말까지 이 지방의 금속 공업의 중심지 역할을 하던 공장을 오메냐 시립 정부에서 유럽 연합의 지원을 받아 박물관으로 개조한 프로젝트였습니다. 아치형 지붕과 연결된 용광로, 다리 모양의 크레인, 원자재 호퍼 나르기 장치 등 같은 이전에 있던 구조물들을 그대로 두면서도 새로운 시대적 건축 요소와 미래지향적인 도시 개발적 컨셉이 담긴 미학적 디자인을 첨가하여 재디자인하는 것이 아텔리에 멘디니의 임무였습니다.

나는 이 지역에 새로운 에너지 원천을 제공하여 유토피아를 건설한다는 의도를 전달하기 위하여 화려한 색상과 표현적인 요소를 맘껏 활용했습니다. 빌라 코무날레 프로젝트는 오메탸 보다 훨씬 남쪽에 위치할 뿐만 아니라 바다와 접해 있는 도시 나폴리에서 한 프로젝트여서 또 기억에 남습니다. 빌라 코뮤날레는 본래 18세기 말 양 시칠리아 왕국의 페르디난드 왕 1세때 세워진 저택과 정원을 정비한 나폴리의 공공 공원이었습니다.

04_smQ: 당신의 장식은 화려하고 색점이 병치하며 동화적이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당신은 그런 감성을 누구에게서 어디에서 영향을 받은 것입니까?

A: 나의 스타일이 누구 혹은 어디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단지 이탈리아인으로서 인생을 사랑하고 즐기며 때론 나 자신 스스로에게 농담을 던질 수 있는 여유와 유쾌함을 그렇게 표현했던 것 같습니다. 나에게 점묘 같이 보이는 다채롭고 밝은 색점은 색채와 유머 감각을 표현하는 수단인듯 합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그처럼 겉으로 보이는 언뜻 가볍고 유쾌해 보이는 외양과는 달리 디자인이란 매우 진지하고 철학적인 일입니다. 그래서 나는 디자인이 지닌 진지하고 철학적인 속성을 유쾌하고 재미있는 외양으로 ‘재창조 (re-create)’하고 승화시키려 합니다. 참고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색은 분홍색입니다.

Q: 당신은 아연판, 네온관 등 신소재에 대한 관심이 높고 그것을 공간에 자연스럽게 녹아내는 능력이 대단한 거 같습니다. 이렇게 특이한 소재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무엇이며, 최근에 당신을 매료시킨 소재가 있다면 어떤 것입니까?

A: 나는 신현대적이고 현대적인 디자인에 관심이 많습니다. 쉽게 말해서 과거의 디자인 전통에 매달리기 보다는 새롭게 등장하고 변하는 문화를 관찰하며 그로부터 영감을 얻습니다. 네온관은 이미 전후 시대 1950-60년대 대중문화에서 널리 사용된 재질이고 이것은 1970-80년대에 들면서 많은 전위적인 미술가와 디자이너들이 당시 특유의 시대적인 미적 분위기를 반영하게 위하여 즐겨 활용된 재료였습니다. 나도 네온광의 아름다움에 이끌려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했지요. 아연판 같은 신소재는 1980-90년대에 들어 보다 미래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데 좋은 재료였다고 생각됩니다. All Photos Courtesy: Atelier Mendini, Milano.

* 이 글은 본래 LG 하우시스 발행 Z:IN Style 2009년 4월에 실렸던 인터뷰를 위해 필자가 디자이너와 인터뷰한 내용입니다. 디자인월드 다운로드

 

파리 인상주의 회화 – 패션 가이드로 다시 보기

IMPRESSIONISM AND FASHION from Musée d’Orsay, Paris

08. Claude Monet_Le déjeuner sur l'herbe_1865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 《잔디 위에서의 점심식사(Le déjeuner sur l’herbe)》 1865-1866 캔버스에 유채, 248,7 x 218 cm Paris, Musée d’Orsay © Musée d’Orsay, dist. RMN / Patrice Schmidt.

미술시장에서의 최우선 투자대상, 미술 컬렉터들 사이 높이 선망받는 애호 목록, 그리고 일반 대중 관객들 사이에서 가장 친근한 미술 감상대상 제1호를 꼽으라면? 그에 대한 답은 단연 프랑스의 인상주의 회화일 것이다.

인상주의 화가들이 근대기 파리의 도시인들의 일상과 시민문화를 기록한 시대적 눈이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인상주의 회화가 파리의 최신 대중 패션에 영향을 끼치며  프랑스 패션 산업과 출판 업계까지 활성화시킨 산업 역군 역할까지 했었다는 사실은 아직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19세기 말엽부터 20세기 초엽 프랑스에서는 뜨고 지는 태양 아래서 끊임없이 새로운 색채와 형태를 발하는 아름다운 야외 자연 세계를 캔버스로 옮기는 인상주의 회화가 등장하여 서양 미술사 발전에 혁명적인 순간을 맞이하고 있었다. 신시대를 맞아 전격적인 변화가 들이닥친 분야는 인상주의 미술 뿐만이 아니었다.

