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thly Archives: November 2012

멋있게 사는 법 – 캘리포니아 스타일

캘리포니아 스타일에 담긴 “모던하게 사는 법”

개리 위노그랜드(Garry Winogrand) <미국인(American)> 로스앤젤레스 국제공항 모습, 1964년 작, 22.9 x 34.1 cm, 젤라틴 은판인쇄, The J. Paul Getty Museum, Los Angeles © 1984, The Estate of Garry Winogrand.

LIVING A GOOD LIFE – CALIFORNIA STYLE 1994년 개봉된 왕가위 감독의 홍콩영화 <중경삼림>에 보면 귀여운 여주인공 페이 (페이 웡 분)가 틈만 나면 이 히트팝송 <캘리포니아 드리밍(California Dreamin’)>을 크게 틀어 놓고 듣는 장면이 나온다. 페이에게 캘리포니아란 사랑하는 님과 한평생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꿈의 이상향이었던 것 같다.

한 평생 근사한 인생을 살고 싶은가? 그렇다면 캘리포니아로 가라! 미국 전체를 통틀어서 유독 캘리포니아 주는 ‘행복한 인생(Good Life)’의 심볼이었다. 일찍이 19세기 중엽에 달아올랐던 캘리포니아 골드러시는 오늘날 대도시 샌프란시스코가 탄생할 수 있게 해 준 부의 기반이 되어주었다. 경제 대공황이 미국 전역을 한창 괴롭히던 1920-40년대에도 로스앤젤레스만은 그에 아랑곳없이 헐리우드 스튜디오들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선 세계최대의 영화산업 단지이자 은막의 스타들이 모여산 초호화 주거지로 급성장했다.

“캘리포니아는 가장 극단적인 미국이다” – 20세기 미국 서부를 대표한 거장 소설가 월러스 스테그너(Wallace Stegner)는 1959년 캘리포니아를 가리켜서 이렇게 정의했다. 그도 그럴것이, 캘리포니아는 전통이라는 이름의 역사의 무게로 억눌린 유럽이나 아시아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역동성과 개방성을 자랑하는 ‘실험’의 땅이었다.(월러스 스테그너의 글 ‘캘리포니아:실험적 사회”중에서, <The Saturday Review> September 23, 1967, p.28) 오늘날, 디자인 혁신의 대명사 애플 컴퓨터는  제품마다 “Designed in California”를 자랑스럽게 새겨넣어 판매하고 있으며, 캘리포니아의 실리콘 밸리는 지금도 전세계 IT 혁신의 산실 역할을 하고 있다.

캘리포니아가 세계의 혁신적 디자인의 중심지로 거듭 탄생하며 ‘현대적으로 행복하게 사는 인생은 바로 이런 것’이라는 물질적 전형을 전세계인들에게 제시하기 시작한 때는 1950년대 부터다. 1930년대 미국의 경제 대공황에 이어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미국과 우방국가들의 승리로 마무되고 나자 이제 미국은 산업과 문화 분야에서 최강 세력으로 떠올랐다.

드디어 미국식 민주주의 유토피아의 시대가 기지개를 틀기 시작했고, 미국은 인류 역사 어디서도 전에 보지 못한 경제 발전과 물질적 풍요의 시대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덩달아 미국인들도 과거 20년여 지속된 경제적 문화적 공백기에서 벗어나 한결 풍요롭고 안락한 신세계를 갈구했다. 미국인들은 전보다 아름다운 의식주 생활을 누리기 시작했고 자가용 자동차의 대중화 덕분에 이동도 자유로워졌다.

레이먼드 로위가 디자인하여 1953년 출시된 스투드베이커 아반티 자동차 © Estate of Raymond Loewy.

쇼어드라이브의 아이콘격 도로인 하이웨이 원오원(Highway 101)을 타고 달리는 멋진 드라이브는 캘리포니아를 자동차로 거쳐간 운전가라면 지울수 없는  짜릿한 추억거리다. 오른편에는 수평선 저기까지 깊고 푸르게 빛나는 태평양해를, 왼편에는 절묘한 암벽을 낀 채 아름다운 두 남녀가 바람에 머릿결을 휘날리며 전속으로 질주한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로스앤젤레스 방향으로 이 도로를 따라 달리는 빨강색 레드 코르벳(Corvette) 스포츠카. 뉴욕에서 성공적인 그래픽 광과 디자인 회사를 차려 큰 돈을 번 레이먼드 로위(Raymond Loewy)도 자기가 직접 디자인한 미색 스두드베이커 아반티(Studebaker Avanti)를 몰고 이 길을 달렸다.

꿈결과도 같은 드라이브 끝에 두 남녀가 다달은 곳은 팜스프링스 사막 한 가운데 지어진 현대식 저택. 제2차 대전을 피해 오스트리아에서 이민 온 건축가 리쳐드 노이트라(Richard Neutra)가 설계한 이 집 안을 오가다보면 온통 자연이 내 것이 된 것 같다. 유리창이 높고 커서 하루종일 집 안으로 자연광이 가득 들고,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대지와 녹색 자연이 탁 펼쳐져 보이는 이 집을 가리켜서 건축학자들은 당시 캘리포니아의 대기에 그득하던 특유의 낙관적 발랄함, 거침없는 실험성, 신기술에 대한 포용적 태도를 한꺼번에 담은 미국식 민주주의의 구현이라고 평가한다.

