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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중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즈

VELÁZQUEZ IN VIENNA

작년 2014년 10월 말 비엔나의 미술사박물관에서는 바로크 시대 스페인 궁중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즈 전을 열어 스페인 합스부르크 황실가 가족들의 모습을 초상화로 다시 볼 수 있는 대규모 전시회를 열었다. 오늘날 대중 미술사 서적 마다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던 화가 겸 거장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디에고 벨라스케즈. 19세기말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 에두아르 마네가 벨라스케즈를 가리켜 ‘화가중의 화가(painter of painters)’라며 프랑스 인상주의의 선구자라 불리기 시작하면서부터 재조명 받기 전까지 실은 서양 미술사에서 오래 잊혀져 있던 유럽 역사 속 궁중화가중 일인에 불과했다.

Workshop of Diego Velázquez 『King Philip IV of Spain』 c. 1653–1656/59, Oil on canvas, 47 x 37,5 cm © Vienna, Kunsthistorisches Museum

디에고 벨라스케즈 아텔리에에서 화가와 조수들이 합작해 완성한 펠리페 4세의 초상. Workshop of Diego Velázquez 『King Philip IV of Spain』 c. 1653–1656/59, Oil on canvas, 47 x 37,5 cm © Vienna, Kunsthistorisches Museum

20세기 근대주의 대두 이전까지 절대주의 귀족주의가 지배하던 유럽에서 미술을 포함해 각족 공예, 음악, 문학 분야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창조 예술 분야에서 먹고 살아야 했던 재능있는 예술가들 사이서 너도나도 할 것 없이 귀족집안, 왕가, 황실, 교회에 전속돼 권력자를 섬기며 작업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영예스럽고 안정된 생계 수단이었다.

천재 르네상스 예술가들이 서로 경쟁하며 메디치 가문의 건축가, 화가, 조각가로 활동했고, 모차르트가 고향 잘츠부르크를 떠나 비엔나로 올라와 합스부르크 황실 음악가가 되길 그토록 갈망했던 것도 바로 그래서였다. 유럽이 배출한 걸출한 천재 예술가들은 소명적으로는 신이 내려준 재능을 한껏 발휘해 천상의 아름다움과 성스러움이 구현된 예술작품을 창조하는데 혼신을 바친 위대한 창조가들이었지만 현실적으로는 생계를 꾸려나가야 했던 생활인이었기 때문이다.

디에고 벨라스케즈(Diego Rodriguez de Silva y Velázquez, 1599-1660)는 스페인 남부 도시 세비야에서 태어났다. 스페인 태생이나 포르투갈에서 이민온 유태인계 포르투갈 부모 밑에서 카톨릭 교회 세례를 받았으며 소귀족 출신이었던 이유로 해서 벨라스케즈는 당시 스페인을 한바탕 공포로 휘몰아 넣었던 스페인 종교 재판으로부터 수난을 거의 받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유복한 환경에서 일찍이 갓 열 살이 넘은 나이로 철학책을 보고 화가 프란치스코 파체코(Pacheco) 수하에서 그림그리기를 공부하며 화가 수련을 받기 시작했다.

Diego Velázquez 『The Waterseller』 c. 1622, Oil on canvas, 107,7 x 83,3 cm © London, Apsley House, The Wellington Collection English Heritage

벨라스케즈의 초기 작품 『물장수』는 허름한 연인숙, 주점, 주방 풍경을 묘사한 보데고네스 장르의 그림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당시 로마에서 활동하던 바로크 시대 화가 카라바죠의 영향이 엿보인다. Diego Velázquez 『The Waterseller』 c. 1622, Oil on canvas, 107,7 x 83,3 cm © London, Apsley House, The Wellington Collection English Heritage

청출어람 청어람(靑出於藍 靑於藍)이라 했듯, 스승 프랑치스코 파체코 보다 그림그리는 재능이 한층 특출났던 갓 스무살 넘긴 젊은 벨라스케즈는 스승의 딸 후아나와 결혼하자 마자 그 연줄로 수도 마드리드에 있는 산티아고 교회를 거쳐 곧바로 마드리드 합스부르크 궁중으로 그 이름이 알려졌다. 때는 마침 1922년 겨울, 합스부르크 왕가 필리페 3세와 4세가 가장 아꼈다던 왕실전속화가 로드리고 데 빌란드란도가 세상을 떠서 그 자리를 메꿀 새 궁중화가 물색작업이 한창이던 시기. 절묘한 시운과 스승이자 장인 파체코의 연줄의 축복을 한껏 받고 24세의 디에고 벨라스케즈는 초봉 50 두카트(오늘날로 환산하면 약 200-250 만원) 받는 궁중전속화가로 전격 발탁된 이후 예순살로 세상을 뜰 때까지 40년 넘게 마드리드 합스부르크 왕실에서 궁중화가로 한평생을 봉사했다.

