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thly Archives: February 2003

영원히 건술중인 도시 베를린

BERLIN – CITY UNDER PERPETUAL CONTRUCTION

역사의 상처를 감싸안고 변화를 지속해 가는 도시 베를린의 건축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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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라이히스탁 독일 연방 국회의사당 건물중 영국의 거장 건축가 노먼 포스터가 개조 설계를 맡아 완성된 천정 돔 © danda.

비행기편으로 베를린에 막 도착한 방문객은 우선 이 도시가 지닌 깊은 역사적 흔적을 느끼기 시작한다. 베를린 템펠호프 공항 (Tempelhof Airport)은 독일 나치 시대의 건축 양식으로 지어져 어두운 독일 근현대 역사가 내리누르는 과거의 무게를 어깨에 짊어진채 오늘날까지 그 자리에 서있다. 템펠호프 공항은 에른스트 자게비일 (Ernst Sagebiel)이 설계해 1937년 개항했다.

히틀러의 뒤를 이은 대독일 지도자 겸 독일 공군 총사령관이던 헤르만 괴링 (Hermann Goering)이 총애하던 건축가 에리히 멘델존 (Erich Mendelshohn)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던 건축가 자게비일은 이 공항 설계를 통해서 나치 정권이 강요하던 극도로 경직된 양식을 극적으로 표현해 이후, 1980년대 베를린 시내 제임스 스털링 (James Stirling)의 설계로 지어진 베를린 과학센터 (Wissenschaftzentrum)가 탄생하는데 모형이 되어준 것으로 평가되곤 한다.

놀랍게도 이 공항은 미국의 펜타곤 국방부 다음으로 큰 면적을 자랑하면서도 좁게 설계된 항공기 이착륙로 때문에 개인 출퇴근용 항공기 경유지로 이용되어 오기도 했다. 오늘날 베를린 시민들은 공산주의의 침략으로 부터 이 도시를 보호해 준 옛 베를린 에어리프트 (Berlin AirLift) 공군 기지로서의 이 공항을 민주주의의 수호지라고 부르며 자랑스러워 한다.

롤랑 바르트 (Roland Barthes)는 베를린을 두고 „사랑과 웃음이 결여된 도시“라고 일컫는 것으로써 이 도시가 지닌 역사적 무게와 상처를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그도 그럴것이 실제 지난 일세기여 동안 베를린은 파란만장한 역사와 격변을 거쳐 온 가운데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베를린이 흔히 „항상 공사중에 있는 (in progress) 도시“라는 별명으로 불려 온 것도 그 때문이리라. 그만큼 독일은 물론 유럽의 역사적 변화가 이 도시의 건축물과 도시 설계에 끼친 영향을 숨가쁘게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일반인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그 유명한 브란덴부르크 문 (Brandenburg Gate)은 베를린을 둘러싼 성문(城門) 출입구로서, 18세기말경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치하 동안 지어져 현재는 나폴레옹 정권에 대한 프러시아군의 승리와 독일 비더마이어 (Biedermeier) 시대의 영광을 대변하는 아이콘이 되어 당당히 서있다.

시도때도 없이 관광객들로 북적대는 그 유명한 포츠다머 플라츠 (Potsdamer Platz)는 두 말 할 것 없이 통일 독일의 새수도 베를린으로서의 상징물이다. 포츠다머 플라츠는 19세기 프러시아 정권기 특유의 도시 설계 의도와 미감을 반영하고 있다.재공사 당시 각종 전문 건축 인부들이 지하수 밑으로 잠수해 콘크리트 공사를 하는가 하면 공사 전용 철로를 설치하는 등 독일이 자랑하는 최첨단 현대 건축 설계 기술을 일축해 과시해 보여 화재를 모은 곳도 바로 이 포츠다머 플라츠였다.

베를린 시내 구석구석과 스카이라인은 18, 19세기의 건축적 유산과 20세기의 국제적 건축 양식을 골고루 구비하고 있다. 시당국은 일명 „비판적 도시 재거설 (critical reconstruction)“, „역사적 요소에 대한 고려 (respect for the historical substance)“라는 도시 건설 원칙에 입각해 도시가 지닌 역사적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현대적인 신건축 공사를 단행하는데 역점을 두었다고 자랑해 왔다. 그같은 가장 대표적인 예는 노먼 포스터 (Sir Norman Foster) 경이 재디자인 개축한 라이히스탁 (Reichstag) 독일 연방 국회의사당 건물일 것이다.

90년대초, 크리스토 (Christo)가 라이히스톡 건물을 헝겊으로 포장하는 행위 미술을 전개했던 일은 베를린 시민들에게 세계사 한가운데에 선 듯한 크나큰 자긍심을 안겨주었다. 본래 1894년 지어져 1933년의 화재 사건 (이로 인해 히틀러 나치 지도자는 한 번도 이곳에서 공식적인 집권을 해 보지 못했다), 1945년 2차대전중 소련군 침략 등을 거치는 등 격동의 독일 근현대사를 경험한 장소이기도 하다. 무려 4년에 걸쳐 완공된 라이히스탁은 현재 관광객들의 출입을 허용하고 있어 그 유명한 노먼 포스터식 웅장한 풍의 유리 돔 천정을 감상할 수 있게 하고 있다.

