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thly Archives: January 2004

스페인의 자존심 말라가 피카소 미술관

고향의 품에 안긴 20세기 거장 화가 파블로 피카소

PICASSO MUSEUM IN MÁLAGA

이게 몇 번째 피카소 미술관이지요?
 – 프랑스 파리, 스페인 바르셀로나, 프랑스 리비에라 해안 안티베스에 있는 피카소 미술관들, 파리 국립 근대미술관, 죠르쥬 퐁피두 센터, 마드리드 레이나 소피아 국립 미술 센터, 스위스 바이얼러 재단 등 20세기 서양 근대 미술의 대가 파블로 피카소가 70평생 미술혼을 불태워 남긴 수백 편의 작품들을 대거 소장하고 있는 피카소 미술관들은 이미 전세계 여러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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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제오 피카소 말라가. Photo: Picasso Museum, Málaga.

이 거장이 한 번쯤 손을 대어 다루고 실험해 봤던 방대한 범위의 미술 사조와 기법적 탁월성은 차지하고라도 그 기나긴 미술가로서의 경력기 동안 쏟아낸 작품의 수량도 이루 다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이다.

지금까지도 전세계 대소 미술관들의 소장품들 말고도 이전까지 일반에 알려져 있지 않던 작품들이 추가로 틈틈이 개인 소장자들과 국제 미술 경매장과 박람회에서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 미술 컬렉터들과 전문가들을 놀라게 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지난 10월 27일, 스페인 남부에 자리한 태양과 바다의 휴양 도시 말라가에서는 피카소 미술관 뮤제오 피카소 말라가 (Museo Picasso Málaga)가 문을 열어 미술계와 대중 미술 애호가들 사이에서 조용한 화재거리로 떠올랐다. ‚아니 또 피카소 미술관을 열 만큼 피카소의 작품이 더 남아 있단 말이야?’ – 피카소 애호가들과 미술관계자들은 기존의 여러 피카소 미술관들을 뒤로 한 채 새로 지어진 이 말라가 피카소 미술관 신개관을 두고 어리둥절해 했다.

프랑스 파리, 스페인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 독일 뮌스터를 비롯해서 러시아의 에르미다쥬 박물관 내 피카소 갤러리에 이르기까지 이미 핵심적인 피카소의 미술 작품을 전문적으로 소장관리하며 대중 관객에 전시하고 있는 피카소 미술관과 전시장들을 통해서 웬만한 피카소 작품들은 알려질대로 알려져 있는 때문이다. 특히 파리에 있는 피카소 미술관은 이미 미술계 안팎에서 공히 피카소의 주옥같은 대표작을 가장 종합적이고 완결적으로 정리한 컬렉션으로 꼽히고 있다.

화가의 고향 말라가에 들어선 피카소 미술관
 말라가 피카소 미술관이 보유하고 있는 컬렉션은 다분히 가족적인 흥취로 가득하다. 말라가의 옛 도심부 유태인 거주구역 안에 16세기 르네상스풍으로 지어진 팔라시오 데 부에나비스타 (Palacio de Buenavista) 궁 자리를 차지하고 들어선 이 미술관의 피카소 소장품의 수는 총 204점.

1901년부터 말년인1972년까지 피카소가 남긴 이 작품들은 모두 화가의 며느리 크리스티네 루이즈-피카소 (Christine Ruiz-Picasso)와 손자 베르나르드 루이즈-피카소 (Bernard Ruiz-Picasso)가 화가로부터 유산으로 이어받아 보관해 온 개인 소장품들이 차지하고 있으며 주로 피카소가 말년에 그린 소품들과 미완성품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크리스티네 루이즈-피카소 여사는 이중 133점을, 그리고 베르나르드 루이즈-피카소는 22작품을 이 미술관에 기증하고 나머지를 장기 대여했다고 한다.

말라가 피카소 미술관 개관은 후안 카를로스 (King Juan Carlos) 스페인 왕가 부부와 말라가가 속해 있는 안달루시아 지방 정부의 전격적인 지원으로 성사된 지방정부적 차원의 결실이다. 지난 1998년부터 착수된 이 미술관 건립을 위해 안달루시아 지방정부가 투자한 금액은 6백만 유로, 그러니까 우리돈으로 8십8억여원에 달하는 액수이다. 그래서 안달루시아 지방 정부와 미술관측은 말라가의 유명한 해변가 (Costa di Sole)와 낭만을 찾아 온 여행객들을 한껏 더 붙잡아 들일 수 있는 관광 명소가 될 것이라는 기대도 잔뜩 하고 있다.

