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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아테네 현대 미술의 심장부로

ATHENS – A NEW PLAYER IN CONTEMPORARY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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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아트 아티나 (Art Athina) 미술 페어 행사장 모습. Photo courtesy: Art Athina.

8월의 마지막 2주일간을 뜨겁게 달구면서 전세계인들의 이목을 한곳으로 집중시켰던 제28회 아네테 올림픽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 서양 문명의 발상지이자 올림픽 경기의 종주지 아테네시에서는 미술의 올림픽 경기라 해도 좋을 만큼 야심찬 예술 행사가 나란히 열리고 있었다.

찬란한 고대 문명과 문물이 한껏 꽃피웠던 고대 그리스. 수도 아테네가 자리하고 있는 아테네 섬 말고도 14개의 섬 무리로 구성되어 있는 그리스는 화창한 날씨와 느긋한 여가를 즐기러 오는 휴가철 여행객들의 천국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 나라에도 주목할 만한 현대 미술계가 있었던가?

중세 초기 비잔틴 문화에 이어 중세부터 20세기 초까지 이슬람권인 오스만투르크의 오랜 지배와 20세기 전반기에 걸쳐 이어진 발칸전쟁과 테오도로스 판갈로스의 독재정권으로 혼란과 지체를 경험했던 역사적 특성 때문에 이웃 서북부 유럽에서 한창 전개되었던 20세기 근대화 물결에 동참하지 못했다.

덕분에 그리스는 근대기 유럽에서 온 국제 양식에서 영향을 받은 그리스 전형의 근대주의 미술을 채 발전시킬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여유를 갖지 못했다. 오늘날 미술계 전문가들이 20세기 이후의 그리스 미술을 논할 때 그리스를 기독교적 개념상의 유럽권으로 포함시켜야 할지 아니면 동유럽 동남쪽에 자리한 ‘유럽의 화약고’ 발칸 지방으로 포함시켜야 할지 고민하는 것도 바로 그 같은 역사적 이유 때문이다. 그 결과 지난 반세기 동안 현대 미술 또한 뚜렷한 정체성이나 주목할 만한 특성을 구축하지 못한 채로 표류해오고 있었다는 미술계의 평가가 고작이었다.

그러나 그리스에도 현대 미술계는 분명 존재한다. 아직 파릇파릇하고 여린 연녹색 들풀에 비유할 수 있을까. 그리스 미술계는 변화와 발전의 기운으로 꿈틀대고 있으며 새로운 아이디어와 수완을 갖추고 현대 미술가를 발굴하고 매매하는 신세대 화랑업자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그리스는 자국의 독자적인 화랑업계 장려를 목표로 지난 1993년부터 아트 아티나 (Art Athina)라는 연례 미술 박람회를 주최하여 현대 미술의 대중적 보급과 인식 확산에 노력을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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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는 베르니에 엘리아데스 화랑(The Bernier / Eliades Gallery)은 1977년에 설립된 이래 현재는 현대미술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Photo courtesy: The Bernier / Eliades Gallery, Athens, Greece.

올 2004년 행사에는 전세계에서 찾아온 71개 사설 화랑들이 참여해 아테네 도시를 북적거리게 했다. 올 초 스페인 아르코 (ARCO) 현대 미술 박람회에서도 그리스의 2004 하계 올림픽 주최를 축하하는 의미에서 최근 아테네를 비롯한 그리스 여러 도시 곳곳에서 하나둘씩 문을 열기 시작한 신진 화랑들을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이 행사를 통해서 아직까지 그리스의 현대 미술계에 대해 잘 모르고 있던 미술계 관계자들과 언론들은 그동안 그리스의 대표적인 사설 화랑, 아트 딜러, 현대 미술 전시장 등을 발굴하는 기회를 맞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아테네의 데스테 현대미술 컬렉션 (Deste Collection) 특히 글로벌주의를 표방하며 그리스 현대 미술계의 총아로 떠오르고 있는 다키스 조아누 (Dakis Joannu)는 ‘그리스의 현대 미술 슈퍼 컬렉터’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미술 관련 언론계에서 다키스 조아누라는 이름은 숨은 관심거리로 잔뜩 주목을 받고 있다. 미국에 화장품업계의 거물 로널드 로더 (Ronald Lauder),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빌 게이츠 (Bill Gates), 음반업계의 데이비드 게펜 (David Geffen), 영국에 거물급 광고대행업체의 공동 소유자 찰스 사치(Charles Saatchi), 스위스에 엠마누엘 호프만 (Emmanuel Hoffmann)과 에른스트 바이얼러 (Ernst Beyeler)가 있다면 그리스에는 다키스 조아누가 있다고 자랑할 만큼 그가 그리스 현대 미술계에서 점하고 있는 위치는 자못 의미심장하다.

여타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진 구미권 미술 컬렉터들의 경우와 달리 거부의 사업가라고만 알려져 있는 현대 미술 컬렉터 다키스 조아누의 정체는 어딘지 모르게 신비로운 구석이 있다. 전시회 오프닝 행사나 기자회견에서 간단한 인사 연설을 하거나 주요 국제 현대 미술 박람회가 열릴 때마다 수많은 참관객들 사이에 묻힌 채 잠시 잠깐 나타났다가 연기처럼 사라지곤 하는 조아누는 아테네와 스위스 제네바를 오가며 거주하고 있는 데다 웬만해서는 언론매체의 개인 인터뷰에 응하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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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뉴멘트 투 나우 (Monument to Now)』 展 (22/6/2004 – 06/03/2005)이 열리고 있는 데스테 재단 현대미술관 외관 모습.