모든 궁중화가의 최우선 임무는 두 말 할 것 없이 왕과 왕가 가족과 친지들의 공식 초상화를 그리는 일이다. 요즘과 달리 장거리 여행을 자주하기 어렵던 과거, 스페인 마드리드와 오스트리아 비엔나 두 곳에서 2중 왕실을 거느렸었던 신성로마제국 합스부르크 황실은 멀리 떨어져 있던 유럽의 두 수도 사이 가문 친지들의 모습을 수시로 초상화로 그려서 주고받는 것으로써 안부를 확인했고 차후 서로 결혼하게 될 어린 새 후손들의 모습을 미리 확인했다. 오늘날 벨라스케즈의 명작 알려져 있는 작품들 다수는 마드리드의 합스부르크 왕실 가족 초상화이고 그러하다보니 그의 대표작 다수는 스페인의 프라도 국립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Diego Velázquez 『Infante Baltasar Carlos with a Dwarf』 1631–1632, Oil on canvas, 128 x 101,9 cm © Boston, Museum of Fine Arts

펠리페 4세 왕과 이자벨 여왕 사이서 태어난 2살박이 발타자르 카를로스 왕자와 난장이 궁정광대가 있는 2인 초상화. 펠리페 4세는 이 귀한 아들 초상화를 벨라스케즈에게 특별히 맡겨 그렸는데 베네치아파 르네상스의 거장 화가 티치아노의 색감과 구도에서 영향받은 흔적이 뚜렸하다. Diego Velázquez 『Infante Baltasar Carlos with a Dwarf』 1631–1632, Oil on canvas, 128 x 101,9 cm © Boston, Museum of Fine Arts

지금도 비엔나 국립 미술사박물관에 남아있는 벨라스케즈의 합스부르크 왕가 초상화 작품들은 마드리드 왕실에서 선물로 보내왔던 가족 초상화들이다. 벨라스케즈를 궁중화가로 간택한 스페인의 펠리페 4세의 50대 초엽의 모습을 담은 초상화를 비롯해서, 발타사르 카를로스 왕자의 초상, 오늘날 대중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는 펠리페 4세 왕의 딸 인판타 마가리타 공주의 성장과정을 고스란히 볼 수 있는 초상화 연작들중 네 편을 통해서 벨라스케즈는 왕실 내 신하들간의 권모술수, 30년 전쟁과 경쟁 권력들로부터의 도전과 위헙, 병약하던 어린 왕자와 공주들의 건강에도 불구하고 깔끔하고 호사롭게 잘 다듬어지고 차밍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 모습으로 왕가 일가족과 친지들을 그려냈다.

하지만 벨라스케스가 찬연하고 말끔하게 그려낸 당시 합스부르크 가문 초상화들의 이면엔 이 가문에 드리워질 암울한 미래가 감쪽같이 감춰져 있다. 벨라스케즈의 고용자 겸 후원자이던 펠리페 4세는 실은 스페인 왕국 최후의 왕이된 비운의 인물이었다. 포르투갈이 스페인 영토에서 분리독립해 나가고,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가 저마다 세력을 키워가자 한때 유럽의 주도 세력이던 스페인 왕국은 점차 군사적, 외교적, 문화적 권력 무대에서 종결을 순간을 맞고 있었다.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마드리드 합스부르크 가문은 정신과 육체가 건강한 후계자 생산에 큰 어려움을 겪었는데, 이는 권력 분산을 막고 권력을 통제하기 위해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6백 여년 집권기 동안 가족친인척끼리만 결혼하는 근친혼인을 고집한 끝에 발생된 유전질환과 건강적 장애가 그 원인이라고 알려져 있다.

엄격한 위계체제와 근엄한 분위기라 내리누르는 궁정에서 해소 역할을 했던 궁정 광대. 벨라스케즈의 눈에 비친 광대란 실없음, 어리석음, 광기를 뜻했던 것으로 보인다. Diego Velázquez 『The Buffoon Juan de Calabazas (Calabacillas)』 c. 1638, Oil on canvas, 106 x 83 cm © Madrid, Museo Nacional del Prado

엄격한 위계체제와 지나치게 경직된 분위기가 내리누르는 궁정에서 긴장 해소 역할을 담당했던 궁정 광대. 벨라스케즈의 눈에 비친 광대란 실없음, 어리석음, 광기를 뜻했던 것으로 보인다. Diego Velázquez 『The Buffoon Juan de Calabazas (Calabacillas)』 c. 1638, Oil on canvas, 106 x 83 cm © Madrid, Museo Nacional del Prado