말라가는 지금도 옛 스페인 르네상스 시대의 고건축물과 아랍계 북아프리카의 고풍스런 분위기가 남아있는 피카소의 고향이다. 피카소는 생전 자기의 고향 말라가에 자신의 미술품을 소장전시하는 미술관을 열고 싶어했다고 말버릇처럼 곱씹었었다고 한다. 독재자 프랑코는 역시 스페인 출신의 거장 화가 달리 (Salvatore Dali)는 애지중지했지만 피카소는 퇴폐 (degenerate) 화가고 규정하며 피카소를 탐탁해 하지 않았다.

역으로 프랑코에 대한 혐오는 피카소 쪽도 마찬가지여서 화가는 프랑코가 정권에서 물러나기 전까지 절대로 스페인 땅에 발을 디디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고, 그로해서 피카소는 독재자 프랑코가 사망하기 2년전인 1973년에 결국 고국땅을 한 번 밟아보지 못한 채 그가 작업하며 평생을 보냈던 프랑스에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그런 사실을 미루어 볼 때 이번 말라가 피카소 미술관의 개관으로 해서 피카소는 죽어서나마 평생 못다한 원을 풀게 된 셈이 되었다.

서양 근대 화단 속 스페인을 대표하는 국민 화가
 오늘날에 와서 파블로 피카소 (1881출생 – 1973년 타계)를 두고 20세기 서양미술을 평정한 최고의 거장 화가라고 하는 평가는 상식처럼 되어 버렸다. 미술계 안에서는 일명 „쬐끄만 스페인 녀석 (little Spaniard)“이라는 애칭으로도 널리 불려지곤 했던 그는 지천명 (知天命)이라는 50의 나이에도 미치기 전  이미 20세기 근대 미술가의 가장 전형이자 근대 서양 미술에서는 더이상 흔들릴 수 없는 대가로서의 입지를 확고하게 굳힌 명사가 되어 있었다.

서양에서 미술이란 전통적으로 예술을 향유하고 소유하고 과시할 수 있는 극소수 엘리트층의 전유물이었다. 해서 15-16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천재 화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티치아노, 17세기 스페인의 인기 종교 화가 벨라스케즈, 18세기 네덜란드의 풍속화가 베르메르 (Jan Vermeer)도 그 당시로서는 미술 애호가들 속에서 널리 사랑받은 화가였다고 하나 그 향유층은 귀족이나 부유 상인계층에 불과했다.

그런데 반해서 피카소는 20세기 근현대를 통해서 대중매체라는 새로운 정보 수완의 덕을 톡톡히 받은 덕택에 미술사상에 전에 없는 폭넓은 대중적 인기를 확보하며 인기있는 공인 (公人)으로서의 미술 인생을 살고 간 행운아이기도 했다. 흔히 마르셀 뒤샹 (Marcel Duchamp)의 개념주의적 풍자 미술이 미술사에서 미술가들과 학자들 사이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을 지언정, 작업의 방대한 폭과 실험성 면에서나 폭넓은 대중적 인기 면에서는 피카소가 단연 우세하다. 아무리 미술에 대한 문외한이라 한들 피카소라는 이름은 한 번 쯤은 들어 보았을 터이며 그의 대표작 몇 점을 오고가며 보지 못한 자 없다.

ART = LIFE 그런 유명세 못지 않게 피카소를 둘러싼 끝없는 재해석과 평가, 뒷소문과 루머, 질시와 혐오는 지금도 가실줄 모르고 계속되고 있다. 실제로 대머리에 키작고 가무잡잡한 피부에 유난히 광채나는 눈빛과 다부진 체격의 키작은 이 스페인 녀석의 성격은 별난 구석도 있었다. 그는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하루일과의 대부분을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깎는데 보낸 열정과 다작 (多作)의 미술가이기도 했지만 그에 못지 않게 여인, 사랑, 태양, 좋은 음식과 와인을 포함한 생의 환희를 맘껏 누리길 좋아했던 쾌락주의자이기도 했다.