하지만 컬렉터로서 다키스 조아누의 명성이 처음 국제 미술계에 알려지기 시작한 때는 벌써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인 1983년, 조아누가 사업을 통해 벌어들인 막대한 부를 활용해서 사들인 현대 미술 작품들을 소장 관리하고 상설 전시하는 현대 미술관인 데스테 재단 현대 미술관 (DESTE Foundation for Contemporary Art  – 데스테란 그리스어 동사로 ‘보다 (to see)’라는 의미)을 설립하면서부터였다.

그러나 데스테 현대 미술관이 본격적으로 미술계의 관심을 끌기 시작한 것은 본래 있던 자리를 떠나 아테네시에서 최근 들어 급부상하고 있는 네오이오니아 (Neo Ionia)라는 트렌디한 상업구역에 옛 제지공장 창고를 뉴욕 건축가인 크리스찬 휴버트 (Christian Hubert)의 설계로 개조한 후 1998년 재개관하면서부터였다.

넉넉한 사유재산이 허락한 덕분에 조아누는 전세계적으로 지명도 높은 스타급 현대 미술 큐레이터들을 연이어 초청, 특별전시 기획을 통해서 자신이 그동안 수집해온 미술품들을 다각도로 해석하고 조명하는 전시회를 열어왔다. 니코스 차라람비디스는 이곳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는 그리스 출신 현대 미술가이며, 최근 구미 현대 미술계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점령한 미국 출신 행위미술가 매튜 바니 (Matthew Barney)는 지난 1998년에 이곳 데스테 현대 미술관을 통해 그리스 관객들에게 소개된 바 있다. 여성 현대 사진작가 피필로티 리스트 (Pipilotti Rist), 공상과학 만화를 모티브로 한 자화상 사진 작품으로 국제 미술 시장에서 주가를 올린 일본의 마리코 모리 등도 90년대 말 뉴욕, 런던, 도쿄 등 국제 미술 중심지에 이어 아테네를 거쳐갔다.

올해 데스테 재단 현대 미술관에서 아테네 올림픽 경기가 벌어지는 시기와 조율하여 ‘아테네 2004 문화’ 연합 이벤트의 일환으로 기획 전시 중(12월31일까지 계속)인 <모뉴먼트 투 나우(Monument to Now)> 展은 올해 그리스가 주최한 올림픽 경기 못지않게 화제를 불러일으킨 행사로 회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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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 켈리 (MIKE KELLEY) 작 Brown Star, 1991년, Stuffed animals, steel, strings. Photo courtesy: DESTE Foundation, Athens, Greece.

◈ 『모뉴멘트 투 나우 (Monument to Now)』 展: 그리스 방문객이라면 아테네 데스테 재단 현대 미술관이 선보이는 『모뉴멘트 투 나우』 展을 통해서 그리스 현대 미술계의 미래를 점쳐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전시는 요즘 전세계 곳곳에서 2년마다 거행되는 대규모 국제 미술 비엔날레를 뺨칠 만큼 작가들의 지명도, 작품 수준, 그리고 행사의 규모 면에서 컬렉터 다키스 조아누의 안목과 야심이 돋보이는 블록버스터급이다.

우선 이 전시를 기획한 큐레이터진만 봐도 그렇다. 뉴욕 뉴 뮤지엄의 큐레이터 댄 캐머런, 파리 퐁피두 센터 큐레이터 앨리스 진저라스, 이탈리아의 마시밀리아노 조니, 구겐하임의 낸시 스펙터, 그리고 뉴욕에서 온 화랑 딜러 제프리 다이치 이렇게 5인의 초호화판 기획진만으로도 데스테의 이번 『모뉴멘트 투 나우』 展이 현대 미술의 올림픽을 겨냥하고 있음을 충분히 짐작케 해준다.

나체 여성 모델들의 퍼포먼스 사진으로 유명한 바네사 비크로프트 (Vanessa Beecroft), 중국의 슈퍼스타 카이 구오-키양 (Cai Guo-Qiang), 논쟁성 짙은 설치물로 각광받는 마우리치오 카텔란 (Maurizio Cattelan), 아이슬랜드의 올라푸르 엘리아손 (Olafur Eliasson), 남아공의 양심을 미술로 표현하는 윌리엄 켄드리지 (William Kendridge), 악동 영 브리티시 아티스트 대미언 허스트 (Damien Hirst)와 크리스 오필리 (Chris Ofili), 일본의 슈퍼스타 다카시 무라카미 (Takashi Murakami), 아랍권 여성과 문화를 사진으로 논평하는 이란의 시린 네샷 (Shirin Neshat) 등은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고 있는 현대 미술의 대명사급 작가들.

작가들이 표방하고 있는 각기 색다르고 다양한 국적, 문화적 배경, 주제, 매체 등 어느 모로 보나 요즘 우리가 살고 있는 글로벌 시대를 한 전시로 압축해놓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지난 10여 년간의 현대 문화 특성을 교배 (Cross-Fertilization) 또는 혼성(Hybrid)이라고 본 아테네 사업가 다키스 조아누의 지적은 그의 이번 소장품 전시회가 잘 대변해주고 있다.

* 이 글은 본래 NOBLESSE 2004년 10월호 124페이지에 실렸던 글을 다시 게재하는 것임을 밝혀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