마드리드 합스부르크 왕실 최후의 왕 펠리페 4세가 왕권 후계자 생산을 간절히 기다리며 새로 태어난 왕자와 공주들을 비엔나 합스부르크 왕실로 혼인시켜 대권을 유지하려고 얼마나 안간힘을 썼던가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펠리페 4세와 첫 아내 이자벨 여왕과 오랜 노력 끝에 탄생한 첫아들 발타자르 카를로스는 안타깝게도 16살 나던 해에 갑작스럽게 죽었는데, 열 살 난 어린 소년의 발타자르 카를로스 초상화와 펠리페 4세가 간절히 기대했던 왕권후계자 아기 펠리페 프로스페로의 초상화는 비엔나 합스부르크 왕실에 보내 결혼을 제안하기 위해 특별히 벨라스케스의 손으로 그려졌다.

발타자르 카를로스의 누이이자 첫 딸 마리아 테레사는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결혼시키는 것으로서 스페인과 프랑스 사이의 갈등을 잠재웠다. 펠리페 4세의 둘째 부인 마리아나 여왕과 낳은 인판타 마가리타의 2세, 5세, 8세 때의 초상화들은 장차 레오폴트 1세 황제가 될 비엔나 합스부르크 황태자에게 일찍부터 결혼을 제안하기 위해 보낸 맞선용 초상화였다.

번뜩이는 독창성과 독특한 스타일이 폭발했던 17세기 유럽문화 황금기 바로크 시대, 궁중화가 벨라스케즈는 과연 회화를 재정의한 거장 화가의 대열에 설 만한가? 비슷한 시기 로마에서 활동한 카라바죠의 격정과 파격적인 시각, 스페인 출신의 바로크 거장 주르바란의 강렬한 영혼성, 인간조건의 복잡한 내면세계를 표현한 네덜란드의 렘브란트의 깊이와 승화력, 베르메르의 고요하고 잠잠하되 애상적 시적 감성은 벨라스케즈의 회화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허나 초기 시절 그가 즐겨 그렸던 ‘보데고네스(bodegones)’ 혹은 주방 정물화 그림들 중에서 『물장수(Waterseller)』 에 나타난 대담한 화면 구도라든가 유럽 미술사상 가장 아름다운 뒷모습 여성 누드라 불리는 『화장하는 비너스(일명 로커비 비너스)』 같은 작품은 마네 같은 19세기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새로운 화면구성법을 구축하는데 영감을 주었을 만하다. 그런가하면 20세기 영국서 프란시스 베이컨은 벨라스케즈의 초상화 속 숨막히는 격식을 표현주의로 재해석해 초상 속 모델들을 해방시켰다.

Diego Velázquez 『Infanta margarIta』 (1651–1673) In a WhIte dress, c. 1656. Vienna, Kunsthistorisches Museum

흰색 드레스를 입고 있는 다섯살난 마가리타 공주. 이 초상화는 비엔나 합스부르크 황실에 사시는 할아버지 페르디난트 3세 황제께서 보시라고 보내진 손녀 초상화였다. 거울에 반사되어 반대방향으로 서 있는 이 모습은 『시녀들』 그림에 재활용되었다. Diego Velázquez 『Infanta MargarIta』 (1651–1673) In a WhIte dress, c. 1656. Vienna, Kunsthistorisches Museum

궁중화가 벨라스케즈의 평생 목표는 왕실 위계 속에서 승진을 거듭하여 작위를 받고 명예롭게 은퇴하는 것이었다. 그는 유독이 베네치아파 르네상스 화가 티치아노를 깊이 흠모했는데 특히 티치아노가 평생공로를 인정받아 신성로마제국 황제 겸 스페인 왕 카를 5세로부터 작위 수여받은 것을 부러워했다. 실제로 벨라스케즈는 세상을 뜨기 1년 전인 1659년 필립 4세로부터 기사작위를 받았고, 그 흔적은 그 유명한 그림 『시녀들(Las Meninas)』(프라도 박물관 소장)에 빼곡이 얼굴을 내밀고 있는 화가 자신의 자화상에 빨강색 십자가로 기록되어 있다.