20세기 초엽부터 1930년대까지만 해도 베를린은 ‚메트로폴리스 건설’을 겨냥한 중부 유럽 특유의 빽빽하고 밀도높은 건축 도시로서의 발전을 거듭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과 나치 정권의 패전을 겪고난 이후 도시의 대부분은 폭격과 총알의 흔적만 남긴채 거의 폐허되다시피 했다. 1945년 제2차대전 종전을 끝으로 베를린이 콘크리트 벽을 사이에 두고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으로 나뉜 후, 서베를린은 서방 자유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한 경제 재건 노력을 통해서 전흔의 기억과 고통을 지우려는 몸부림을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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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리베스킨트가 1998년에 설계한 베를린 유태인 박물관 © Jüdisches Museum Berlin Photo: Jens Ziehe.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걸친 냉전기 동안에는 정부 주도 도시 신건설 계획의 적극적인 추진하에 불도우저 바퀴흔적과 신축 건물들이 곳곳에 들어서 가고 있는 가운데, 베를린은 루 리드 (Lou Reed)와 데이빗 보위 (David Bowie)를 앞세운 급진적 대중문화와 이어 히피문화의 중심지로 떠 오르면서 독일 전역의 젊은이들이 대거 모여든 희망과 해방의 도시로 받아들여 지기도 했다.

1989년, 동서독을 가로 막았던 베를린 장벽이 허물어 진 이후 시정부가 주도한 도시 재건설 계획에 따라, 지난 10여년 동안 포츠다머 플라츠에서 쿨투르포룸 (Kulturforum) 건물이 자리해 있는 도심 일대는 신소재 건축자재와 유리로 광채를 발하는 모던한 신주거지 및 사무용 건축 구역으로 탈바꿈 해 버렸다.

건축가 조세프 조반니니 (Joseph Giovannini)는 한때 베를린의 도시 설계 및 건축 지침을 두고 국제적으로 유명한 스타 건축가들의 이름을 내세운 도시 미화 작업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한 적이 있다. 지난 20여년에 걸쳐 베를린를 메운 건축물들을 설계한 국제 디자이너들의 이름을 하나둘 거명하다 보면 어딘가 수긍이 갈 정도로 그 목록은 제법 화려하다. 그리고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정신이 담긴 건축물들도 자연스럽게 나란히 발견되곤 한다. 베를린 올림픽을 거행했던 베르너 마르흐 (Werner March)의 나치 올림픽 경기장은 지금도 옛 스와스티카 장식 하나하나까지 그대로 유지한 채 보존되어 있다.이 경기장 바로 근처에는 르 코르뷔지에 (Le Corbusier)가 설계한 위니뜨 다비따시옹 (Unite D’Habitation) 아파트 단지와 그다지 두드러져 보이지는 않지만90년대 중반의 자하 하디드 (Zaha Hadid) 초기작으로 꼽히는 강철 구조의 아파트 건물이 스트레세만스트라세 거리상에 숨은듯 서있다.

베를린를 통틀어 가장 기이한 양식을 자랑하는 건물은 현재 베를린 주식거래소로 활용되고 있는 루드비히 에르하르트 하우스 (Ludwig Erhard Haus). 니콜라스 그림쇼 (Nicolas Grimshaw)가 설계한 이 건물은 삐죽삐죽한 형태의 알루미늄 자재를 사용해 강렬한 표현성을 강조한 첨단 하이테크 빌딩으로서 베를린 시민들 사이에서 아르마딜로 (Armadillo)라는 별칭으로도 불리고 있다.

포츠다머 플라츠 마스터 플랜을 맡은 렌쪼 피아노 (Renzo Piano)를 비롯해서 리쳐드 로저스 (Richard Rogers), 헬뭇 얀 (Helmut Jahn), 한스 콜호프 (Hans Kollhoff) 등 포츠다머 플라츠 주변에 자리한 사무실, 상점, 아파트 건물들의 설계를 담당한 건축가들은 가히 내노라할 만하다.

프리드리히슈트라세에 위치한 갤러리 라파예트 백화점은 쟝 누벨 (Jean Nouvel)이, 브란덴부르크 문 뒤켠 파리저 플라츠 상에 있는 DC 은행 (DC Bank)은 프랭크 게리 (Frank O. Gehry)가, 트라이앵글 오피스 및 아파트 건물은 요제프 파울 클라이후스 (Joseph Paul Kleihues), 프리드리히슈트라세, 마우어슈트라세, 크라우젠슈트라세의 건물들은 필립 존슨 (Philip Johnson)이 각각 담당했으며, 이탈리아의 알도 로시 (Aldo Rossi)도 그 주변 주거용 아파트 건물 설계를 책임진 바 있다. 콜호프와 머피/얀 설계팀이 설계한 머피/양 타워 (Murphy/Jahn Tower)는 일명 소니 센터 (Sony Center)로도 불리는 초대형 유리 건물로서 베를린 시민들 사이에서 건축적 자랑거리로 꼽힌다.