샌프란시스코 출신 건축가 피에르 쾨니히(Pierre Koenig)가 1960년도에 설계한 스탈 하우스(Stahl House (일명 Case Study House #22))의 모습은 전설적인 건축사진가 줄리어스 슐만(Julius Shulman)이 찍었다. © J. Paul Getty Trust. Used with permission Photography Archive, Research Library, Getty.

이 시대 건축가들이 탁 트인 공간감과 현대식 감각을 한껏 표현할 수 있기까지 실은  제2차 세계대전 동안 개발된 첨단 군사기술과 신소재에 크게 빚지고 있었다한다. 벽과 기둥을 없애서 열린 공간을 연출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건축용 강철 기둥, 바닥부터 천정에 이르는 벽 높이의 통판유리창을 지탱해 주는 특수 강화유리 판넬, 그 유명한 찰스와 레이 이임즈 부부 디자이너가 의자 설계에 즐겨 활용한 섬유유리 소재는 모두 전쟁기에는 무기용으로 쓰이다가 평화시가 되자 일상 디자인 용품에 응용된 대표적인 첨단 소재들이다.

“아무리 좋은 디자인이라한들 팔리지 않으면 누가 알아줄터냐”고 당대 유명한 건축사진가 고 줄리어스 슐만(Julius Shulman)은 날카롭게 지적한 바있다. 이렇게 하여 캘리포니아에서는 미술관 전시회, 리테일 숍 매장, 광고, 각종 출판물, 영화 속 프로덕트 플레이스먼트를 총동원한 홍보통로를 한껏 활용하여 이른바 “캘리포니아 룩(California Look)”을 전 미국에 마케팅했다.

캘리포니아 디자인과 물질적 풍요를 향한 약속에 못지않게 소비자의 뇌리에 깊이 각인시켜야 하는 것은 바로 ‘캘리포니아’라는 이상 그 자체라는 감성 마케팅 전략도 이 때 본격적으로 응용되기 시작했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즈(Los Angeles)> 일간지는 이 “캘리포니아 룩” 창조에 한몫 거들며 특히 찰스와 레이 이임즈 부부의 인테리어 디자인, 반 케펠-그린(Van Keppel-Green)의 인도어/아웃도어 디자인, 아키텍쳐럴 포터리(Architectural Pottery) 등을 그 대표주자로 꼽았다.

스트라웁 & 헨즈먼 버프(Straub & Hensman Buff) 설계소가 디자인한 미르만 하우스(Mirman House)의 여가공간(캘리포니아 아카디아 소재). 1958년 설계. Photo: Julius Shulman, 1959년. © J. Paul Getty Trust. Julius Shulman Photography Archive. Research Library at the Getty Research Institute.

경제적 윤택, 물질적 풍요, 유쾌한 인생과 낙관주의가 지속되던 캘리포니아에서는  1960년대 말엽에 이르러 거침없는 성장과 소비주의를 비판하며 젊은이들 사이에서 번진 반문화운동이 캘리포니아식 행복한 인생관에 잠시나마 제동을 걸었다. 그러나 히피밴드였던 마마스 앤 파파스 조차도 1960년대말 뉴욕에서 추운 한겨울을 보내면서 “…캘리포니아에 있었더라면 편하고 따뜻하게 지내고 있을텐데…” 라며 캘리포니아의 따뜻한 기후와 느긋한 분위기를 동경했다.

캘리포니아 디자인 정신 속에 담긴 개방적 문화, 혁신주의, 그리고 인생은 지금보다 나아지고 풍요로와질 것이라는 낙관정신은 미국인은 물론 전세계인들이 지금도 미국으로 모여들게 하는 아메리칸 드림을 정착시켜준 문화적 증거로써 고스란히 남아있다. 20세기 후반기 캘리포니아식 모더니즘과 행복한 인생을 살펴볼 수 있는 전시 두 편 <포커스-로스앤젤레스> 전(LA 게티 미술관)과 <캘리포니아 모던 디자인> 전(LA 카운티 미술관)은 각각 올[2012년] 5월6일과 6월3일까지 계속된다. ♦ All Photos Courtesy Los Angeles County Museum of Art/The Getty Institute.

* 이 글은 본래 Chronos Korea 지 2012년 3/4월호에 실렸던 글을 다시 게재한 것입니다.

고독과 빛의 화가 빌헬름 함머쇠의 그림 속으로

Vilhelm Hammershøi – Danish Painter of Solitude and Light

빌헬름 함머쇼이 <실내 광경 – 피아노와 검정 드레스의 여인이 있는 거실> 1901년 작, 캔버스에 유채 © Ordrupgaard, Copenhagen.