이른바 근대시대(Modernism)가 되자 도시에 모여살던 도시인들의 도회 환경, ‘근대인(modern man)들의 살아가는 방식, 신시대가 요구하는 개인주의에 발맞춰서 시민들이 저마다 개성을 표현하는 방식도 전격적으로 달라졌다. 그렇다고 근대 유럽인들이 관상, 옷차림, 행동거지 같은 외모와 겉치레만을 내세운 피상적인 속물로 전락했다는 뜻만은 아니다. 엘리트 인사, 예술가, 그리고 시민들 사이에서는 옷차림을 통해서 신시대의 시각 문화를 개척하고 스스로를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가 강해졌고, 이를 반영하여 파리에서는 백화점과 패션 잡지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기 시작했다.

09.Pierre-Auguste Renoir_La balançoire

피에르-오귀스트 르노아르(Pierre-Auguste Renoir, 1841-1919) 《그네(La balançoire)》 1876 캔버스에 유채, 92 x 73 cm Paris, Musée d’Orsay © RMN (Musée d’Orsay) / Hervé Lewandowski.

사회학자 리쳐드 세네트(Richard Sennett)가 그의 저서 《공적 인간의 몰락(The Fall of Public Man)》(Knopf, 1977)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근대기 유럽에서 탄생한 새 도시 문화와 매너리즘은 몰락한 구시대 귀족, 신흥 중산층 부르조아 계층,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모여든 농부와 노동자 등 신흥빈민층이 새로 형성된 대도시 문화라는 공공 공간 속에서 함께 엉켜 살게 되면서 자기정체성을 보존하고 사회적 계약과 질서를 유지할 수 있게 돕는 조절기제 역할을 담당했다.

새 메트로폴리스로 급성장한 근대기 파리는 온갖 인간상을 구경하고 관찰할 수 있는 인간극장과도 같았다. 그리고 인상파 화가들은 마치 오늘날 사진가들이 하듯 나날이 번창해 가는 도시 속 근대인들의 모습을 재빨리 포착해 그림으로 옮겼다. 특히 마네(Éduard Manet)와 드가(Edgar Degas)는 바로 신 파리지앙 현상을 태연한 시선과 세련된 필치로 시인 보들레드가 정의한 것처럼 “겉모습에 담긴 일상의 변화상(the daily metamorphosis of exterior things)”을 마치 풍속화 또는 길거리 패션 스냅샷처럼 기록했다.

시인 말라르메는 마네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신체와 옷은 빛 속에서 “본질과 물리적 특성이 사라졌다”고 표현했고, 문필가 공쿠르 형제는 “빛과 그림자가 부리는 마술로 인해서 그림 속 인물과 옷의 실체가 변했다”고 했다. 인상주의 그림 속에서 드디어 인물은 더 이상 자연환경으로부터 도드라져 보이는 독자적인 초상으로써가 아니라 자연 환경의 일부가 되어  묻어들었다.

10. James Tissot_Portrait du marquis de Miramon_1865

제임스 티소(James Tissot, 1836 – 1905) 《미라몽 후작 부부와 자녀들 초상(Portrait du marquis et de la marquise de Miramon et de leurs enfants)》 1865 캔버스에 유채, 177 x 217 cm Paris, Musée d’Orsay © RMN (Musée d’Orsay) / Hervé Lewandowski.

이 즈음인 1860-1880년대, 인상주의 그림의 미학에 물들은 패션 잡지들 – 예컨대, 《라 모드 일뤼스트레(La Mode Illustrée)》나 《주르날 데 드모아젤(Journal des Demoiselles)》- 은 빛 속에 녹아들어 태양의 변화와 더불어 시시각각 변화하는 사람들의 자태와 의상을 정기간행물로 출판해 대중화시켰고, 근대 파리인들은 잡지 속 이미지를 지침 삼아서 최신 패션 유행을 일상에서 옷 맞춰입기에 응용했다.

당시 파리인들은 어떤 표정을 얼굴에 머금고 어떤 패션을 구가하며 어떤 장소에 모여 비즈니스 대화를 나누고 사교를 하고 여가를 보냈을까? 티소(Tissot)나 스티븐스(Stevens)가 그린 파리 여성들 초상화들은 프랑스 제2제국과 초기 제3제국 시대(제2공화국과 제3공화국 사이 나폴레온 3세 통치기)에 귀족과 고위급 사교계 여성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우아한 패션과 몸가짐 관리방식을 관찰하는데 매우 유용한 자료 역할을 한다.

06.Renoir_Jeune Femme à la voilette

피에르-오귀스트 르노아르(Pierre-Auguste Renoir, 1841-1919) 《베일을 쓴 젋은 여인(Jeune femme à la voilette), 1870 캔버스에 유채, 61 x 51 cm Paris, musée d’Orsay © Musée d’Orsay, dist. RMN / Patrice Schmidt.

그러나 보다 대중적 수준에서 파리의 신시대 패션과 행동방식을 더 잘 보여주는 시각 자료는 마네, 모네, 르노아르, 드가, 카유보뜨의 그림 속에 담겨있다. 이 시대 도회지 신흥 중상층 여성들은 격조 높고 격식에 얽매인 드레스와 고가의 악세서리 보다는 한결 활동에 편하고 실용적인 패션을 선택하는 경향을 보였다.

예를 들어, 그림 속에 등장한 중상층 여성들은 제국 시대풍 크리놀린 드레스 스타일에서 벗어나서 간소화된 티 드레스나 워킹 드레스를 입었고, 거추장스럽게 장황하거나 값비싼 장신구 대신에 보터 모자, 베일, 숄, 펠리스(안에 털을 단 긴 코트) 등을 걸쳐 멋을 냈다.