그 같은 베를린 도심에서 벗어나 자리한 유태인 박물관 (Jewish Museum)은 다니엘 리베스킨트 (Daniel Liebeskind) 설계로 작년에 완공되어 대중에게 문을 열었다. 유태인 박물관은 여러개의 타워식 건물들로 둘러 싸여 있는데 그 가운데 주목을 끄는 것은 자우어브루흐 허튼 (Sauerbruch Hutton)설계팀의 GSW 에코 타워 (GSW eco-tower)로 독일과 영국의 건축 전통의 특유한 어우러짐을 선사한다고 평가되고 있다.

동서독의 통일 이후로 이 도시를 가로 막고 섰던 장벽의 흔적은 이제 찾아보기 어렵다. 거리 위에 장벽이 서 있던 자리가 표시되어 있던 흔적이 이따금씩 보이지만 장벽의 물리적 존재는 사라진지 오래다. 그렇지만 동서독 간의 심리적, 경제적, 사회문화적 격차는 통일 이후로 그다지 완화되지 못했음을 베를린의 옛동독 구역에 발을 디딛는 자라면 느낄 수 있다. 신고 (新古) 건축물들이 뒤섞여 한데 녹아들어 있는 서베를린과는 대조적으로 동베를린에서는 지금도 옛 나치식 건물이 두드러지게 눈에 띄곤 한다.

슐로스플라츠 (Schlossplatz)에 1967년 세워진 팔라스트 데어 레푸블릭 (Palast der Republik: 공화국의 궁전이라는 의미) 동독 국회의사당 (Parliament) 본부는 하얀색 대리석과 동(銅)과 유리가 부서진채 그대로 방치되어 빈 건물로 남아있다. 뿐만 아니라, 서독에서는 이미 오래전 폐기해 버린 노랑색 거리 전차가 지금도 동부 베를린의 한산한 거리를 운행하는 모습과 서늘한 시민들의 표정에서 공산주의가 지배하던 옛동독의 과거상을 엿보게 해 준다.

* 이 글은 본래 『ASIANA』 아시아나 항공 기내지 2003년 2월호에 실렸던 글을 다시 게재하는 것입니다.

한 사업가로부터 듣는 미술 컬렉터 되는 법

ART COLLECTING

아트 컬렉션을 향해 바치는 한 성공 사업가의 평생 열정

하나은행 트랜스트랜드 (Transtrend) 지 2001년 가을호 기사 첫 페이지. [이 기사에 등장하는 그 어떤 실제 인물과 무관함]

하나은행 트랜스트랜드 (Transtrend) 지 2003년 가을호 기사 첫 페이지. [이 기사에 등장하는 그 어떤 실제 인물과 무관함]

왜 미술작품을 수집하시나요?
 미술 컬렉터들을 만나면 의례 ‚왜 미술작품을 수집하시나요?’라는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백이면 백 의례 ‚그냥 미술이 좋아서’라고 대답을 합니다. 대답이 그러할지는 웬만큼 알만한 질문자라면 능히 미리 짐작을 할만도 합니다만, 되반복해 던지게 되는 단골 질문이자 대화를 자연스럽게 시작할 수 있게 도와주는 단골 화두이기도 하지요.

경우는 이번 만나본 칼하인츠 에슬과 아그네스 에슬 부부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수집해 온 미술작품들을 모아 미술관을 열어 운영할 것을 구체적으로 계획한 적은 없었습니다. 다만 미술가들과 개인적인 친분을 맺어가는 동안 맘에 드는 작품들을 사 모으다보니 어느새 컬렉션의 규모가 커져 있더군요.“ 라고 차분하고 나트막한 미성의 소유자 칼-하인츠 에슬 관장은 그 특유의 겸손함으로 대답합니다.

„돈을 헛되게 낭비하거나 변덕스러운 소비에 내맡기지 말며 개인적인 부와 소유물을 여럿에게 베풀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갖고 삽니다.“라고 말하는 칼-하인츠 에슬 관장은 남이 시키지 않은 청교도적 공리(公利) 의식에도 민감한 인물입니다. 비엔나 미술계에서 널리 알려진 것처럼 프로테스탄트교 신앙(카톨릭 구교가 지배적인 신앙으로 자리잡고 있는 오스트리아에서는 특이한 경우)을 배경으로 성장한 두 부부에게서는 여지없이 근면검소가 배어있는 옷매무새와 허식없는 자태가 풍겨나옵니다.

칼하인츠 에슬과 아그네스 에슬 부부(Agnes and Karl-Heinz Essl)는 오스트리아에서는 현대미술 분야에 한한 가장 방대한 규모의 미술작품 컬렉션을 보유하고 있는 개인 미술소장자들입니다. 역사를 더듬어보자면 오스트리아에서 부부 미술 컬렉터의 선례는 이미 17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면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여장부 마리아-테레지아 (Maria-Theresia) 여왕의 아들이자 독일 작센-테셴 (Sachsen-Teschen) 지방의 군주이기도 했던 알베르트와 마리-크리스티네 공작 (Duke Albert & Marie-Christine) 부부는 오스트리아 역사에서 잘 알려져 있는 부부 미술 컬렉터로 유명합니다.