바로크풍 로열 코펜하겐(Royal Copenhagen) 도자기, 1960년대풍 환상적인 가구 디자이너 베르너 판톤(Verner Panton), 레고(Lego) 어린이용 지능 장난감과 칼스베르크(Carlsberg) 맥주에 이르기까지 북구 유럽 나라 덴마크는 일상생활에 기능적인 실용주의 제품을 생산하여 전세계로 수출해 온 디자인과 무역의 강국이어 왔다.

이웃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인 스웨덴과 핀란드와 더불어서 공예와 산업 디자인 분야에서 보기좋고 품질이 우수한 디자인을 잘 만드는 나라로 알려져는 있지만 이 나라에도 국민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순수 미술 전통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

덴마크는 대륙권 유럽에서 떨어져 멀리 북구 유럽에 자리하고 있다는 지리적인 단점 때문에 수 백년 동안 이른바 유럽 문화의 중심지라고 여겨져 온 이탈리아와 이웃하지도 직접적인 연결통로도 지니지 못했다. 그런 이유로 해서 17세기에는 네덜란드와 북독일을 통해서, 그리고 북유럽 이웃 강국 스웨덴을 경유하여 간접적으로 주류 미술을 흡수하는데 만족해야 했다. 18세기말과 19세기 초엽, 신고전주의 시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덴마크는 독자적인 민족적 미술 정체성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때는 이른바 전 유럽이 모더니즘이라는 신시대의 도래로 잔뜩 전율하던 문화적 대격변기였다. 이 때에 이르러서 에커스베르크(C.W. Eckersberg), 크리스텐 쾹케(Christen Købke), 빌헬름 마스트란트(Wilhem Marstrand), 룬드비 (J. Th. Lundbye), 스코브고르(P. C. Skovgaard) 같은 화가들은 덴마크의 거리풍경과 일상적인 생활상을 풍경화나 조각작품으로 재현하곤 했는데, 그래서 덴마크인들은 이 때를 가리켜서 이 나라가 전후후무하게 미술을 통해 국가적 정체성을 재발견한 “문화의 황금 시대” (1790년부터 1850년까지 약 반세기 여에 걸쳐 지속)라고 부른다.

고독과 빛의 화가 빌헬름 함머쇠 19세기에서 20세기로 옮아가던 세기전환기의 근대인의 고립과 불안감이라는 시대적 증후를 덴마크적 정서로 구현한 미술이란 어떤 것일까? 비교해 보건대, 과거 미술계에서는 20세기 근대 회화 분야에서 덴마크가 한때 식민지로 호령했던 이웃나라 노르웨이의 표현주의 화가 뭉크의 아성에 대적할 만한 국보급 화가를 보유하고 있지 못하다고 여겨져 왔던게 사실이다.

빌헬름 함머쇠 <편치 음료를 담는 용기가 있는 실내 광경> 1904년 작, 캔버스에 유채 © Her Royal Highness Princess Benedikte of Denmark Foundation.

그러던 와중에 덴마크를 벗어나 국제 화단에서숨겨져 있던 덴마크 출신 화가 빌헬름 함머쇠(Vilhelm Hammershøi)에 대한 재발견은 스칸디나비아 대륙권 특히 덴마크의 화단을 다시 한 번 주목해 보게 만드는 신선한 바람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노르웨이의 뭉크(Edvard Munch)가 근대의 고립과 불안감을 들뜨고 동요하는 빨강과 녹색 물감과 격렬한 필치로 ‘절규’했다고 한다면, 덴마크의 함머쇠는 흑과 백을 오가는 침잠된 회색 물감과 정밀한 사실주의적 필치로 ‘서늘한 한숨’의 미술을 구현했다고 말할수 있겠다.

북구 유럽으로 눈돌리는 미술계
되돌이켜 보건대, 함머쇠는 덴마크의 미술전문가들 사이에서조차 일명 “덴마크 미술의 황금시대”라고 불리던 19세기 덴마크 신고전주의 미술 운동 속에서 지나쳐간 여러명의 화가들 중의 하나 정도로 여겨져 왔을 뿐 동시대 덴마크 화단에서 조차 제대로 인정도 이해받지도 못했던게 사실이다.

함머쇠가 스무살 나던 해인 1885년에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 선보였던 <소녀의 초상>이라는 제목으로 제출한 누이의 초상 그림은 전통에 너무 어긋났다는 점 때문에 혹평을 받았고, 이후 지금까지도 그를 유명하게 만든 아내 이다를 모델로 한 고독한 분위기의 실내 풍경화는 ‘그림 속의 내용이 결여’되어 있어서 뭔지 알 수 없다는 이유로 해서 화가 생전 고국에서는 인정을 받지 못했고 그 대신 이웃 나라 스웨덴에서 그의 그림들을 몇 점 구입해 갔다.

덴마크를 포함한 스칸디나비아의 미술을 잘 모른다고 손을 내저을 미술 애호가들이나 대중들이 많을 테지만 실은 이 지역의 미술에 대한 국제적 관심은 35년에 시작되었다. 함머쇠가 구미권 미술계에 얼굴을 내민 것은 지금보다 약 35년 전인 1982년.