미셸 푸코의 책 『사물의 질서(Les Mots et Les Choses)』(1966년) 서론의 상세한 분석대상이 된 이래 무수한 학자들 사이의 논쟁의 주제가 된 그림 『시녀들』은 궁중화가로서 성취감에 찬 디에고 벨라스케즈의 자족한 자아를 한 폭의 그림으로 옮겨놓은 자랑스런 최종 이력서였다. 커리어리스트 디에고 벨라스케즈는 더도덜도 아닌 궁중 화가였고, 그의 그림은 오로지 그의 후원자 만을 위한 것이었다. 《벨라스케즈》 전은 비엔나 미술사박물관에서 2014년 10월28일부터 2015년 2월15일까지 열린다. Images courtesy: Kunsthistorisches Museum, Vienna.

 

모든 것은 안쪽에 있습니다.

『Seven Billion Light Years』 is on view through April 25th, 2015 at Hauser & Wirth, New York.

인도 서민들이 사는 동네와 골목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자전거와 우유통. 특히 우유는 인도식 차를 끓이는데 필요한 원료여서 매일 아침 마을 주민들과 아낙네들이라면 꼭 구해야 할 필수 식료품으로 지금도 인도에는 동네마다 손으로 손수 매일 아침 우유을 짜서 우유를 붓고 요구르트를 제조하는 유제공들이 있다. 수보드 굽타 (Subodh Gupta), 『소 두마리 (Two Cows) 』 2003-08년, Photo: Ravi Ranjan.

인도 서민들이 사는 동네와 골목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자전거와 우유통. 특히 우유는 인도식 차를 끓이는데 필요한 원료여서 매일 아침 마을 주민들과 아낙네들이라면 꼭 구해야 할 필수 식료품으로 지금도 인도에는 동네마다 손으로 손수 매일 아침 우유을 짜서 우유를 부어 팔고 요구르트(커드)를 제조하는 유제공들이 있다. 수보드 굽타 (Subodh Gupta), 『소 두마리 (Two Cows) 』 2003-08년, Photo: Ravi Ranjan.

수보드 굽타 유럽 회고전에 비친 글로벌 시대 속 인도의 오늘

SUBODH GUPTA – EVERYTHING IS INSIDE

인도 현대미술의 데미언 허스트’라는 별명으로도 불리며 전세계 현대미술시장과 현대미술 전시장 곳곳을 동시다발로 누비며 최고 줏가를 올리고 있는 수보드 굽타(Subodh Gupta, 1964년 생). 인도 북동부에서 태어나 뉴델리서 미술공부를 한 후 미술계에 데뷔한지 20여 년이 흐른 지금, 그는 현재 독일 프랑크푸르트(MMK Frankfurt)에서 유럽 최초로 가지는 개인 중간점검 회고전 『수보드 굽타: 모든 것은 안쪽에 (Everything is Inside)』 전에서 조각, 설치, 회화, 비디오, 퍼포먼스에 이르는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어 가며 여태까지 그가 가졌던 전시들 중에서 가장 종합적인 개인전을 선보이고 있다.

수보드 굽타 (Subodh Gupta) 『계절 (Season)』, 2013년, 프랑크푸르트 현대미술관 전시장내 설치작 광경 Photo: Axel Schneider © MMK Frankfurt.

망고는 인도의 국가 과일이며, 이 나라에는 손재주가 뛰어난 수공인들이 일반인들의 옷을 만들고 수선하며 생계를 꾸려가고 있는 전통적 생산구조가 여전히 지배적이다. 수보드 굽타 (Subodh Gupta) 『계절 (Season)』, 2013년, 프랑크푸르트 현대미술관 전시장내 설치작 광경 Photo: Axel Schneider © MMK Frankfurt.

“수보드 굽타는 현재 인도에서 가장 잘 알려져 있는 미술가중 한 사람이다. 인도의 과거와 국제사회 속의 현실을 포착해 작품화 한다. 글로벌화와 근대화 과정 속에서 벌어지는 인도의 일상적 풍경과 아직도 변치않고 인도인들의 문화를 지배하는 전통과 종교에 대해서 보여준다. 글로벌화된 맥락 속에서 로컬(local)적으로 발생하는 쟁점들을 통해서 인류 보편적인 가치관과 상징을 표현하는 것이 그의 작업의 촛점”이라고 이 전시의 기획진은 이 인도 출신의 현대미술계 수퍼스타를 한 마디로 응축한다. Continue rea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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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ul Leiter

Taxi, c. 1957 © Saul Leiter / Courtesy Howard Greenberg Gallery, New York.

Taxi, c. 1957
© Saul Leiter / Courtesy Howard Greenberg Gallery, New York.

See a mini-magazine on the photography of Saul Leiter  at penccil : SAUL LEITER

솔 라이터의 사진집 보기 penccil : SAUL LEITER

가난 – 미래 보편적 라이프스타일이 될 것인가?

BEING POOR, WILL IT BECOME A FUTURE TREND?