그런가하면, 르노아르가 그린 《샤르팡티에 여사와 자녀들의 초상(Madame Charpentier et ses enfants)》(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소장)과 마네가 그린 《나나(Nana)》(함부르크 쿤스트할레 소장)는 여간해서 전시회를 통해서 보기 어려운 작품들로서, 전자는 당시 파리의 저명한 출판사 발행인의 아내와 두 딸의 모습을 담은 전통 초상화풍 회화이며 후자는 당시 파리몽마르트에 널리 찾아볼 수 있었던 고급 매춘부나 애첩들이 어떻게 침실을 꾸미고  어떤 속옷 패션을 구가했는지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자료 그림이다.

11.Bazille_Réunion de famille

프레데릭 바지유(Frédéric Bazille, 1841-1870) 《가족 모임(Réunion de famille)》 1867 캔버스에 유채, 152 x 230 cm Paris, musée d’Orsay, acquis avec la participation de Marc Bazille, frère de l’artiste, 1905 © RMN (Musée d’Orsay) / Hervé Lewandowski.

이 전시의 첫 순회지는 파리 오르세 미술관(2012년 9월25일-2013년 1월20일)이며, 이어서 2013년 봄부터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과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The Art Institute of Chicago)로 차례로 옮겨져 순회전시될 예정이다. 이 전시 기획을 위해서 파리에 있는 파리 시립 패션 칼리에라 박물관(Musée Galliera – Musée de la Mode de la Ville de Paris)이 협찬했다. Image courtesy: Musée d’Orsay, Paris.

전시 장소: 파리 오르세 미술관 1층 주 전시장 | 전시 기간: 2012년 9월25일-2013년 1월20일.

Link

Pixar. 25 Years of Animation

Ricky Nierva, Mike Color Study, Monsters, Inc., 2001 Marker and pencil on photocopy © 2012 Disney Enterprises, Inc./Pixar.

Ricky Nierva, Mike Color Study, Monsters, Inc., 2001 Marker and pencil on photocopy © 2012 Disney Enterprises, Inc./Pixar.

Adventurous toy figures, lively racing cars and a rat chef – the exhibition PIXAR: 25 Years of Animation at the MKG in Hamburg provides insights into the fascinating creative process of making animated films.

Computers play a key role in the making of the animated movies, but those films would not have been possible without the foundational work by illustrators, graphic designers, animation artists, and model sculptors. All photos courtesy: Museum für Kunst und Gewerbe Hamburg.

penccil : PIXAR 25 YEARS OF ANIMATION

OBJECT Rotterdam 2013 Trend Report

OBJECT ROTTERDAM 2013

OBJECT Rotterdam 2012 - Victor Hunt - Maarten de Ceulaer Balloon Bowls - photo Matthijs Borghgraef_sm

빅토르 헌트와 마아르텐 데 소일레르 협동작 – 풍선 주발 도자기 시리즈 (Victor Hunt – Maarten de Ceulaer Balloon Bowls). Photo by Matthijs Borgharaef.

올초 2월7일부터 10일까지 3일 동안 네덜란드의 제2도시 로텔담에서는 예년에 이어서 또다시 오브젝트 로텔담 현대 디자인 페어 행사 문을 열었다. 2000년도 처음 설립된 이 행사는 이제 갓 디자인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위해 기지개를 펴고 있는 네덜란드의 젊은 디자이너 유망주와 그들의 작품들을 통해서 올 한 해 및 차후 몇 년 디자인계를 주도할 스타일, 트렌드, 담론을 가늠해 보는 것을 취지로 한다.

물론 최근 전세계 여러 국가와 도시에서 서로 경쟁하듯 우후죽숙 열리고 내리는 디자인 페어 행사들은 대체로 국제 행사임을 선언한다. 경우는 오브젝트 로텔담의 경우도 마찬가지지만 실제로 페어장을 돌아본 디자인 관계자난 관객은 네덜란드 현재 최신 디자인계를 한 눈에 정리해 보는데 더 유용한 행사임을 눈치채게 된다.

OBJECT Rotterdam 2012 - Galery Judy Straten - Richard Hutten - Book Stool_sm

리쳐드 허튼 (Richard Hutten)이 디자인한 책 의자 (Book Stool)는 쥬디 스트랜트 화랑 (Galerie Judy Stratens) 부스에서 전시되었다.

이 행사의 전반적인 전시 구성은 디자인계 여러 제도권과 디자이너가 뒤섞여 협력하고, 각 예술 분야와 디자인이 경계가 허물어졌고, 디자인 여러 분야 사이의 경계도 전에 없이 모호해졌다. 문자 그대로 정도로 다분야 (multi-disciplinary) 시대를 선언한다.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포함한 디자인 제도권, 디자인 연구소, 사설 화랑, 개별 디자이너 또는 컬렉티브형 디자인 그룹이 모두 참여할 수 있으며 전시 형태는 단순한 제품 나열형 전시에서부터 기획력이 강조된 특별 전시, 특별 컬렉션 발표회, 다분야간 전문 디자이너들 사이의 협력 등 제한이 없다. 예컨대, 장신구 디자이너인 디니에 베셈스(Dinie Besems)는 그녀가 제작한 레디-투-웨어 장신구를 직접 몸에 걸치고 관객을 만나는 퍼포먼스 전시를 펼치기도 했다.