미국 뉴욕의 근대미술관(MOMA)의 故 커크 바네도(Kirk Varnedoe) 큐레이터가 기획한 <북극광 : 1880-1910년 동안의 스칸디나비아 미술의 사실주의와 상징주의 (Northern Lights Realism and Symbolism in Scandinavian Painting 1880-1910)> 展이 미국에서는 최초로 19세기 말과 10세기 초에 이르는 20세기 초엽의 북구 회화를 점검하는 전시가 미국의 여려 대도시에서 순회전으로 열렸다. 이어서 1986년에 런던으로 옮겨와 헤이워드 갤러리에서 <한 여름 밤의 꿈 – 세기 전환기 스칸디나비아의 미술>이라는 전시로 이어져서 영국에서도 소개된 이래, 런던 내셔널 갤러리와 테이트 두 곳에 각각 한 작품씩 함머쇠의 그림들이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최근들어 스칸디나비아권에서도 유독 덴마크의 회화에 대하여 새롭게 불붙은 국제 미술계의 관심은 코펜하겐에 자리하고 있는 오르드룹고드 미술관 (Ordrupgaard Museum)에서 열린 전시를 출발로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의 <덴마크 화가 빌룸젠 (Wilumsen)의 상징주의에서 표현주의로> 展 (2006년 6월-9월)과 뉴욕의 솔로몬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연이어 개최된 덴마크 회화 전시회들을 통해서 다시 한 번 본격화되고 있다.

그 결과 북구 유럽 스칸디나비아의 미술에서도 유독 최근 국제 미술 시장에서 두각을 보이고 있는 덴마크 출신의 화가 빌헬름 함머쇠(Vilhelm Hammershøi, 1864-1916)는 덴마크의 국립 미술관들은 물론 일부 헌신적인 컬렉터들 사이에서 수 억 달러라는 고가에도 불구하고 앞다투어 사들여 가는 인기 미술 품목으로 떠오르고 있다.

빌헬름 함머쇠 <높은 유리창> 1913년 작, 캔버스에 유채 © Ordrupgaard, Copenhagen.

그토록 이 나라 국경 밖에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던 무명의 19세기 화가 함머쇠가 샛별 처럼 새로운 미술계 총아로 떠오르기 시작한 데에는 남몰래 그의 작품들을 사모은 소수의 해외 미술 컬렉터들의 영향도 컸다.

예컨대 막대한 재산가 겸 미술애호가였던 미국의 존 롭 2세  (John Loeb, Jr)는 지난 1980년대에 在 덴마크 미국대사로 코펜하겐에서 재직하던 중 당시만해도 아무도 거들떠 보지도 않던 함머쇠의 그림들에 매료되어 사설 미술품 딜러와 경매장을 경유하여 그의 작품을  저렴한 가격으로사 모으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여 시작된 존 롭 2세의 함머스호이 그림 소장품들은 30여점이 넘는 큰 컬렉션 규모로 불어나서 지금은 뉴욕 그리니치에 자리하고 있는 브루스 뮤지엄(Bruce Museum)에 영구 소장 전시되고 있다.

북구 유럽의 베르메르, 집 안에 갖힌 에드워드 호퍼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로 넘어가는 근대기 유럽인들이 시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간해서 받아들이고 싶어하지 않던 실존적인 쟁점이었다. 당연히 이를 그림을 통해서 솔직하게 표현하고자 했던 함머쇠의 미술은 보수적인 당대 덴마크 화단에서 이해받기 어려웠다. 그가 쉰 한 살의 나이로 암으로 세상을 뜬 해  1916년에 이를 때까지 그림을 통한 화가의 시대적 논평은 사회적인 인정을 받지 못하고 미술사의 뒤안길로 사라진채 잊혀 있었던 것은 바로 그래서 였을 것이다.

빌헬름 함머쇠의 그림을 보고 첫 눈에 반하기는 어렵다고 한다. 뭉크의 그림이 자아내는 고함치는 요란한 외침도 아니며 그렇다고 해서 20세기 초 미국의 국민적 정서의 정수를 그려서 대중 관객을 단순에 사로잡았다는 앤드류 와이어드 (Andrew Wyeth)나 노먼 락웰 (Norman Rockwell)의 실감나는 대중적 이미지도 아니다.

그러나 아내 이다 (Ida Ilsted)를 모델로 하여 적막하고 고요하고 서늘함이 가득한 화가 자신의 아파트 실내 공간을 반복적으로 그려가며 안절부절 못하는 근대인의 정신적 상태를 정적인 미학으로 표현하고자 시도했다는 점에서 오늘날 함머쇠는 덴마크 화단을 신고전주의에서 모더니즘으로 이끈 장본인으로 꼽힌다.