특히 그들이 평생에 걸쳐 수집했던 서양 고전 미술품들 가운데 독일 르네상스의 대가인 알브레히트 뒤러 (Albrecht Dürer)의 그래픽 작품 전작 컬렉션은 오늘날 비엔나에 자리해 있는 알베르티나 컬렉션 미술관 (Albertina Collection)에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어 이 나라가 보유하고 있는 문화 유산의 크나큰 자산이자 자부심으로서 일익을 담당하고 있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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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룽 에쓸 쿤스트하우스 2층 전시장 광경. © 2000 Photo by C. Richters.

잠룽 에슬은 현대미술을 위한 집입니다. 
1999년 11월 5일, 에슬 부부는 잠룽 에슬- 현대미술 (Sammlung Essl – Kunst der Gegenwart)이라는 개인 미술관 건물을 짓고 두 부부가 지난 30년 가까운 세월동안 모아 온 미술 작품 컬렉션을 대중에게 처음 공개했습니다. 『에슬 컬렉션 – 최초 공개 (The Essl Collection: The First View)』 展이라는 제목을 달고 유명한 네덜란드 출신 큐레이터 루디 푹스 (Rudi Fuchs, 前 네덜란드 암스텔담 스테델릭 미술관 관장)의 기획으로 부쳐진 전시였습니다.

흔히들 오스트리아 미술하면 구스타프 클림트 (Gustav Klimt), 에곤 실레(Egon Schiele), 또는  오스카 코코슈카(Oskar Kokoschka)를 떠올리는 것이 고작인 현실 속에서 오스트리아적 특유의 감수성과 미적 전통을 간직한 에슬의 미술 소장품을 활용해 전시로 기획 공개하는 일은 적잖이 고무적인 사건이었다고 푹스 큐레이터는 이 첫 전시 서두에서 고백하기도 했었습니다.

20세기초 파리를 비롯한 여타 유럽의 미술 중심도시들과는 대조적으로 비엔나에서는 인상주의 (Impressionism) 사조는 거의 전무하다시피할 정도록 미미했습니다. 그대신 오스트리아에서는 전통적으로 실레, 코코슈카, 리햐르트 게르스틀 (Richard Gerstl) 같은 표현주의 (Expressionism) 계열의 회화 사조가 두드러지게 전개되었고 일반 대중 사이에서도 각광을 받았습니다. 바로 그같은 전통은 이어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전개된 오스트리아 앵포르맬 (Austrian Informel)과 행위주의 (Aktionismus) 계열 미술로 이어져서 지금까지도 그 명맥을 굳건히 계승해 오고 있습니다.

이곳 오스트리아에서 이름하듯 잠룽 에슬(에슬 컬렉션이라는 의미)은 우리말로는 에슬 현대 미술관이라고 부르면 됩니다. 독일의 철학자 사회학자였던 테오도르 아도르노 (Theodor Adorno)가 지적했던 것처럼 „박/미물관(musuem)이란 과거를 보존하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엄밀히 정의해 보건대, 박물관학/미술관학에서 미술관이란 역사적 시간과 학문적 검증을 거쳐 인류의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은 유물 (artifacts)이나 미술 작품 (works of art)을 보관하고 보존 및 복원 책임을 지며 학술적 연구를 위한 자료제공처 역할을 하는 미술품 대(大)보관창고를 의미합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미술관이라는 어휘는 어느 누군가 지적했던 것처럼 ‚미술품이 최종 도달하는 무덤’같다는 인상을 주는게 사실이지요.

반면, 현대-동시대 미술 (contemporary art)이란 고전기 미술과 근대 미술과는 달리 생존 미술작가들이 서로 경쟁하고 전시 활동을 펼쳐 가며 미술사학적인 가치평가와 검증을 기다리고 있는 곳이지요. 결국 현대 미술은 ,계속 진행중에 있는 (on-going) 미술’이니만큼 미술관이라는 막다른 제도적 울타리에 보다는 전시장 (exhibition hall) 또는 쿤스트할레 (Kunsthalle)와 같이 현장감 느껴지는 공간에 더 잘 어울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에슬 부부는 그들의 미술관을 ‚미술의 위한 집 (A House for Art)’이라는 의미의 독일어 어휘 즉, 쿤스트하우스 (Kunsthaus)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를 고집합니다.

한 아트 컬렉터 부부의 작지만 큰 출발 
사실 이 잠룽 에슬 현대미술관이 에슬 관장의 이름을 달고 개관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의 이름은 오스트리아에서 제일 돈많은 갑부 사업가중 한 사람으로 더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미술 컬렉터 칼하인츠와 아그네스 에슬 부부 Photo: Frank Garzarolli © Sammlung Essl Privatstiftung, 2009.

미술 컬렉터 칼하인츠와 아그네스 에슬 부부 Photo: Frank Garzarolli © Sammlung Essl Privatstiftung, 2009.

현재 그가 소유주 겸 최고경영인으로 운영하고 있는 회사는 바우막스 (Baumax)라는 전문 건축 자재 및 DIY 건축 주택 자재품 제조판매 업체로서, 오스트리아를 포함한 중유럽권은 물론 동유럽권 시장에 117개 대형 체인점을 두고 있는 유럽 주택 개량 엄계의 선두 플레이어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업계 재벌로 유명합니다.