OBJECT Rotterdam 2012 - De Laive and Wandschappen, Barbara Broekman - photo Pauline Egge 2_sm

De Laive and Wandschapppen, Barbar Broekman collaboration. Photo by Pauline Egge.

그 결과, 이번 박람회에서 새로 불어닥친 창조 트렌드는 단연 “협력(collaboration)”이다. 쥬디 스트래튼 갤러리 소속 디자이너 리쳐드 허튼(Richard Hutten)은 기발한 아이디어로 이미 현대 디자인계에서 잘 알려져 있는 디자이너. 미국 워싱턴에서 온 인터스트리 갤러리 소속 테호 레미(Tejo Remy)는 페엔호리젠(Veenhuizen)과의 협력하여 우트레히트 중앙박물관에서 전시한적 있는 나인톄 (Nijntje) 컬렉션을 가져와 다시 한 번 선보였다.

네덜란드 출신의 도자예술가인 마아이케 로오젠부르크(Maaike Roozenburg)도 로텔담에 있는 보이만스 반 보이닝켄 디자인 미술관과 협력한 도자기로 된 각종 조리용기와 테이블웨어 일체를 이번 행사에서 최초로 대중에게 공개했다. 그런가하면 네덜란드의 가구 생산업체 파스토에(Pastoe) 사는 이미 오래전부터 유명 예술인들과의 창조적 협력을 해 오기로 유명한 회사. 올해는 이 회사를 창립한지 100주년되는 해임을 기념해 사진예술가 커플 셸텐스와 아베네스 (Scheltens & Abbenes)를 초대하여 한정 수량의 100주년 기념 찬장을 전시했다. 종합 예술디자인을 추구하는 디자인 커플인 반트샤펜(Wandschappen)은 자연주의 직물 디자이너인 크리스티엔 마인더스마(Christien Meinderstma)는 독특하게 디자인된 아트북과 니트 직물의 조화를 시도해 관객의 이목을 끌었다.

OBJECT Rotterdam 2012 - Studio MKGK, Raw Color and Jo Meesters_sm

Interior and photography collaboration by Sutdio MKGK, Raw Color & Jo Meesters.

오브젝트 로텔담은 무엇보다도 젊은 유망주 디자이너들의 작품을 한 자리에서 종합적으로 브리뷰해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특히 올해 페어장에서는 스뉴디오 렌스 (Studio rENs), 프롤리스 호버스(Floris Hovers)와 스뉴디오 츠워드(Studio Zward) 장신구 디자이너 리나-마리에 쾨펜(Lina-Marie Koeppen)과 로오스 곰페르츠(Roos Gomperts)의 협동작이 눈에 띄었다.

아인트호벤 디자인 아카데미에서 갓 졸업한 이 두 디자이너들은 찬란한 색상의 제품 디자인 시리즈를 선보인다. 누가 세상에는 이미 너무 많은 의자가 디자인되어 있다고 한탄했는가? – 이에 아랑곳없이 제텔 재단(Zetel Foundation)은 신세대 유망 디자이너들이 디자인한 독득한 의자들을 전시판매했다.

전시장 설계와 디자인은 로텔담에 사무실을 두고 있는 전시 디자인 에이전시인 수퍼유즈 스튜디오스(Superuse Studios, 이전 2012Architecten에서 회사명을 변경했다.)가 담당했다. 올해 페어 행사장 입장료는 5유로. 같은 시기 역시 로텔담에서 행사중인 로 아트 페어(Raw Art Fair)장으로 오갈 수 있는 셔틀버스도 운영된다. All images courtesy: OBJECT Rotterdam, 2013.

독일 디자인 어제와 오늘

GERMAN DESIGN PAST & PRESENT

Grcic_Chair-One_2002

콘스탄틴 그르치치가 디자인한 Chair One은 2002년 이탈리아의 가구생산업체 마지스(Magis) 사에서 출시되었다. 2007년 런던 디자인 뮤지엄에서 열린 『25/25 – Celebrating 25 Year of Design』 전에 전시된 모습. Photo: Luke Hayes.

Design in the Global Age – 요즘과 같은 고도의 글로벌화 시대 속에서 디자인의 국가적 특성과 차별성은 급격하게 희미해져 가고 있다. 20세기 근대화가 낳은 교통수단과 통신 기술의 발달에 힘입어서 오늘날 현대인들은 실시간으로 전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물론 신기술과 신제품에 접하고 경험할 수 있게 되었다. 말 그대로 글로벌화가 보편화된 지금에 와서 디자인의 국가적 특성을 고찰하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외양 면에서나 품질 면에서 보편화되고 동질화되어 가는 현대인들의 시각 환경 속에서 각 나라마다 지닌 독특한 디자인 문화 전통과 물질 문화 철학을 살펴 본다 함은 급속한 과학 및 기술의 발달과 지식 및 정보의 확산이 지배하는 요즘 경제적 우위를 점하고자 추구하는 산업계에게는 국제시장에 대비하기 위한 전략으로써 그리고 일반 대중에게는 보다 개선되고 계몽된 환경 창조의 원동력으로써 좋은 영감을 제공해 주리라 기대된다.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 (From Follows Function.)” – 간결한 선매, 우수한 품질, 현대적인 기능성이 돋보이는 스타일링 – 독일 디자인을 세계적인 무대에 올려 놓은 그같은 평판은 바로 형태와 기능이 일체의 군더더기 없이 잘 어우러진 기능주의 미학이다. 형태 (form)와 기능 (function)을 주축으로 한 그같은 독일 전형의 디자인 미학이 탄생하기 까지에는 독일이 지난 한 세기 넘는 세월 동안 걸어온 근대사와 산업 발달 과정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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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터 그로피우스 (Walter Gropius), 아돌프 마이어 (Adolf Meyer), 에두아르트 베르너 (Eduardo Werner)가 공동 설계 디자인한 아에게 (AEG) 파르구스 구두 공장 건물로서 AEG의 총괄 디자이너이던 페터 베렌스의 영향이 느껴진다. 1911년 완공.