고요하고 적말해 보이는 함머쇠의 그림 속에는 뭔지 알 수 없지만 보는이의 호기심을 발동시키는 묘한 매력과 신비감이 감돈다. 그래서 함머쇠를 가리켜서 한 프랑스의 미술 평론가는 “북유럽의 베르메르”라는 별명을 붙였고, 영국의 한 평론가는 ‘네덜란드 풍속화가 베르메르와 고독의 대가인 미국 화가 에드워드 호퍼의 묘한 융합’이라고 정의하기도 했으며, 또 어떤 미술사가는 그가 연출한 묘한 분위기를 상징주의로 해석하기도 한다.

함머쇠는 이미 젊은 시절부터 검정과 백색 사이의 절묘한 조절을 통해서 극적인 명암의 효과를 혼자 터득한 빛의 귀재였다. 스물두살 되던 해에 벨기에와 네덜란드를 여행하면서 17세기 네덜란드 풍속화의 거장 베르메르의 그림을 보고 실내 광경 속에 포즈를 취하고 있는 정적(靜的)인 인물들을 통해서 웬지 알 수 없는 신비로움과 극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화면을 구축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889년, 당시 구미권의 최첨단 미술 문화가 한 자리에 모인다는 문화 최전방 전시장 파리 세계 국제 박람회를 방문한 함머쇠는 여인초상화 속의 여성의 팔뚝 핏줄까지도 튕겨나올 듯 생생하게 묘사한 미국의 사실주의 화가 휘슬러 (James Abbott McNeill Whistler)의 그림을 보고 그 속에 구사된 능수능란한 채색수법과 절묘한 명암처리법을 배워 갔다.

빌헬름 함머쇠 <독서하는 여인> 1908년작, 캔버스에 유채 © Kunstmuseet Brundlund Slot, Aabenraa, Dinamarca.

친구가 많지 않고 수줍음을 잘 타던 성격의 소유자 빌헬름 함머쇠는 주변에 많은 화가 동료들과 널리 교류하거나 친분을 맺지 않은채 홀로 그림그리기를 한 외톨이였으나 그의 고향 수도 코펜하겐은 대체로 아늑하고 편안한 거주지 겸 작업실 역할이 되어 주었다.

어릴적부터 미술에 남다른 재능을 보여서 8살부터 부모의 지원하에 그림 사사를 받았고, 청년기 한창 덴마크의 황금 시대의 대표 주자이던 사실주의 화가 페더 세베린 크뢰에르(Peder Severin Krøyer)의 사사 아래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서 미술 공부를 하며 별다른 어려움없이 중산층적 생활을 영위하며 살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근대인의 고독과 공허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머쇠의 실내 풍경화 속에는 언제나 알 수 없는 얼어붙은 듯한 슬픔과 멜랑콜리로 그득하다. 그의 회화 캔보스 속에는 흑색과 백색을 오가는 침잠된 회색톤 일색인데다가 텅 빈 중산층 아파트 가정 실내 풍경 속에는 늘 관객을 향해 등을 보이고 있는 우울한 표정과 검정색 드레스 차림의 여성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그림 속의 실내는 화가가 생전 평생 거주했던 코펜하겐의 크리스티안하븐 구역 스트란트가데 街 상의 아파트이고, 시선을 아래로 내리깐채 등장하는 여인네는 화가의 아내 일다였음은 이미 미술사가들에 의해 오래전 확인된 바 있다.

안타깝게도 함머쇠와 아내에 대하여 짐작할 만한 친필 기록이나 출판물이 거의 남아 있질 않아 화가의 일생에 대해  확인할 만한 일화는 별로 남아 있는 것이 없지만 여러 간접 자료에 미루어보아 화가는 주로 집에서 지냈고 조용한 사생활을 매우 중시한 소심가였다. 그의 그림 모델이 되어 주었던 아내는 유전성 정신질환을 고질적으로 앓았다고 하는데 아마도 이것이 두 부부 사이에 아이가 없었던 원인이 아니었을까로 추측되고 있다.

화창한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어 태양을 뚫어지게 쳐다봐도 눈이 따갑지 않을 만큼 은은한 일광, 서늘한 기후 만큼이나 고독의 냉기가 감도는 북구인들의 기질, 텅 비었으면서도 괴벽스러울 정도로 깨끗하게 정돈된 실내 공간 – 단지 북구 유럽의 모더니즘기 근대적 징후라고만 치부하기에는 섬뜩할 정도로 오늘날까지도 덴마크는 함머쇠가 화폭 속에 구현한 바로 그 서늘함과 공허가 서려있다.

그렇다면 진정 함머쇼이는 가장 덴마크적인 국민화가라 불릴 수 있을까? 그에 대한 결론은 이 전시를 보는 관객들의 판단에 맏겨야 할 것 같다.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에 있는 오드룹고드 미술관에서 1월초까지 전시된 바 있는 함머쇼이 전시는 이어 스페인 바르셀로나 현대 문화 센터(Centre de Cultura Contemporània de Barcelona)에서 5월1일까지 계속된다. Photos courtesy: Centre de Cultura Contemporània de Barcelona.

* 이 글은 <오뜨> 지 2007년 3월호의 아트뉴스 컬럼에 실렸던 글을 다시 게재하는 것임을 밝혀 둡니다.