젊은 시절부터 꿈꿔 왔던 것처럼 지금은 성공한 사업가로서의 탄탄대로를 걷고 있는 칼-하인츠 에슬. 실은 그도 1970년대 동안 10여년 넘게 직장일로 바쁜 일과를 쪼개 틈틈이 짬을 내어 드로잉과 유화 수업을 받아가며 습작 활동을 했던 적 있는 그 자신 아마츄어 미술가였다고 합니다. 아내 아그네스의 경우처럼 미술을 좋아하시던 양친 덕택에 예술가들이 자주 드나들고 집안 구석구석마다 온갖 일상 수집품들과 골동품들이 팔꿈치와 소매를 스치는 분위기에서 자랐던 것이 미술과 맺게된 오랜 인연의 출발이 되었다고 그는 말합니다.

그리고 에슬 관장은 „내 못말리는 수집병은 우리 집안 대대로 물려 받은 유전자 속에 숨쉬고 있는가 봅니다“라고 덧붙이면서 그 특유의 수줍은듯 해 보이는 미소를 지어 보입니다. 흔히 오스트리아인들은 그 어느 다른 나라 국민들과도 견줘도 뒤지지않을 왕성한 수집가들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미술품 수집을 향한 집착욕을 순순히 시인하는 에슬 관장도 여지없는 오스트리아인인 셈이지요.

1950년대 말엽에 결혼한 에슬 부부는 1년여 동안 미국에서 지낼 기회를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때마침 아내 아그네스가 뉴욕의 한 갤러리에서 일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서 였지요. 아들 칼-하인츠 2세를 잉태하기전인 신혼기까지만해도 아내는 미술계에서 일하고 싶어하던 야망찬 커리어 우먼이었지요.“ 이 젊은 두 부부에게 뉴욕에서의 달콤한 밀월기가 50년대 뉴욕 미술계의 창조적 폭발력을 온몸으로 체험하고 목도할 수 있었던 일생의 전환기가 될 줄을 누구 알았을까.

„잭슨 폴록과 윌렘 드 쿠닝을 위시로 해 숨가쁘게 전개되고 있던 당시 뉴욕 미술계를 보고 우리 둘은 흥분을 금치 못했지요. 그 전까지만해도 미술사에서 그만큼 파격적인 미술 운동을 본 적이 없었거든요.“ 그들은 특히 당시 뉴욕에서 전성기를 맞으며 전개되고 있던 전후 추상표현주의 계열 회화운동에 깊이 감명받았다고 합니다.그리고 그들은 과연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당시 현대 미술 조류와 대등히 견줄만한 당대 오스트리아의 자체적인 미술 사조는 무엇일까에 의문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이 시점이 분수령적인 계기가 되어 에슬 부부는 오스트리아로 귀국한 후 1960년대초부터 차츰 오스트리아 출신의 현대 화가를 발굴하고 그들의 작품을 모으자는 결심을 다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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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쓸 컬렉션 쿤스트하우스 외관 야경. © 2000 Ali Schafler.

미술품 수집은 돈많은 사람들이나 하는 취미 생활?
 자고로 미술 컬렉팅을 한다하면 흔히 ‚돈많고 눈이 높은 사람들이나 하는 취미 생활’이라고들 생각을 합니다. 물론 아주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더구나 투가가치라는 이윤추구적 목적과 혁신적인 기업 이미지 및 홍보효과를 앞세워 미술 컬렉팅을 하는 기업기관들이 많아진 요즘같은 현실에서 미술 컬렉팅과 돈은 뗄레야 뗄수 없는 운명적 관계로 얽혀 있음은 사실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돈많고 유명한 사람들 중에는 현대미술 소장가들이 꽤 많습니다. 일례로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 게펜 레코드 사의 제프리 게펜, 영국의 광고 거물 찰스 사치가 아주 대표적이며, 연예계의 여왕벌 마돈나도 현대미술의 열렬한 팬이어서 벌어들이는 수입중 상당을 유명 미술작가들의 작품 구매에 쓴다고 하는 소식은 국제 미술 시장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는 이야기입니다.

미술 컬렉팅이란 아름다움을 수집하는 일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신분을 과시하고 유지하는 신분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사회학자 막스 베버도 지적했던 것처럼 예술적 사물 (cultural objects)은 나와 타인간의 사회적 관계와 정체성을 구분시켜주는 차별화 수단이라고 했습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피에르 부르디외 (Pierre Bourdieu)도 ‚문화적 자본 (cultural capital)’이라는 개념을 들어 미술을 소유하고 보존해서 후손에서 대를 물리는 서구 전통적 행위는 아름다움과 미술 작품을 매개로 한 상류 엘리트들의 세력 대물림이라고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이탈리아의 미술 후원가 메디치 (Medici) 가족도 바로 그렇게 해서 도나텔로 (Donatello), 미켈란젤로 (Michelangelo), 라파엘로 (Raffaelo) 같은 거장들을 발굴 후원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인본주의 발전에 막강한 기여를 했지 않습니까.