디자인계에서 가장 즐겨 사용되어 오고 있는 이 유명한 슬로건을 가장 충실하게 건축과 디자인 분야에서 발휘한 나라는 독일이다.

독일 바이마르에서 처음 설립된 근대 건축 및 디자인 학교인 바우하우스 (Bauhaus)는 1896년에 미국의 건축 디자이너였던 루이스 설리번 (Louis H. Sullivan)이 처음 창안한 이 모더니즘의 좌우명을 받아 들여서 바우하우스는 이전까지의 장식적인 군더더기를 일체 제거하고 일반 대중에게 표준화되고 기능적인 디자인 용품들을 저렴한 가격에 대량으로 보급하여 근대적인 생활 패턴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민주적’인 디자인을 제공하겠다는 인본주의적 사명감을 이룩하고자 했다.

독일 근대주의 미학의 요람 – 바우하우스 독일 국토의 중앙부 지점에 자리하고 있는 보수적인 도시 바이마르는 흔히 독일 근대 디자인의 탄생지로 일커어지곤 한다. 제1차 대전 종전 이후의 패전과 폐허의 상처를 달래며 1919년에 독일 출신의 건축가 겸 사상가인 발터 그로피우스 (Walter Gropius)가 초대 학장으로 출범한 바우하우스 학교는 지금까지도 서양 건축과 디자인의 역사에서 가히 20세기 서구 유럽에서 탄생한 가장 영향력 있는 건축 및 디자인 교육 기관으로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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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일색이던 바이마르 바우하우스 학교의 여성 디자이너 마리안네 브란드 (Marianne Brandt)가 디자인한 <찾주전자> 1924년작. The Beatrice G. Warren and Leila W. Redstone Fund. ⓒ Trustees of the British Museum.

그동안 바이마르 공화국의 재정지원을 받아 운영해 오던 바우하우스는 이 도시의 정치적 분위기가 학교 운영에 불리해 지자 1925년에 산업 발전에 한결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도시 데싸우 (Dessau)로 학교를 이전했다.

그러나 1930년대 초엽에 나치의 정치 및 군사적 세력이 더 한층 강해지자, 바우하우스는 나치의 탄압에 밀려 데싸우의 바우하우스 학교 문을 닫고 베를린으로 피신했다. 그 결과 베를린 바우하우스를 이끌던 미스 반 데어 로헤 (Ludwig Mies van der Rohe)는 근대주의적 이념을 탄압하는 나치의 탄압에 못이겨서 결국 1933년에 이 학교를 영원히 폐교한 후 미국으로 피신했다.

이렇게 해서 나치주의 정치의 물결이 전 독일을 휩쓴 1930년대 독일은 발터 그로피우스, 미스 반 데어 로헤, 마르셀 브로이어 (Marcel Breuer),  빌헬름 바겐펠트 (Wilhelm Wagenfeld), 마리안네 브란트(Marianne Brandt) 같은 독일 모더이즘의 거장들이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독일식 근대주의 건축 및 디자인 미학의 원리를 구축해 놓고 미국과 영국 등으로 망명의 길로 내몰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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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하우스 역사상 최대의 휴머니스트이자 거장 건축가 겸 디자이너인 루드비히 미스 반 데어 로헤의 <바르셀로나 (Barcelona)> 의자. 1929년 작.

양차 대전 사이기간 부터 제2차 세계 대전이 표면화되기 시작한 1920년대부터 1930년대는 독일 산업 디자인 업계가 굳건한 기반을 갖춘 결정적인 도약기이기도 했다. 바우하우스가 드높이 외친 모더니즘 미학과 근대적인 라이프스타일은 이 시기에 제품 디자인 업계가 새로운 경제적 돌파구를 마련하는데 적절한 방향을 제시해 준 셈이었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는 1920년대에 출범한 독일의 가전제품 업체 아에게 (AEG)의 설립과 함께 시작되었다. 독일은 페터 베렌스 (Peter Behrens)를 고용하여 AEG 사 최초의 통합된 기업 아이덴티티 로고를 만들어 독일 내외의 제품 시장에 각인시키기 시작했다.