고통과 파토스로 전율하는 멕시코 근대 미술

EXHIBITION REVIEW

프리다 칼로 <2명의 프리다(Las dos Fridas)> 1939년
Oil on canvas, 174 x 173 cm
© Museo de Arte Moderno, Mexico City.

타협을 불허하듯 꿰뚫는 시선, 어딘가 모르게 도발적이면서도 항의하는듯 진지한 표정, 강렬한 색채와 나이브 아트를 연상시키듯 어리숙해 보이는 필치.

오늘날 멕시코 미술계의 국제 외교관이라 불러도 모자름 없을 만큼 널리 알려져 있는 멕시코 출신의 근대기 여류 화가 프리다 칼로(Frida Kahlo)는 미술계 내에서는 물론 웬만큼 미술에 관심있다고 자처하는 일반 미술관람객들 사이에서도 이미 반 고흐, 피카소, 워홀 등과 같은 유명 화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친숙한 이름이 되었다.

20세기 전반기 멕시코 모더니즘기에 활동했던 화가 마누엘 곤잘레즈 세라노(Manuel Gonzales Serrano)는 칼로의 미술을 가리켜서 우울증과 카톨릭 종교에 대한 회의에서 오는 죄책감 사이에서 빚어진 정신적 불안정 상태를 표현한 것이라고 말한바 있다. 그런가하면 혹자는 뼈, 심장, 핏줄, 주검, 고통받는 신체 등 그녀의 그림에 곧잘 등장하는 신체적 폭력성은 화가의 고통과 사무치는 파토스의 표현이라고 말하며, 또 혹자는 고통을 노골적으로 표현함으로써 대리해소하는 멕시코인 특유의 블랙휴머라고도 해석한다.

1983년 헤이든 헤레라 (Hayden Herrera)가 쓴 프리다 칼로의 전기 출간이 촉발점이 된 이래, 칼로는 곧 1980-90년대 페미니즘 미술사 분야에서 최전선의 페미니스트 여류 화가로 평가받기 시작했다. 프리다 칼로는 충격적이고 강한 전율을 자아내는 그림 작품으로만 아니라 살아 생전에 헐리우드 스타를 무색케 할 정도로 떠들썩했던 사생활로도 자자하게 소문났던 글래머와 카리스마의 화신이기도 했다.

3년전 [2002년]에는 그녀의 파란만장했던 한평생이 『프리다』라는 타이틀의 헐리우드 영화 (2002년)로까지 만들어졌으며, 이어서 2005년 한 권의 책으로 출간된 칼로의 일기 『프리다 칼로의 일기-한 편의 은밀한 자화상 (The Diary of Frida Kahlo : An Intimate Self-portrait)』이 수많은 언어로 번역되어 전세계로 출판이 되었고, 팝스타 마돈나 같은 유명 연예인들은 앞다투어 프리다 칼로의 그림을 사 모으고 있다는 소식까지 들린다.

화려한 사생활과 더불어서 최근 새로운 경향의 미술사 연구에서 또 최근 새롭게 재발견되어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여류 근대 사진예술가로 티나 모도티 (Tina Modotti)를 꼽을 수 있다. 모도티는 이탈리아 태생이지만 1920년대 무렵 멕시코 혁명 (1910-1920년)을 끝으로 멕시코에서 한창 전개되고 있던 혁명 후기 정치적 예술적 정황과 격변에 자극을 받아서 멕시코로 건너와 작업을 했다.

아주 최근 까지만 해도 티나 모도티는 동료 근대 사진가이자 애인이었던 에드워드 웨스튼(Edward Weston)과의 정열적이고 다채로운 연애 행각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가 새삼 그녀의 작품세계로 미술사 학계의 관심이 몰리면서 또다른 멕시코 근대 미술계의 스타로 거듭 탄생한 경우다.

디에고 리베라 <루페 마린의 초상(Retrato de Lupe Marín)> 1938년 Oil on canvas 171,3 x 122,3 cm © Museo de Arte Moderno, Mexico City. 루페 마린은 디에고 리베라가 프리다 칼로에 앞서 첫 결혼한 전처였는데 타협을 모르는 야성적인 성격과 저돌적 태도 때문에 근대기 멕시코 여인의 전설적 전형으로 기억되는 여성이다.

그런가 하면 헌신적인 공산주의자, 소문난 여성편력가, 못말리는 허풍쟁이, 그러나 무엇보다도 근대 멕시코의 벽화운동 (El Muralismo Mexicano)의 3대 거장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는 이미 젊은 시절을 유럽에서 보내면서 미술을 공부했던 덕분에 아내였던 프리다 칼로 보다 훨씬 일찍이 유럽에서 이름을 알렸다.

아내 칼로가 신체적 불구와 병고와 싸우면서 집에 갖혀 자전적이고 자기주술적인 성향의 자화상을 그렸던데 반해서, 리베라는 국가 주도로 후원받아 1920년대에 걸쳐 멕시코 혁명 후 공산주의를 기초로 한 그의 신념과 유토피아 사회 건설에 대한 희망을 묘사한 초대형 벽화 그리기 프로젝트를 완성한 정치미술가였다.