물론 미술 작품 컬렉팅이란 돈이 없이는 여간해서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돈만으로 만사해결되는 간단한 취미 활동만은 아닙니다. 미술 컬렉팅이란 화랑계, 미술가 공동체, 국공사립 미술 기관이난 단체를 좌지우지하는 미술계 인사이더들과 친분 관계를 형성하고 지속적인 정보 교환을 요하는 사교 활동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특히 국제 미술계 사조와 맥을 같이 할만한 오스트리아 미술가와 미술 작품을 물색해야 했던 두 부부는 현대 오스트리아 미술품 수집은 곧 당시 오스트리아 미술계와의 인맥 형성과 연계가 매우 중요함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난 20세기 후반기 동안, 비엔나의 화랑가와 미술계는 사회민주주의 정권의 후한 재정지원과 국가주도식의 미술계 육성 정책으로 인해서 사설 화랑간이나 개인 컬렉터간의 치열한 경쟁 체제나 독자적 자생력이 상대적으로 미약합니다. 그 결과 비엔나 미술계와 화랑계는 소규모였으며 서로가 서로를 아는 얼굴 빤한 공동체여서 이곳 미술계 내부 분위기는 흡사 제2차 대전이 막 끝난 뉴욕 어퍼이스트 거리상에 하나둘 문을 열기 시작했던 초기 뉴욕 화랑가와도 제법 흡사한 데가 많습니다.

제대로 된 미술 컬렉팅은 제대로 된 미술사의 이해에서 출발합니다. 
1960년대 오스트리아의 미술계, 특히 수도 비엔나를 둘러싸고 벌어지던 비엔나 미술계는 한창 비엔나 행위주의 (Wiener Aktionismus) 운동이 거세게 불어닥치고 있던 때였습니다. 제2차 대전 독일의 패망을 끝으로 정치경제적 혼란과 불안정의 분위기가 대기에 가득했던 1940년대 말엽, 아르눌프 라이너 (Arnulf Rainer)는 타부와 죽음이라는 주제에 천착하며 이를 드로잉과 회화 작품으로 표출하여 선배 오스트리아 출신 표현주의 화가인 실레의 회화 정신을 한층 극단적인 경지로 밀어붙인 화가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1950년대 초엽 등장한 비엔나 행위주의자 헤르만 니치 (Hermann Nitsch)와 이후 1960년대 뒤따라 등장한 귄터 브루스 (Günter Brus), 오토 뮐 (Otto Muehl), 발터 피힐러 (Walter Pichler) 등과 최근 각광받고 있는 프란츠 베스트 (Franz West)는 바로 이 비엔나 행위주의 전통 선상에서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미술인들입니다. 이 시기 비엔나 행위주의 운동은 오늘날 비엔나 미술전문가들과 화랑계 인사들 사이에서는 1960년대말 미국에서 전개된 행위주의 미술과 신체 미술은 물론 가장 최근 주목받고 있는 폴 매카시 (Paul McCarthy)와 최근 영국의 데미언 허스트 (Damien Hirst)의 미술에까지 영감적 원천이 되어 준 선구적인 미술 사조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전후 1920-30년대 동안 비엔나 미술계에서 벌어졌던 미술 운동은 국제 현대 미술사 전개 발전과 분명 그 맥락을 공유하고 있는 셈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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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고전 『Georg Baselitz – Werke von 1968 bis 2012 』 전에 기하여 기자회견(2013년 1월17일)에 참석하여 연설중인 독일의 화가 게오르크 바젤리츠(GEORG BASELITZ)의 모습. Essl Museum, Klosterneuburg bei Wien. Photo © Essl Museum.

바로 이 점에 착안해서 에슬 부부의 현대 미술 컬렉션은 1945년 이후로 등장한 이른바 ‚전후 오스트리아 현대 회화’로부터 출발하고 있습니다. 오스트리아 건축계에서 20세기 중엽까지도 예술성 찬반논쟁에 휘말려 있던 일명 ‚사기꾼 건축가’ 프리든스라이히 훈더트바서 (Friedensreich Hundertwasser)의 그림을 사들이는 것을 출발삼아 두 부부는 미술 컬렉션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970년대초, 개인적인 인연으로 알게 된 화가 쿠르트 몰도반 (Kurt Moldovan)의 아텔리에 처음 초대받게 되면서 그들의 미술 컬렉션이 취해야 할 구체적인 방향성을 구축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인연을 실마리로 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현대 미술의 개척자 아르눌프 라이너를 비롯한 당대 주요 화가들과 친분을 나누게 되었지요. 때마침 칼-하인츠 에슬은 아내 아그네스의 부친이 세상을 뜨면서 1975년 장인이 소유하고 있던 기업체를 통채로 이어받으면서 전에 없이 큰 몫의 기업자금을 책임지게 되었고, 이참에 그 전보다 훨씬 큰 기업 수익금 일부를 미술 작품 구입과 컬렉션 부풀리기에 할애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미술가들과의 신뢰 관계를 구축하는 일는 미술작품을 소유하는 것 만큼 중요합니다. 
미술품 구입은 어떤 통로와 방식으로 하느냐라는 질문에 에슬 관장은 대체로 미술가들과 개인적인 접촉을 출발로 해서 미술가-컬렉터 간의 신뢰를 쌓아가는 방법을 이용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사설 화랑이나 미술계 인사들과 개인적으로 만나거나 전시회 오프닝식 등에 참여해 가면서 미술가들을 소개받는 것도 한 방법이긴 하지만, 우리는 우선 마음에 드는 작품을 점찍은 후 그 작가를 사적으로 접촉한 다음 그들의 아텔리에를 방문하고 친분을 구축해 나가는 편을 선호합니다. 화랑주인들의 상업적인 이해관계나 미술시장이 가하는 상업적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이점 때문입니다.