독일의 기적적 경제 재건의 원동력 – 산업 디자인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53년에 바우하우스의 자취를 뒤이어 보다 진취적인 산업 디자인 미학을 개척하겠다는 취지이에서 울름 디자인 학교 (Ulm Hochschule fűr Gestaltung)가 발족되었다. 독일 출신 디자이너인 오틀 아이허 (Otl Aicher), 그의 아내 잉게 아이허-숄 (Inge Aicher-Scholl), 그리고 스위스 출신의 미술가 막스 빌 (Max Bill)이 공동으로 설립한 울름 디자인 학교는 19년 동안 운영을 해 오는 가운데 건축 및 산업 디자인 분야의 후학 양성은 물론 20세기 후반기 근대 독일 디자인이 세계적인 무대에서 주목을 받게 되기까지 여러 기여를 하였다. 특히 길이 기억되고 있는 울름 디자인 학교의 업적으로는 오틀 아이허가 직접 디자인한 1972년도 뮌헨 올림픽 아이덴티티 디자인, 오늘날까지도 독일 방방곡곡을 누비고 있는 고속 철도 기차와 전철 등이 대표적이다.

Rams_Braun_Shaver_1970

디터 람스가 디자인해 가전업체 브라운 사에서 1970년도에 출시한 전기 면도기.

독일의 산업 디자인 컨셉하면 뗄레야 뗄 수 없는 업체는 가전제품 생산업체인 브라운 (Braun) 사를 꼽는다. 독일 디자인의 르네상스라고도 일컬어지는 1960년대에 브라운을 이끈 디터 람스 (Dieter Rams)는 과거 울름 디자인 학교에서 가르쳤던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기능성 (functionality)과 기술력(technology)이 결합된 제품 미학을 추구한 영향력있는 디자인어로 인정받고 있다.

같은 시기 독일에서는 기타 디자인 분야에서도 우수한 품질과 독특한 디자인이 잘 어우러진 제품들로 세계 시장에서 유명해 지기 시작했다. 예컨대 제품 디자인 분야에서는 예나 글라스 (Jena Glas) 의 유리 제품과 도자기 용품, 라이카 (Leica) 고급 카메라, 뢰베 (Loewe) 가전 제품, 가구 디자인 분야에서는 빌칸 (Wilkhahn)과 비트라 (Vitra), 필기용품 분야에서는 라미 (Lamy)와 몽블랑(Montblanc), 조명 디자인 분야에는 에르코 (Erco)가 1960년대의 독일의 국가대표급 브랜드들로 떠 올랐다.

1970년대에 오면 이탈리아 아방가르드 디자인의 영향과 영미권의 팝 문화가 만연하게 된데에 영향을 받아서 독일의 디자인도 전보다 팝 아트적인 요소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외형적으로는 이전의 우직하고 심각해 보이는 분위기에서 다소 탈피하여 가볍고 명랑하면서도 감성적인 감각이 도입되기 시작했지만 이전까지 독일 디자인계가 고수해 오던 기능주의와 철저한 품질성에 대한 철학에는 변함이 없었다.

1970년대와 1980년대를 관통하면서 그같은 독일 디자인을 가장 잘 반영한 사례들로는 잉고 마우러(Ingo Maurer)와 토비아스 그라우 (Tobias Grau)의 조명 디자인, 포르셰 자동차(오스트리아 산)를 디자인한 바 있는 괴짜 가구 디자이너 루이지 콜라니 (Luigi Colani), 가구 디자이너 겸 디자인 화랑 운영인 헤르베르트 야콥 바이난트 (Herbert Jakob Weinand), 닐스 홀거 모오르만 (Nils Holger Moormann) 가구사 등이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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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더니즘 물결과 더불어 독일에 불어닥친 신 독일 디자인 운동의 대표적인 디자이너 루이지 콜라니 (Luigi Colani)의 등받이 의자 (Schlaufenstuhl) 1968년 작. Photo ⓒ Helmut Bauer.

하지만 1980년대에 접어들자 독일은 그동안 디터 람스가 주창했던 “우수한 형태 (Gute Form)’ 디자인 철학이 한풀 꺽이고 새로운 국면에 돌입했다. 이른바 “신 독일 디자인 (New German Design)” 운동이라고도 불리는 1980년대의 디자인 패러다임 전환은 당시 서구 사회를 휠쓸던 ‘포스트모더니즘 (Post-modernism)’의 등장과 함께 본격화되었다.

이와 발맞추어 신세대 독일 디자이너들은 더 이상 울름 디자인 학교가 가르친 순수 기능주의와 불멸의 영구주의의 도그마에 반기를 들고 인간 본유의 감각과 감성에 호소하는 보다 광범위한 개념의 디자인 컨셉을 하기 시작했다.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에 영향을 받은 1980년대의 신 독일 디자인은 새로운 디자인 붐과 디지틀 시대 (digital age)의 서막을 알리는 것이기도 했다. 프로그 디자인 (frogdesign) 사의 창업자였던 하트뭇 에쓸링거 (Hartmut Esslinger)는 1980년대 출시된 최신 마이크로프로세서 장착된 애플 클래식 컴퓨터 디자인을 위한 아주 새로운 인터페이스 디자인을 제시한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다. 아힘 하이네스 (Achim Heines)는 라이카의 카메라 의 그리고 크리스토프 뵈닝거즈 (Christoph Bőningers)는 지멘스 (Siemens) 가전제품 등의 인터페이스를 개선하는데 기여한 디자이너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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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방용품 제조업체 WMF가 2003년에 출시한 Lyric 포오크-나이프-숫가락 세트 제품군. ⓒ WMF AG.

글로벌리즘과 디지틀 혁명이 본격화된 1990년대 이후부터 오늘날에 이르는 현대 독일 디자인은 어느새 ‘독일적’이라기 보다는 ‘국제적’이라고 불릴 정도로 변모했다.