맑스주의자였던 그의 명성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자본주의의 수호국인 미국에서 더 자자하게 널리 퍼졌는데, 특히 그는 1930년대 미국에서의 디트로이트 인스티튜트 오브 아트(Detroit Institute of Art)와 뉴욕 로커펠러 재단 빌딩(Rockefeller Center Building) 벽화 프로젝트를 맡아 멕시코 민속풍 이미지와 사회주의적 상징성이 강하게 담긴 그림을 그려서 명성과 스캔들을 한꺼번에 차지했다.

그로 인해서 경제공황기 미국에서 리베라는 토마스 하트 벤튼, 벤 샨, 잭슨 폴록, 필립 거스통 같은 젊은 후배격 미국 화가들이 본받은 배운 벽화의 본보기이가 스승이 되었다. 비록 지금은 프리다 칼로의 유명세에 눌려서 일반인들 사이의 인지도 목록에서는 다소 저 아래로 밀려 있지만, 근대 서양 미술사의 전개 과정에서 리베라가 1930년대와 이어 전후 미국과 유럽 미술가들에게 끼친 영향력은 훨씬 더 지대했었음을 엿볼 수 있다.

20세기 멕시코의 근대 화단을 논하기 위해서는 유럽과 미국을 포함한 보다 폭넓은 20세기 세계사적 맥락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하고 새로운 근대적 사상과 주의주장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폭발하고 있던 20세기초 근대기, 멕시코에서는 대서양 건너편 유럽으로부터 전해 온 신사고 물결과 멕시코 자생적 구조 변화가 한데 어우러져  새로운 기운으로 꿈틀대고 있었다.

호제 데이빗 알파로 시케이로스 (José David Alfaro Siqueiros)
 1947년
pyroxylin on celotex / glas fibre, 222 x 175 cm 
© Museo de Arte Moderno, Mexico City.

호제 데이빗 알파로 시케이로스 (José David Alfaro Siqueiros)
 <현재 우리의 모습(Our Present Image)> 1947년
pyroxylin on celotex / glas fibre, 222 x 175 cm 
© Museo de Arte Moderno, Mexico City.

1920년대까지도 유럽인들의 눈에 멕시코 화단은 과거 식민주의자들이 남긴 잔재 속에서 노예제, 빈곤, 기아, 제도적 부정부패 같은 과거의 족쇄와 사회주의라는 정치적 이상주의 사이에서 갈등하는 속에서 서서히 발전하는 선진 유럽 미술의 위성 실험장처럼 비춰졌다.

귤이 바다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고 하였던가. 1910년대에 유럽에서 앞다투어 전개되고 있던 여러 미술 신사조들, 예컨대 상징주의, 입체주의, 미래주의, 초현실주의 등은 1920년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멕시코로 유입되어 ‚에스트리덴티즘(Estridentismo)’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면서 멕시코 풍으로 토착화되었다.

멕시코의 화단에 불어닥친 다양한 유럽풍 신사조의 물결에 못지 않게 멕시코의 근대사 또한 격랑의 도가니였다. 사실상 전세계 역사를 통틀어 보건대 20세기 전반기 근대기는 어느나라와 문화권에서나 격변과 역동의 시기였으며 북미 대륙 남쪽에 자리하고 있는 라틴국가 멕시코의 경우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찬란한 고대 아츠텍 문명의 발상지던 멕시코의 역사는 16세기초 스페인의 침략, 점령, 식민 정권 이후로 수많은 인종, 언어, 문화가 뒤섞이며 그들 사이에서 빚어진 정치적 사회적 각축과 혼란으로 점철되어 왔다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다사다난했다. 스페인 식민주의자들을 비롯한 여러 유럽 이민자들과 멕시코땅 원주민들 사이의 폭넓은 인종간 교차 결혼이 늘어나면서 이른바 메스티조(Mestizo)로 불리는 스페인-인디오 원주민 혼혈자손들의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여 19세기 말 즈음이 되자 그 수는 멕시코 전체 인구의 60% 이상을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민족주의 추세가 당시 유럽을 비롯한 전세계를 사로잡고 있던 만큼 멕시코도 예외는 아니었고, 멕시코 내 혼혈인구의 증가는 곧 멕시코인들의 민족적 정체성과 혈통에 대한 자의식을 한층 고조시켰다. 스페인 제국의 보석땅 멕시코는 1824년 제국의 손아귀로 부터 벗어나서 독립을 얻게 되지만 안타깝게도 과거 스페인 제국의 기득권 세력이 남겨 놓고 간 부패와 부조리의 잔재까지 이어받아서 19세기가 다 끝나갈 때까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갈등과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브라함 안젤(Abraham Ángel) <작은 당나귀 (La mulita)> 1923년 Oil on cardboard 78 x 121,5 cm © Museo de Arte Moderno, Mexico City.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집권했던 멕시코의 강력한 지도자 포르피리오 디아즈(Porfirio Diaz)는 이 나라 운영의 모든 면에서 유럽풍을 추종했지만 곧이어 자파타(Emiliano Zapara)가 주도한 1910년 멕시코 혁명을 끝으로 종식되었다.