영국 웨일스 카디프 시에서 열리는 아르테스문디(Artes Mundi) 현대미술 연구소가 주최하는 올해 제6회 아르테스문디 비엔날레에서 우수상을 받은 렌초 마르텐스(Renzo Martens). 네덜란드서 태어나 브뤼셀과 킨샤사를 오가며 작업하는 다큐멘터리 비디오 예술가인 그는 전쟁과 재난으로 폐허와 빈곤에 허덕이는 곳들을 찾아 여행하며 작가 스스로를 다큐멘터리 영화의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부유하고 자기중심적 시점을 가진 구미인이 제3세계인들이 겪는 경제적 정신적 트라우마를 관망하며 ‘소비’하는 현상을 포착한다. 다분히 이기적이고 냉소적으로 보일 수 있는 그의 비디오 작품은 오늘날 폭력, 파괴, 가난 같은 시련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제1,2세계인들이라 하여 미래 닥칠 위기로부터 영원히 자유로울까고 질문하며 경고하는 듯하다.

Episode 3, 2008. pal, 16:9, color. 90:00. Courtesy the artist and Galerie Fons Welters.

From the Episode 3, 2008. pal, 16:9, color. 90:00. Courtesy the artist and Galerie Fons Welters. In ‘Episode 3’ Martens travels to the ruined Congo, interviewing photographers, plantation owners and locals; he acts the role of journalist, colonist, modern day missionary and development aid worker. His film focuses on one observation: poverty is Africa’s biggest export product, and, as with other natural resources of the Congo, it is exploited by the West through media. Lecturing locals assertively on ideas of poverty as commodity, he encourages them to sell their own photographs of starvation and death, not let Western photojournalists profit from their humanitarian disaster.

한 천재의 초상 – 렘브란트

REMBRANDT 400 in Amsterdam

화가, 데상가, 판화가 – 렘브란트는 네덜란드 미술의 황금 시대(Dutch Golden Age)라고 불리는 17세기 바로크 미술의 거장으로 이미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거장 화가이다. 2006년은 거장 렘브란트가 태어난지 400년째가 되는 해로, 고국 네덜란드에서는 이 나라의 자랑스러운 아들이자 세계적인 화가의 생일을 맞아 대대적인 전시회 및 문화 행사를 기획했다.

렘브란트의 작품들이 대거 소장되어 있는 암스텔담의 릭스무제움(Rijksmuseum)을 비롯해서 반 고흐 미술관, 렘브란트의 옛 거주집을 박물관로 전환한 렘브란트하우스(Rembrandthuis)는 물론이고 런던의 덜위치 갤러리, 베를린의 고전 미술관,  헝거리 부다페스트 미술관, 그리고 파리 주재 네덜란드 문화원인 커스토디아 재단(Fondation Custodia) 등 유럽 전역에서 거장 화가 렘브란트의 작품은 물론 그가 살던 17세기 네덜란드와 유럽의 정황을 엿볼 수 있게 해 주는 유익한 전시들이 올 한 해와 내년 초에 걸쳐서 줄줄이 이어지고 있다. 이미 잘 알려져 있지만 여전히 가시지 않는 신비와 마력으로 현대인들을 사로잡는 렘브란트의 자화상 그림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22세의 젊은이로서의 렘브란트 자화상. 1628년 작품. © Rijksmuseum, Amsterdam.

“세세한 것에 대한 이해와 경험을 지닌 화가는 위대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 위대한 화가의 재능은 경이로운 것이다. 신은 위대한 화가에게 재능을 선사하여 그의 그림을 통해서 여느 사람들은 발견할 수 없는 것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 르네상스 시절 독일 출신의 회화의 거장이자 렘브란트의 선배 화가였던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는 말한 적이 있다.

천재라는 개념에 대한 다분히 르네상스적인 정의로 들리는 면이 없지 않지만 신화 알레고리, 성서 해석, 역사화, 초상화에 이르기까지 미술의 여러 장르는 넘나들며 독자적인 경지를 이룩한 렘브란트의 미술 생애는 끝없고 정처없는 탐험이었고 누가 뭐라해도 분명 탁월한 것이었다.