1960년대 이전까지 여타 그 어느 나라의 것들보다 독일 디자인을 두드러지게 했던 미니멀리즘풍의 단순간결한 미학과 엄격하고 절제된 기능주의 위주의 형태 보다는 곡선위주의 유기적이고 플라스틱 같은 신소재를 적극 도입한 감성지향적인 디자인 제품들이 잇따라 등장했다.

이는 ‘전형적인 독일’ 디자인이 글로벌화에 자리를 내 준 것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오늘날 출신 국가에서 머물고 있기 보다는 영국, 미국, 이탈리아와 같은 디자인 선진국에서 교육을 받고 더 크고 다양한 디자인 시장에서 경쟁하고 싶어하기 독일의 수많은 젊은 디자이너들이 보다 큰 국제 시장을 겨냥한 보편화된 디자인 양식을 추구하고 있는 때문이기도 하다.

그같은 대표적인 현대 독일 디자이너 콘스탄틴 그르치치 (Konstantin Grcic, 1965년 생)은 그의 본령인 가구 디자인 이외에도 유리, 세라믹, 플라스틱을 소재로 한 각종 제품 디자인에서도 세계적으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디자인 스튜디오 단위로 활동하고 있는 피닉스 제품 디자인 (Pheonix Product Design), 빈프리트 쇼이어 (Winfried Scheuer), 지거 디자인 (Sieger Design), 팀즈 디자인 (Teams Design), 포크트 운트 바쩨네거 (Vogt + Weizenegger) 등도 독일을 대표하는 디자인 업체들로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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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레드닷 뮤지엄 내 “산업 건축의 전당 (Cathedral of Industrial Architecture)”에 설치되어 있는 매달려 있는 아우디 자동차. Photo: Simon Bierwald.

최근에는 스포츠와 패션 디자인이 접목된 아디다스 (Adidas)의 운동화 디자인, 세계 최고의 성능, 첨단 엔지니어링, 현대적인 감성에 맞는 디자인으로 국제 자동차 업계를 공략하고 있는 폴크스바겐 (Volkswagen), 메르체데스 벤츠-다임러 크라이슬러 (현재는 Mercedes-Benz), BMW, 포르셰(Porsche), 아우디 (Audi) 자동차사들이 21세기 산업 디자인의 국제 양식을 선도하고 있다.

19세기와 20세기 초엽 서구 산업화 시대와는 달리 ‘디자인’과 ‘생산’이 급속하게 분리되어 버린 21세기 경제 생산 체제 속에서, 독일 디자인계의 미래는 ‘메이드 인 저머니 (Made in Germany)’ 보다는 ‘ 디자인드 인 저머니 (Designed in Germany)’가 지닌 디자인적 가치를 일관되게 추진해 나갈 것이라고 독일 디자인계 전략가들은 선언한다.

* 이 글은 본래 LG화학 사보 『공간사랑 』지 2006년 3월호 Design Nation 연재 컬럼에 실렸던 글임을 밝혀둡니다.

2013년 쾰른 가구 박람회 트렌드 리포트

TREND REPORT – imm cologne 2013

밀라노 가구박람회와 스톡홀름 가구 박람회와 더불어서 가구 및 인테리어 디자인에 관심있는 바이어, 소비자, 디자이너들이 가장 눈여겨 보는 쾰른 국제 가구 박람회(imm cologne). 올초 1월 14일-20일 6일 동안 쾰른 박람회장에서 막을 올린 이번 행사에서는 올 한해 동안 가구와 인테리어 디자인을 선도하게 될 최신 유행과 혁신 아이디어를 선보였다. 올 한해 가구 디자인과 인테리어 디자인은 어떤 방향으로 흐르게 될지 올 박람회 참가업체들이 제시한 전시회와 제품들을 통해서 정리해 본다.

Designer Luca Nichetto. Stand: Das Haus, Halle 3.1

Designer Luca Nichetto. Stand: Das Haus, Halle 3.1

소비자는 저가로 실속있는 제품을 원한다 쇼핑에 매우 익숙해진 오늘날의 현대인들은 같은 가격이라면 보기에만 좋은 제품 보다는 견고하고 좋은 품질의 제품을 고름다. 이는 고가의 제품일지라도 제품의 품질이 우수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소비자들은 잘 알고 있음을 뜻하기도 한다. 가구에 있어서 우수한 품질이란 디자인이 좋음을 뜻할 뿐만 아니라 우수한 소재를 사용하여 꼭 수공예품이 아닌 대량생산품일지라도 솜씨 좋은 기술자의 손길을 거친(또는 거친듯 해 보이는) 튼튼한 제품을 뜻한다.

쾰른 가구 박람회 측에 따르면 올해 전세계 가구 시장을 휩쓸 메가트렌드는 단연 자연(nature)주의라고 본다. 인테리어 환경의 “그린(green)”화 대세는 데코레이션과 악세서리 시장에서 뿐만 아니라 가구 디자인용 소재 선택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소비자들의 자연주의 소재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최근 전세계 가구생산업체들은 자연과 연관된 감성 – 자연미, 미가공, 오리지널성, 솔직함 – 을 주 컨셉으로 설정하고 이를 앞다투어 가구 디자인에 응용하고 있다.