자파타 주도의 멕시코 토착적인 혁명군 정부는 전통 문화의 재인식이라는 과업을 기치로 내걸고 멕시코식 민족주의를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이때 집권한 제도적 혁명당 또는 줄여서 PRI는 2000년도까지 집권을 계속하여 20세기 동안 전세계에서 가장 장기 집권한 정권으로 기록되고 있다. 문화적으로, 디에고 리베라, 호세 오로스코 (Jose Orozco), 데이빗 알파로 시케이로스 (David Alfaro Siqueiros) 로 구성된 근대기 멕시코 벽화운동의 3두 마차의 시대가 열리게 된 것도 바로 이 시기이며, 누구보다도 멕시코인으로서의 뿌리를 중요하게 여겼던 프리다 칼로가 멕시코 전통의상인 테후아나 드레스와 볼레로를 패션 아이콘으로 즐겨 입기 시작한 때도 이 시기이다.

멕시코 출신의 근대 화가들은 저마다 어딘가 강렬한 카리즈마와 주술적 마력을 잔뜩 발산한다. 이는 어쩌면 근대기 미술가들이 그 시대를 살던 멕시코인들이 경험하고 있던 정치적 풍운과 생의 고통이라는 집단적 상태를 미술로 표현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고국의 계급적 부조리, 빈곤, 부패, 생의 고통 등 당시 멕시코가 당면하고 있던 문제를 표현한 리베라, 오로스코, 시케이로스의 벽화운동가들의 정치적 미술은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 규모상의 장대함과 주제상의 진지함에 압도되어 마치 엄숙한 종교화를 바라보고 있는 듯한 감흥을 안겨준다.

인간은 한낱 권력, 선동, 원시적 본능의 노예라고 본 오로스코는 흡사 미켈란젤로의 웅장한 조각상을 연상시키는 육중한 남성 누드를 그림에 그녀 넣는 것으로 해서 인류가 우매와 자멸에 빠지지 말것을 경고했다. 인간의 본능적 욕구와 근대적 진보라는 낙관주의를 향해서 회의적인 시선을 보낸 것은 시케이로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루피노 타마요(Rufino Tamayo) <자화상(Autorretrato)> 1967년작 Oil on canvas 178 x 127 cm © Museo de Arte Moderno, Mexico City.

그러나 모든 멕시코 화가들이 그림을 통해서 심각한 정치사회적 논평을 한 것은 아니었다.

야수파와 원시주의에 영향을 받은 듯 한 양식을 추구한 아브라함 안젤(Abraham Ángel), 피카소의 대형 인물화를 연상시키듯 커다란 캔버스에 붉은색 피부를 한 멕시코 여성 누드화를 즐겨 그린 마누엘 로드리게즈 로자노 (Manuel Rodriguez Lozano), 기하학적인 형태와 평면성을 강조하여 유럽의 모더니즘을 멕시코적 맥락에서 재해석한 루피노 다마요 (Rufino Tamayo) 등은 주변에서 일상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멕시코적 혈통과 전통 민속 문화를 화폭에 기록한 멕시코 민족 화가들이다.

자전적 개인사를 그림에 반영한 프리다 칼로의 작품들 중에서도 특히 높은 예술성을 인정받고 있는 작품 <2명의 프리다 (Las Dos Fridas)>(1939년)는 독일인 혈통과 원주민 혈통이 섞인 화가의 정체성은 곧 멕시코인들의 정체성과 같음을 시사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수박이 있는 정물화>(1953년)는 자연이 잉태한 과실을 통해서 관능과 생에 대한 열정을 표현했다.

미국을 중심으로 추상미술이 본격화함에 따라서 1950년대 이후부터 멕시코 화단에도 덩달아 추상주의 물결이 불어 닥쳤다. 이른바 ‚단절의 세대 (Generation of the Rupture)“로 불리는 새로운 유행이 자리잡은 이후로 멕시코는 아직도 20세기초 근대 회화 운동이 이룩했던 폭발적 예술성은 또다시 목도하지 못했다.

20세기 전반기 멕시코에서 숨가쁘게 전개된 모더니즘 미술 운동을 한 눈에 점검해 볼 수 있는 『멕시코 모더니즘 – 멕시코 시티 근대미술관 걸작전』은 오스트리아의 개인 현대미술관인 잠룽 에슬 (Sammlung Essl)에서 [2005년] 6월 12일까지 계속된다. Photos courtesy : Sammlung Essl.

전시 제목: 멕시코 모더니즘 – 멕시코 시티 근대미술관 걸작전 (Mexican Modern)
전시 장소: 오스트리아 빈 잠룽 에슬 현대미술관 (Sammlung Essl Kunst der Gegenwart)
전시 기간: 2005년 3월18일-6월12일

* 이 글은 본래 세종문화회관 월간 회원지『문화공간』 2005년 6월호에 실렸던 것임을 밝혀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