한 인간의 인성은 그가 타고난 여러 속성과 자질을 모두 도합한 것 이상의 그 무엇이라는 말이 있다. 렘브란트의 작품 속에서 발견되는 탁월한 기술적 재능 외에도 밝고 어두운 빛의 강한 대조를 통한 극적 분위기와 심오한 내면세계가 느껴지는 그림 속 인물들의 심리 묘사는 오늘날까지도 시공을 초월하는 인간적 조건(human condition)을 되돌이켜 보게 만드는 보편적 위력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패기 넘치는 22세의 곱슬머리 젊은이의 모습에서부터 삶의 무게와 내면적 고뇌를 머금은 60대의 노인의 모습까지 화가의 초상을 화폭으로 옮긴 자화상의 명인으로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렘브란트는 지금도 그의 삶과 작품 속에 깃든 신비에 매료를 느끼는 수많은 낭만파 회화 애호가들 사이에서 사랑 받고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올해는 네덜란드가 국가적으로 지정한 ‘렘브란트의 해’이다. 올[2006년] 여름 7월15일 토요일, 네덜란드의 수도 암스텔담과 화가의 고향 라이덴(Leyden)에서는 네덜란드가 자랑하는 렘브란트의 400번째 생일을 축하했다. 유명한 역사적 인물을 내세운 국가적 문화 행사가 흔히 그렇듯 ‘렘브란트의 해’를 맞는 네덜란드에서는 렘브란트 스파게티와 초컬릿 등 렘브란트를 내세운 마케팅 홍보로 관광객 유치와 문화 상품 매출에 열을 올리는 상혼도 발휘되었다.

하지만 “렘브란트의 어머니”(라이덴 라켄할 시립 박물관(Municipal Museum of Lakenhal), 올 3월19일까지 전시 마침) 展, “렘브란트와 카라바죠”(릭스무제움, 올 6월 18일까지 전시 마침) 展, 그리고 가장 최근 일반 관객에게 문을 연 “렘브란트-천재성을 향한 탐구”(현재 독일 베를린 고전미술 박물관(Gemäldegalerie Berlin)) 展을 통해서 미술계는 렘브란트에 얽힌 신비를 해독하고 이 거장이 예술 한 평생 동안 이룩해 놓은 미술사적 성과를 차분하게 종합 재평가 해 보는 기회로 삼고 있다.

동시대에 활동했던 역시 네덜란드 출신의 동료 거장 화가 얀 베르메르(Jan Vermeer)의 경우와는 다르게 렘브란트의 일대기와 행적은 기록으로 잘 보존되어 있고 따라서 렘브란트에 대한 미술사적 연구는 이미 많이 이루어져 있는 상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렘브란트의 일생과 작품과 관련하여 지금도 속시원히 풀리지 않은 의문점들은 남아 있다.

흔히 일반인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렘브란트는 그의 극적이고 신비로워 보이는 회화 작품들만큼 평생을 빈곤과 투쟁하며 그림을 그렸던 낭만적 화가였을까? 렘브란트는 유태인이었나? – 생전 화가는 유태인 출신의 철학자 스피노자(Spinoza)와 랍비 메나세 벤 이즈라엘과 친하게 지냈으며 <유태인 신부(The Jewish Bride)> 같은 유태인 주제의 작품을 여러편 남겼다는 사실에 미루어 그가 유태인이 아니었을까 하는 일각의 추측이 일기도 했는데, 이 같은 의문점을 화두로 삼아 네덜란드의 유태인 역사 박물관(Jewish Historical Museum)에서는 오는 11월부터 내년 초까지 “유태인 렘브란트(The Jewish Rembrandt)’라는 전시가 개장을 앞두고 있다.

게다가 렘브란트는 수많은 제자와 화실 조수들의 도움을 많이 본 화실 지휘자였다. 그로 인해서 ‘렘브란트의 작업실 (Rembrandt’s Laboratory)’로 불린 대규모 아텔리에를 운영하며 제자들에게 그림을 그리도록 하여 밀려드는 그림 주문에 응했는데, 그 결과 지금도 렘브란트의 진품(眞品) 판정 기준을 세우는데 전문가들을 혼란케 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Rembrandt Harmensz. van Rijn (1606–1669) 『Self-Portrait in a Cap』 1630 Etching, 51 x 46 mm. Gift of J. P. Morgan, Jr.

눈을 끄게 부릅뜬 서른살 난 화가의 자화상 또는 원제 『모자를 쓴 화가의 자화상 (Self-Portrait in a Cap)』 1630
Etching, 51 x 46 mm. Gift of J. P. Morgan, Jr. © The Morgan Library & Museum.

