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thly Archives: April 2000

홍콩 Hong Kong 香港 ❀

Essay

Hong Kong – 미로 속 숨은 그림 찾기

낯선 이방인에게 홍콩은 알 수 없는 동양적 생동력과 서구적 라이프스타일이 공존하는 여지없이 매력적인 도시로 다가온다. 홍콩 중국인들은 그래서 중국식 이름 말고도 영문 이름을 다 하나씩 갖고 있으며, 이른바 „장삿군“ 영어 정도는 아주 나이든 노인이 아닌 한 다들 할 줄도 안다. 유교의 노동윤리와 과거 대영제국의 식민주의적 유산이 교미하여 잉태한 홍콩은 그래서 세계의 그 어느 다른 대도시들이 대적할 수 없는 최고의 효율성와 실용주의적 사고방식이 도시 곳곳을 메우고 있는 초특급 메트로폴리스.

1999년 초현대식 첵랍콕 국제공항이 새로 문을 열면서 이 공항이 기하학적 수량으로 토해내는 항공승객들과 화물의 유통 상황이 전세계 텔레비젼 방송을 타고 보도됐던 것도 이 곳이 홍콩이었다는 점 때문이었다.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기독교 윤리와 자본주의』라는 기념비적 저술에 이어 그의 말년 연구에서 자본주의와 동양적 유교주의 또한 찰떡궁합임을 지적하고 그 원인을 탐구하지 않았던가.

패트릭 야우(Patric Yau) 감독의 홍콩 느와르 영화 『Odd One Dies』 속에서 청부살인을 맡은 주인공들은 미로처럼 뒤얽힌 홍콩 시내 뒤골목 사이를 정처없이 쫏기며 달리고, 『수지웡의 세계 (The World of Suzie Wong)』에서 착한 심성의 소유자 수지웡이 유흥가에서 매춘부로 일하다가 영국인 작가와 금지된 사랑에 빠지고, 『첨밀밀(甜蜜蜜, Almost a Love Story)』에서 중국에서 피난 온 젊고 가난한 총각이 고독한 깍쟁이 홍콩 소녀와 사랑에 빠져 갈등하고,  『중경삼림 (重慶森林, Chungking Express)』 속의 젊은이들이 서민촌 거리와 작은 아파트 공간을 오가며  홍콩이 아닌 꿈의 땅 „캘리포니아“와 새로운 인생을 꿈꾸는 곳… 왕가위의 영화 『아비정전(阿飛正傳, Days of Being Wild)』은 어쩌면 홍콩에서 살아가는 이 여러 뒤틀린 인간상을 주인공 (장국영)의 비극인 주변 개인사와 짧은 인생여정 속에 구겨넣어 표현했는지도 모른다.

홍콩 도시 지도는 영국제국의 정치적 이해와 홍콩의 지역 특권층의 관심이 두루 잘 보여준다. 서양식 석조건축물들이 제국주의 영국 정부의 정치적 위엄을 표현하려는 듯 신고전주의적 양식으로 오늘날까지 상징적인 기념물로 남아있는 가운데, 센트럴 구역 (Central District) 퀸즈웨이 대도로를 중심으로 홍콩의 행정과 경제를 움직인 무역 센터, 은행, 법원, 정부 관청, 해운 운반 회사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한두 골목만 벗어나면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하는 서민 상가 거리. 저층 서민 주거 겸 상가 건물, 호객군과 고객들이 자아내는 시끌벅적한 소음에 채소과일과 음식냄새로 진동하는 시장과 상점들이 적색을 주축으로 한 원색위주의 간판들과 함께 변화무쌍하면서도 긴밀히 밀집된 채 얽히고 설킨 홍콩 초기 자본주의 시장 논리를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는 곳.

유난히 습기가 많고 소나기가 잦은 여름철 홍콩의 월스트리트 센트럴 구역에서는 비에 젓을 염려가 없다. 90년대 초 영국의 노먼 포스터 경(卿)이 설계하여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의 대표작으로 평가되던 홍콩샹하이은행 (HSBC) 본부 건물을 둘러싸고 있는 현대식 사무실 빌딩들은 지붕이 있는 건물간 통로나 육교식 다리로 서로서로 연결되어 있는 때문이다. 한 번 발을 들여놓았다가는 미노타우르의 미궁에 빠져 헤메는 테세우스 신세가 되기 십상인 서민 상업 거리를 메우고 있는 콘크리트 건물들에 비하면 도심 건물들 사이의 방향 지시 화살표는 그 얼마나 정확하고 명료한가.

신경써 가꾼 대형 공원이나 광장도, 기억에 남길 만한 종교적 예배당이나 문화 건물을 찾아보기 어려운 홍콩. 이곳에서는 상업적 요충지가 아닌 한 돈의 원리에 따라 언제든이 있던 건물이나 랜드마크는 허물어지고 새로운 건물이 들어선다. 새로운 모양의 새로운 건물들이 눈부시게 빨리 들어서는 이 도시의 대기는 그래서 항상 건설현장의 소음과 건설현장을 둘러싼 안전용 천막 속에서 비져 나오는 진분과 먼지로 자욱하다.

행복루(Happiness Pavillon). Photo by Jina Park.

매주 일요일 도시 중심부 빈 공간에서 길거리 피크닉을 즐기는 떼거지 거리 인구는 홍콩인들이 아닌 필리핀 노동자들. 최저임금을 받고 홍콩의 여유있는 가정에서 하녀로 일하는 필리핀 여성들이 유일하게 일에서 벗어나 동료들과 수다와 음식으로 한시름 풀 적에, 일요일 마저도 일로 쫏기는 홍콩인들은 외면 반 불쾌감 반 섞인 얼굴을 한 채 각자의 일터로 가정으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수지웡의 세계』에서 주인공 수지웡이 매일밤 출근하던 완차이의 유흥거리. 다른 거리와 별 다를 것 없어 보이는 상가 밀집걸리이지만, 어둑어둑한 시간이 되기 시작하면 이 거리는 „잠시 쉬었다 가는 방“과 매춘부를 제공하는 모텔과 바의 네온사인이 하나둘 그 불을 켜기 시작한다. 번쩍이고 깜빡거리는 흥분적인 라스 베가스식 네온사인과는 달리 정지 네온만이 법적으로 허가된 이 거리의 밤거리 네온사인들은 그래서 마치 깜빡이지 않는 멍한 눈동자를 보는 듯 하기까지 하다.

홍콩인들은 오늘도 노동으로 바쁜 하루 일과를 마치고 거리로 나가 쇼핑을 하거나 자정이 될 때까지 조명 환한 음식점에서 밤참을 먹고 바에서 맥주를 마시며 촘촘한 거리와 그 속을 헤엄쳐야 하는 그들의 힘겨운 하루를 위안한다. 중국 본토의 정치적 억압을 피해 순수 자유시장논리가 지배하는 홍콩을 찾아 내려 온 피난민들이 만들고 지탱해 가는 홍콩. 그 많은 시민들의 머리수와 숨가쁜 속도로 펼쳐지는 도회지 문화가 『Odd One Dies』의 이름도 대화도 없는 주인공들이 미로 속을 쫏고 쫏기는 장면이 영화의 한 장면만이 아니었음을 지시해 주는 듯하다.

* 이 글은 본래 『열린세상 SK Telecom 사보 2002년 호에 실렸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