„화가들에 따라서는 접촉과 친분 형성이 비교적 쉬운 경우도 있지만 반대로 매우 까다롭고 장기간의 노력을 필요로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컨대 내 소장 작가인 스페인 화가 안토니 타피에스 (Antoni Tàpies)의 경우, 처음 연락을 취해서 서로 직접 만나 함께 식사를 하고 그의 아텔리에로 초대받기까지 3년 넘는 세월이 걸렸습니다. 맘에 두고 있는 화가를 만나기 위해서는 때로는 참을성과 느긋하게 기다릴 줄 아는 인내력이 필요하지요 …”



내 컬렉션은 미술가들로부터 얻은 영감을 미술 관객들에게 전달해 주는 공간 
„ … 하지만 미술가들과의 만남과 관계 형성 과정이 어떠했으며 얼마나 수월하거나 힘겨웠든지 상관없이 그들과의 만남은 언제나 보람있고 즐겁습니다. 미술인들은 저마다 깊고 넓은 사유 (思諭)와 다독 (多讀)을 하는 개성적인 창조인들이지요.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보면 일로 지쳤던 나의 몸과 마음에 영감과 에너지를 보충받곤 합니다. 그들을 통해서 사람이란 나이와 경험을 불문하고 끊임없이 배우는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라고 에슬 관장은 덧붙이면서 16쪽짜리 미술관 행사 일정표를 건네줍니다.

그가 유독 에슬 현대 미술관 운영에서 일반 관객과 어린이들을 상대로 한 저녁 프로그램과 교육 행사 프로그램에 예산과 노력을 아끼지 않는 이유도 바로 그런 자신의 경험을 미술관 관객들에게 전달하고 싶어서라고 합니다. „시공립 예산으로 운영되는 국가소유 박물관과 미술관들의 경우, 한정된 예산이나 충분치 못한 고용 인력을 이유로 해서 전시 이외의 부대 행사와 특별 교육 프로그램을 충분히 기획이행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에슬 컬렉션은 사설 기관이기 때문에 정부 기관이나 상위 조직에 의존하지 않고 관장인 내가 원하는대로 예산을 배분하고 특별 교육 프로그램을 독자적으로 기획운영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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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룽 에쓸 쿤스트하우스 외관 모습. © 2000 Photo by C. Richters.

실제로 에슬 컬렉션 현대 미술관은 교육중심의 미술관임을 자랑하고 있어서, 교육 프로그램만을 담당하고 있는 전문 인력만 12명을 별도로 고용해 주별 및 월별 특별 교육 행사를 운영해 오고 있습니다. 운좋은 날이면 미술관 교육 담당 직원들 외에도 에슬 부부가 직접 관객들과 만나 특별 강연 및 안내 행사를 하는 것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한편 에슬 관장은 매분기마다 미술 관계자들과 언론기자들을 초대해서 에슬 컬렉션의 신구매 작품 목록과 미술관 운영 예산을 공개하는 등 적극적인 PR 전략을 구사해 오고 있기도 합니다.

미술품 구매 선정은 직접하고 관리와 전시 기획과 컬렉션 관리는 큐레이터가 
,1970-80년대 약 20년 동안 주력해 수집해 온 오스트리아 현대 미술에서 시야를 넓혀서 1990년대부터는 미국, 독일, 북구 유럽,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영국 등 해외 현대 미술작품 컬렉션 부풀리기에 한창이던 에슬 부부는 1990년 중엽, 갑자기 4천여 점에 이르는 크고 작은 규모의 작품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할 필요성을 느꼈다고 합니다.

„어느날 미술품 창고를 둘러보다가 많은 작품들이 창고 한구석에서 잊혀져 가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지요. 곁에 걸어두고 보려고 산 그림들인데 창고에서 먼지에 묻혀가는 그림들을 보고는 이래서는 안돼겠다 싶더군요.“ 이렇게 해서 에슬 부부는 1995년 에슬 컬렉션 재단 (Sammlung Essl Privatstiftung)을 발족해 가브리엘레 뵈쉬 (Gabriele Bösch) 컬렉션 큐레이터의 책임하에 컬렉션을 관리해 오고 있습니다. [2013년 현재 안드레아스 호퍼(Andreas Hoffer) 선임 큐레이터]