그래서 렘브란트와 그의 작품세계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단체인 램브란트 연구 프로젝트(Rembrandt Research Project)을 이끌고 있는 에른스트 반 데 벤터링(Ernst van de Wentering) 관장은 “그동안 대중 매체를 통해서 미화되어 오던 신비로운 인물로서의 렘브란트의 이미지를 접어두고 신선한 시각으로 이 화가의 예술적 창조력과 내면적 동기가 어떻게 작품으로 표출되었는가를 점검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하르멘조온 반 라인 렘브란트(Harmenszoon van Rijn Rembrandt)는 1606년 7월 15일 라인강을 바라보며 자리해 있는 라이덴(Leiden)에서 제분업을 하는 중산층 집안의 열 명의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강가 주변에 그림처럼 서 있는 풍차가 있는 전형적인 목가적 풍경 속에서 성장한 그는 학자가 되길 기대했던 부모의 바램에 따라 라틴어로 학습하는 인문 학교에서 교육받았으나 결국 맘 속에 품어왔던 그림에 대한 열정을 포기하지 못하고 17세부터 그림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3년 동안 반 쉬바넨부르흐 밑에서 기초 그림 수업을 받은 후 보다 더 큰 물에서 그림을 배우고자 마음먹은 그는 수도 암스텔담으로 가서 당대에 유명했던 역사 화가 피터 라스트만(Pieter Lastman) 밑에서도 6개월간 수학했다. 렘브란트의 불후의 명작이자 현재 릭스뮤제움의 한 전시실 벽을 가득 메우고 있는 대작 단체 초상화 <야간 경비(The Night Watch)>는 이 때 배운 역사화 구성 능력이 렘브란트의 본령인 초상화술과 한데 어우러져 창조된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군계일학을 짚어내는데 능했던 당시 눈썰미 좋은 귀족들 덕분에 젊은 렘브란트의 남다른 재주는 일찍이 발굴되었다. 방년 19세의 청년 렘브란트는 분명 놀라운 재능을 발휘해서 고작 3년 반 가량의 그림 수업을 마감하고 고향 라이덴으로 귀향하여 동료 화가인 얀 리벤스(Jan Lievens)와 동업하여 개인 화실을 열었다. 22세 되던 해 렘브란트는 네덜란드의 오렌지 왕가의 눈에 띄어 헤이그 궁전의 실내 장식용 그림을 그리게 되었는데 이는 직업적 화가 렘브란트가 수주한 그림 주문 제1호이자 동시에 암스텔담에서 온 헨드릭 윌렌부르크(Hendrick Uylenburgh)라는 유력한 초상화 딜러와의 인연을 맺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청춘은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했던가. 환희 펼쳐질 성공한 화가로서의 미래를 앞두고도 <22세의 젊은이로서의 자화상>(1628년 작)은 젊은 렘브란트의 또다른 내면을 암시한다. 렘브란트의 트레이드마크라고 할 수 있는 극적인 키아로스쿠로 (chiaroscuro) 효과 즉, 강한 명암의 대비 기법이 잘 나타나 있는데, 자유분방하게 헝클어진 머리와 앳되어 보이는 통통한 뺨과 대조적으로 어둡게 가려진 눈매는 젊음과 촉망 받는 미래를 앞두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남몰래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에 떨고 있던 화가의 내면 한구석을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성공적인 직업 화가의 길을 본격적으로 개척하기 위하여 암스텔담에서 화실을 개업한 방년 25세의 렘브란트는, 그로부터 3년 후인 1634년에 그의 아트딜러인 윌렌부르크의 여사촌 사스키아(Saskia)와 결혼했다. 사스키아가 귀족 출신의 여성이라는 잇점 때문에 렘브란트는 결혼 후 상류층 고객들로부터 그림 주문을 받을 수 있었고 그렇게 수주한 그림 주문 덕택에 큰 돈을 벌기도 했다.

렘브란트가 1656-58년 경 그린 이 자화상은 50살을 갓 넘긴 화가의 모습을 담고 있다. ⓒ Kunsthistorischesmuseum. Wien.

허나 비싼 집을 구입하고 값비싼 골동품과 옷을 사들이는 일을 좋아했던 화가의 낭비벽 때문에 곤혹을 치루기도 했는데, 지금도 네덜란드 관청 자료실에는 과거 렘브란트가 가족, 채권자들, 미술 후원자들은 물론 모델들과 얽혀 들었던 수십 건의 금전적 분쟁 기록들이 남아 있어서 이를 증명해 주고 있다.

이미 서른 무렵의 나이에 결혼, 직업적 성공과 유명세, 사치스러운 생활을 경험한 그는 <눈을 크게 뜬 자화상>(1630년 작)이라는 판화 속에서 놀람, 환희, 슬픔 등 모순적인 인생의 희로애락의 감정들이 묘하게 뒤섞인 채 어리둥절해 하는 자신의 모습을 표현했다.