저항하기 어려운 매력과 날카로운 위트섞인 말재주로 작업실의 누드 모델에서 동료 화가들에 이르는 수많은 여성들의 흠모의 대상이었던 그는 또 한편으로는 여러명 두었던 아내들, 연인들, 자식들에게 거침없이 호통치고 주먹을 휘두르기도 했던 폭풍적인 성미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피카소의 그같은 짙은 남자다움 (machismo)은 그래서 이후 잭슨 폴록 (Jackson Pollock) 같은 남성적인 화가들과 한데 싸잡혀 페미니즘 계열 여성들로부터의 비난을 면치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여성들은 그치지 않고 피카소의 인생을 드나들었으며, 피카소는 일평생 정력적 예술가로서의 신화를 구축해 나갔다.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도 피카소는 여간 운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이미 스페인의 독재자 프랑코에 앞서서 1940-1945년 나치 독일군의 파리 점령기에 히틀러는 피카소를 퇴폐 화가라고 낙인했다. 파리의 수많은 보헤이먼 예술인들은 나치주의과 파시즘을 철저히 비난하는 입장이 일반적이었으나 유독 피카소만은 러시아의 독재자 스탈린에게 동정을 표시했다.

그런 과거에도 불구하고 피카소는 단 한 번도 냉전기 동안 미국측으로부터 정치적인 비난이나 제재를 받은 적 없이 미국은 전세계 미술감상인들로부터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스페인 내전기 프랑코 장군 (Francisco Franco) 장군이 스페인 북부도시 게르니카에 폭격을 가해 무고한 시민들이 학살되는 장면을 담은 그 유명한 『게르니카Guernica』(1937년 작, 현재 마드리드 레이나 소피아 국립 근대 미술관 소장)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강력하고 감동적인 반전 (反戰) 미술 작품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한국 전쟁을 참상을 폭로한 『한국에서의 학살 (Massacre in Korea)』(1951년 작)도 그에 못지 않은 정치참여적 요소를 담은 대작이다.

회화는 화가 감정의 표출 
흔히들 피카소를 20세기 근대 서양 미술의 가장 전형적인 모더니스트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는 당시 근대 유럽의 주류 미술계의 여타 동료 모더니즘 화가들과 활발한 교류관계를 유지하지도 그렇다고 해서 이념적 역사적인 사명감이란 것도 특별히 없었다. „내가 창조한 모든 것들은 현재를 위해서 언제나 현재에 존재할 것을 기대하며 만들어진 것들이다. 내가 뭔가 표현했다면 그것은 과거나 미래에 대한 생각없이 만들어진 것이다“라고 한 그는 한 때 자기는 그림의 힘에 이끌려 그림을 그릴 뿐이라고 말하면서 미술은 내면의 본질을 외면화하는 수단이라고 주장한 표현주의 미술이나 깊숙이 깔린 욕망, 무의식, 본능, 꿈을 표면 위로 끌어 올려 그림으로 그린다고 하는 상징주의 미술에도 거부감을 표현했었다.

그는 어린 소년기부터 탁월한 손재주와 천채적 기량을 지닌 그림쟁이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피조물을 있는 그대로 재현해 내는 사실주의 계열의 화가는 분명 아니었다. 그 유명한 피카소의 청색 시대 (Blue period), 분홍 시대 (Rose Period), 입체주의 (Cubism) 시대라는 양식별 시기구분을 거쳐 구축해 나간 피카소의 미술 세계는 그 만의 독자적인 범주를 창조했다. 흔히 대중 관객들로부터 큰 인기를 독차지 하고 있는 청색 시대와 분홍 시대의 그림들은 피카소가 20대 청년 시절에 그렸던 초창기 실험 단계였다. 고독과 가난에 절은 서커스 단원들이나 거리부랑아의 모습을 그린 그의 20대는 타고난 천재성이 아직 채 발휘되기 직전에 불과했다.

천성적으로 피카소는 치밀한 수학자도 그렇다고 해서 심오한 철학적 기질의 소유자도 아니었다. 그가 1910년대에 파리에 살면서 죠르쥬 브라크 (Georges Braque)와 협동으로 창안한 입체주의 양식이 탄생하기 까지는 엄밀히 말해서 브라크의 기여가 더 지배적이었다. 피카소 스스로는 끝내 입체주의 양식에 싫증을 내고 이탈했으며 근본적으로 추상주의 미술을 더 멀리 추구하지도 않았다.