예컨데, 참나무 소재로 한 테이블의 경우, 나무 그루그룻마다 다른 성장사와 목공장의 손길로 만들어져 저마다 다른 성격을 갖고 태어난다. 그런 제품을 사용하는 테이블 주인에 따라서 이 참나무 테이블은 또 다른 성격으로 길들여진다. 참나무 소재를 고르는 소비자들의 안목도 한결 세련화되고 있어서, 옹이가 있는지 없는지, 토탄지 성장 참나무인지, 적참나무인지, 연기에 그을림 처리된 참나무인지, 참나무 심재인지 등 목재에 대한 세부적 지식까지도 제품 선택 및 구입에 활용하는 추세다. 우아하고 고급스런 가구 소재로는 마로가니목이 여전히 가장 선호되고 있으나 한층 색상이 진한 고급 목재로 호두나무목도 고급스런 선택이다.

Stand: VENJAKOB, Halle 10.1

Stand: VENJAKOB, Halle 10.1

이처럼 자연 소재가 점점 소비자들 사이에서 높은 인기를 얻고 있는 사이, 천연 목재 외에도 가죽, 모직 펠트, 동물 가죽으로 겉천을 댄 포장가구도 유행을 끄는 추세다. 목재 가구용품은 거칠어보이는 마감처림와 비광택 표면처리를 하여 최대한 자연스러워 보이도록 응용하는 것이 대세며, 지난 몇 년 널리 활용되던 플라스틱 소재는 눈에 띄게 사라지고 그 대신 유리의 활용이 늘었다.

내장가구류는 예년에 비해 다소 덩치가 작아지고 있는 추세다. 특히 크지않은 공간에서 융통성있게 다용도로 활용될 수 있는 접이식 소파는 제한된 공간에서도 이동이 쉽고 여러 용도로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지만 또 사용하기에 재미를 준다. 특히 올해의 내장가구의 일반적인 특징은 푹신해 안락하고 코너를 둥그스름하게 처리하여 전체적으로 조화로운 분위기를 연출한다는 점이다.

Möbelmanufaktur, Halle 11.3

Möbelmanufaktur, Halle 11.3

침실가구 그 중에서도 특히 침대로는 미국식 “박스스프링(boxspring)” 타입이 널리 보편화되고 있는 현상이 뚜렷하다. 박스스프링 침대란 매트리스와 같은 크기로 스프링이 장착되어 있는 박스 모양 프레임으로 제작된 침대를 뜻하는데, 이 침대의 장점을 꼽으라면 단연 들고날기에 높이가 적당하다는 것일테다. 단, 주로 에어컨디션 시설이 잘 되어 있는 고급 호텔에서 즐겨 사용되는 이 푹신하고 편안한 침대를 가정에서 오래 편히 쓰려면 통풍시설을 원활화게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벽장식용 가구는 점점 표준화되어 가고 있는 추세다. 실내 공간의 불필요한 허비를 최소화하기 위해 특히 붙박이식 벽장 가구류는 가능한한 벽에 가깝고 납작하게 디자인되고 있다. 요즘 생산되는 벽장이나 캐비넷 가구는 소비자의 개별적 취향이나 편의에 맞게 원하는대로 선반을 이동하거나 가감할 수 있도록 디자인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평면화면 대형 텔레비젼의 보편화에 맞춰서 벽장들을 텔레비젼을 설치할 수 있는 공간도 구비하고 있다.

올해 새롭게 대두되는 색상 트렌드는 무엇일까? 쾰른 가구 박람회는 지난 몇 년에 이어서 올해도 소비자들이 원색 위주의 강하고 선명한 색상을 원하는 것으로 진단하는데, 특히 올해는 전세계에서 가장 대중적 인기가 높은 청색(blue)이 주도하게 될 것이라 본다. 반면, 올해부터 흰색의 승승장구 현상은 다소 주춤해질 것으로 예측된다. 특히 주방용 실내장식이나 가구로 각광받던 흰색은 점점 흑색이 다양한 강도로 섞인 여러톤의 회색으로 그 자리를 물려주며 유행에서 밀려날 추세다.

Stand: Bretz, Halle 11.1

Stand: Bretz, Halle 11.1

밝은색은 활기차고 우아한 효과를, 중간깊이의 색상 계열은 생동감있고 긍적적인 분위기를, 어두은 계열의 색상은 젊잖고 보수적인 느낌을 주는 가구를 선호하는 소비자층에 각각 어필하며 다양하게 활용될 것으로 보인다.

각종 가구내장에 활용되는 직물 트렌드는 점점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의 그림을 연상시키듯 패턴과 장식적 모티프가 두드러질 것으로 보인다. 최근 소비자들 사이에서 감촉이 좋고 푹신안락한 가구의 인기와 맞물려서 패턴 직물로는 각종 줄무늬, 날카롭고 추상적인 기하학적 무늬, 여성스런 꽃문양이나 식물문양이 인기를 끌 것으로 보인다.

조명장식 분야에서, 드디어 LED 즉 발광다이오드 기술은 조명 시장에서 이미 포화상태에 다달은 상태다. 그런가하면 실내장식이나 가구디자인에 응용하기 위해 구입을 원하는 소비자들은 아직도 전문 딜러로부터 주문해야 하는 유통상의 제약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LED 빛은 실내 분위기 연출에 효과적일 뿐만 아니라 전력소모가 적다는 장점 때문에 여전히 사무용 가구, 거실, 주방에 설치하려는 소비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다. 자료 참고: Verband der Deutschen Möbelindustrie, VD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