에슬 컬렉션 현대 미술관은 대체로 일년에 4-5차례의 특별 기획전시를 꾸준히 진행해 오고 있습니다. 그 중 1-2회는 자문위원으로 있는 루디 푹스나 하랄트 제만 (Harald Szeemann) 같은 국제적으로 유명한 거물급 큐레이터들을 초청해 새로운 주제로 외부 미술관으로부터 작품을 대여해와 전시하는 특별전시가 차지하며, 나머지 2-3회는 이미 에슬 컬렉션이 보유하고 있는 작품들을 이용해 다양한 시각을 제시하는 컬렉션 위주의 전시들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푹스와 제만 같은 이른바 스타 큐레이터들과 빌란트 슈미트 (Wieland Schmied) 같은 미술사학자들을 자문위원으로 두고 있는 에슬 컬렉션 재단에서 자문위원들의 역할과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는 얼마만큼 되는가라는 질문에 „자문위원들은 주로 특별 전시 기획일을 하며 실질적인 미술품 구매와 관련한 정보수집과 의사 결정은 나와 아내 둘이서 합니다“ 라고 에슬 관장은 대답합니다. 그리고 „아내와 나는 해외 여행을 자주 하게 되는데 그럴때마다 세계 곳곳의 미술관과 화랑들을 둘러 보며 우리의 취향과 컬렉션에 적합하다 싶을 미술작품과 작가들을 선정하곤 합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는 외국의 미술 컬렉터들을 한자리에서 만나고 친분을 다질 수 있는 국제 아트 컬렉터 협회 모임 등에도 틈틈히 참여하여 정보교환에도 게을리하지 않는다고 나직이 귀띰합니다.

미술 컬렉션에 관심있는 여러분께
세상에 어느 누구라도 비판으로부터 면역받은자 없는 법이지요. 에슬 부부의 미술 컬렉션 역시 비엔나 미술계 인사이더들과 언론의 비판과 지적을 면할 수는 없어서 미술관 건립 전까지만해도 그들의 컬렉션은 ‚미술가의 경륜이나 양식을 분별않고 잡다하게 모은 두서없는 마구잡이 수집물’이며 따라서 ‚개성이나 일관성없는 컬렉션에 불과’하다는 놀림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에슬 관장은 그같은 여론에 아랑곳하지 않는듯 합니다. „나는 한 번 관심을 뒀던 미술가는 지속적으로 작업의 수준과 양식을 관찰합니다. 대체로 한 작가당 5-6점의 작품을 시리즈 식으로 구입을 하되 서로 시기적으로나 양식적으로 연관성이 있는 작품들만을 사지요. 한 번 관심을 두었던 작가라해도 작품의 경향이나 수준이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판단되면 구입을 멈추고 더 관찰을 합니다“라며 에슬 관장을 자신의 미술품 구매 철학을 피력합니다.

„미술품 컬렉션을 시작하려면 우선 미술을 좋아하고 미술에 대한 열정을 지니는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무엇보다 미술을 단순한 투자 가치나 매매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특히 요즘 젊은 세대 미술 컬렉터들은 다소 한정된 지갑 사정 때문에 미술 작품을 투자 및 매매 가치로 보는 경향이 있는 것 같더군요. 돈의 여유가 없었던 젊은 시절 나는 그래서 상대적으로 가격이 싼 그래픽 작품이나 수채화를 사는 것에서 출발했습니다 …”

“… 그러나 미술 작품의 가격대가 높든 낮든 미술품 컬렉션을 구축하기 위한 중요선결 요건은 미술 작품을 보고 좋은 작품을 선별할 줄 아는 눈 (eye) 즉, 감식안 (鑑識眼)을 키우는 일“이라고 합니다. „감식안을 갖기 위해서는 가능한 많은 미술관이나 화랑을 다니면서 실물 미술품을 보고 독서를 통해서 미술사의 흐름과 이해력을 키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끝으로, 진지한 미술 컬렉터가 되길 꿈꾸는 이라면 누구라도 꼭 기억해야 할 사항: “화랑업자들의 상술이나 작가의 유명세에 휩쓸려 마구잡이로 작품을 사들일게 아니라 컬렉터의 개인적인 감식안과 취향이 분명히 드러날 수 있도록 분명한 방향성과 내적 일관성이 있는 컬렉션을 구축하는 것“이라고 에슬 관장은 당부합니다.

에슬 컬렉션 전시 건물이 자리하고 있는 위치는 행정구역상 비엔나시에서 살짝 벗어나 있는 비엔나-니더외스터라이히주(州) 경계에 있는 소도시 클로스터노이부르크(Klosterneuburg)로 비엔나 도심에서 고속 기차나 시외버스를 타고 15분 가량의 여행으로 닿을수 있는 거리입니다.

때문에 비엔나 도심 국립 미술관들이나 무지움스쿼르티에 (MuseumsQuartier) 시립 미술관 대단지(2001년 가을 개관)에 비하면 주중 관광객과 방문객의 발걸음이 상대적으로 뜸한 것은 사실이지만 주말이면 도나우강을 끼고 펼쳐져 있는 숲과 맑은 공기를 만끽하며 자동차와 자전거로 에슬 컬렉션 현대미술관을 찾는 연인들과 가족들이 많이 눈에 띕니다. 특히 사교 활동에 관심이 많은 젊은이들과 성인 관객들을 위해 이 미술관은 매주 수요일 저녁 7시 이후를 무료입장 시간으로 정해서 성인 관객들과 가족들에게 미술관 건물 내외부 공간을 무료의 향취있는 공간으로 제공해 오고 있다고 합니다.

에슬 부부의 쿤스트하우스인 잠룽 에슬은 단지 과거의 미술 작품만이 모여 있는 창고가 아닙니다. 살아있는 미술가들의 작품들이 서로 어깨를 겨누며 살아 숨쉬고 있는 미술의 집으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이 글은 본래 하나은행 발행 문화 계간지 『Transtrend』 誌 2003년 가을호에 출판되었던 글임을 밝혀 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