1920-30년대에 정신분석학에 영향받아 파리에서 크게 유행했던 초현실주의에 피카소는 그다지 관심을 보인 적도 동인활동을 벌인 적도 없었다. 그대신 피카소는 인간의 몸과 얼굴을 맘껏 일그러뜨려서 피카소가 가장 관심있어 하던 에로스 (eros)와 죽음 (thanatos)과 연관된 욕망과 공포감을 기괴하면서도 에로틱한 전환시키거나, 고전 대가들의 양식을 재해석한 몽롱한 듯한 인물 초상을 즐겨 그렸다. 수많은 화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성 (sex)은 예술을 위한 영원한 영감의 원천이리라. 경우는 피카소도 예외는 아니어서 여성의 얼굴과 몸을 즐겨 그렸다. 특히 입체주의 실험을 끝내고 난 1920년대부터 꿈결같은 에로티즘을 표현한 여성 추상화는 피카소의 집착적인 주제가 되었다.

뭐니뭐니해도 피카소 미술의 최고 전성기는 근대 미술사의 분수령을 이룩한 작품 『아비뇽의 여인 (Les Demoiselles d’Avignon)』이 완성된 1907년부터 파시즘이 유럽 대륙을 휩쓸고 있던 1937년작 『게르니카』가 완성되기 까지 30년 동안 즉, 피카소가 50세를 넘어선 시점이었다고 전문가들을 말하지만 제2차 대전이 지나고 나서 1950-70년대까지도 피카소의 정력적인 활동은 계속되었다.

SALAVII

뮤제오 피카소 말라가 실내 전시장 광경. Photo: Picasso Museum, Málaga.

대가 (master)로서의 입지를 굳히고 난 중장년기의 피카소는 과거로 눈을 돌려 벨라스케즈 (Diego Velazquez,) 고야 (Francisco Goya), 푸생 (Nicholas Poussin), 들라크롸 (Eugène Delacroix), 마네 (Eduard Manet), 쿠르베 (Gustav Courbet) 같은 선배 대가들에게 바치는 작품들을 연속적으로 제작하는 것으로써 자신의 기량을 견줘보기도 했다. 1973년 세상을 뜨기까지 피카소의 작품 세계는 마치 피할 수 없는 죽음 미리 감지라도 한듯 집착증적이고 신경질적인 인상을 안겨 주었던 것으로 미술 전문가들은 평가한다.

귀향의 꿈을 이룬 피카소
 크리스티네와 베르나르드 루이즈-피카소의 개인 피카소 소장품이 대다수를 이루고 있는 204점의 말라가 미술관의 피카소 컬렉션은 엄밀히 평가해 보건대 피카소의 대표작들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이 두 피카소 가족들이 보관해 온 작품들의 대다수는 스케치 51점과 판화 63점 등 (그외 유화 49점, 조각 11점, 도자기 19점)이 차지하고 있어서 일반 관객들에게는 피카소 유화 작품들이 주는 시각적 압도감이 다소 부족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번 말라가 피카소 미술관 개막을 기념하기 위해 특수 기획된 특별전 『피카소 가족의 피카소 (El Picasso de Los Picasso)』 展(2003년 10월27일 – 2004년2월27일 까지)은 피카소가 생전 자신의 아내, 연인, 자녀들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 작품들을 전세계 미술관과 개인 소장가들로부터 대여해 와 전시하고 있어서 비록 사후에서 나마 끝내 고향과 가족의 품으로 돌아와 안긴 화가 피카소를 반기고 축하해 주고 있는 셈이다.

파블로 피카소의 며느리 크리스티네는, „말라가 피카소 미술관은 그 자체로서 한 편의 사랑 이야기라고 할 수 있지요. [독재자 프랑코로 인해서 평생을 프랑스에서 망명생활을 감수해야 했던] 미술 작품을 고향으로 가져오고 싶어했던 생전 고인故人의 꿈을 이뤄드리고 싶었습니다.“ 라고 요약한다.

* 이 글은  『오뜨』 지 2004년 1월호에 실렸던 기사를 다시 게재한 것임을 밝혀 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