렘브란트의 개인사를 연구한 전문가들에 따르면 그의 사생활은 그다지 본받을 만한 것만은 아니었다고 지적한다. 렘브란트는 갓 서른을 맞는 아내 사스키아를 폐결핵으로 때이르게 잃었고 그 이후로 10년 가까이 붓을 들지 못했을 정도로 극심한 슬럼프를 앓았다. 혹자는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깊은 슬픔이 그 같은 위기의 원인이었다고 설명하지만 역사학자들의 생각은 좀 다르다.

사스키아가 죽은 후 렘브란트는 아들의 보모로 집에 들인 게르체 디륵스(Geertje Dircs)라는 여성과 불륜의 관계를 유지했고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전 아내 사스키아의 사촌이자 딜러 윌렌부르크가 렘브란트로부터 그림 주문을 끊은 것이 렘브란트가 일을 못하게 된 진짜 이유였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디륵스와 지내는 동안에 22세난 젊은 여시종 헨드리케 스토펠스(Henrickje Stoffels)와도 바람을 피워서 게르체에게 위자료를 물어주게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사치와 무분별한 돈관리로 곤경을 겪고 있던 렘브란트는 결국 50세 되던 해에 파산 신고를 내고 갖고 있던 재산을 모조리 탕진하고 말았다.

보수적인 청교도적 신앙이 지배하던 당시 17세기 네덜란드 사회는 제아무리 천재 화가라 할지언정 절제력이 부족한 렘브란트를 고운 눈으로 봐 주지 않았다. 30대 초엽 잠깐 맛 본 부와 명성을 끝으로 그는 죽음을 맞기 직전까지 빚쟁이들에 쫏기던 가련한 화가로 살다가 생을 마감했으며 덩달아서 생전 그의 미술 세계는 거의 이해 받지 못했다. 그러나 예술의 가치는 사생활 보다 인생을 예술로 승화시킨 작품으로 평가 받아 마땅하다.

그가 죽고 난 후 100년 후 18세기 말엽부터 인간의 내면적 갈등과 극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낭만주의(Romanticism) 사조가 유럽을 휩쓸기 시작하면서부터 비로소 렘브란트의 자화상 연작들은 인간 영혼 탐색과 심리적 여정의 미술적 자취로써 재평가 받기 시작했다. 2006년 400회째 생일을 맞아 신화나 신비의 베일을 벗고 다시금 전시회를 통해 재점검 받고 있는 렘브란트는 숨가쁜 일상 속의 현대인들에게 자아 숙고의 순간을 제공해 줄지도 모른다. Photos courtesy: Rijksmuseum Amsterdam/Gemäldegalerie Berlin.

*이 글은 원래 『오뜨』 誌 2006년 9월호에 실렸던 글을 다시 게재하는 것입니다.

 

제2회 코치-무지리스 현대미술 비엔날레 2015

KOCHI-MUZIRIS BIENNALE 2014 IN FORT KOCHI, INDIA

Images from Kochi Biennial 2014. Titled “Whorled Explorations” , the second edition of artist-curated (this year curated by Jitish Kallat) Kochi-Muziris Biennale gathered 94 artists from India and around the world to contemplate and comment on Globalization in the context of the this former vibrant and rich port city of world spice trade, science and literature. Art works by participating artists are often serious and soothing in tone without being pretentious; overall earthy, comforting, and involved with materiality; evoking physical presence of five basic elements of nature and core materials of all human civilisations – wood, fire, earth, metal, and water. Photo credit: Kochi Biennale Foundation.

2014년 12월12일부터 2015년 3월29일까지 약 3개월 반 동안 진행될 인도 최초의 현대미술 비엔날레 코치-무리지스 비엔날레 2014가 제2회의 막을 올렸다. 이 신생 현대미술 행사는 현재 인도 현대미술계를 가장 잘 대표하며 국제적인 활동을 벌이고 있는 인도 현대미술가중 한 사람인 지티시 칼랏이 예술감독 지휘봉을 잡아 “Whorled Explorations”라는 대제목을 달고 인도 내외 현대미술인들이 오늘날 가장 흔해진 문화 키워드 “글로벌리제이션(Globalization)”을 미술 작품들을 통해 조망하고 논평한다. 세계 또는 세상이라는 의미의 “월드(World)”와 빙글빙글 소용돌이 치다는 의미의 “훠얼(whirl)”을 합성한 듯히 들리는 중세 영국 형용사 “Whorled”(원래 회전바퀴라는 뜻)는 국경없이 얽히고 섥히고 다양복잡해져 팽창해진 글로벌화된 세상풍경을 잘 응축한다.

과거 현대미술 비엔날레 행사는 흔히 정치인들과 정부 정책가들이 도시개발과 문화산업을 위해 도입하기 시작했다는 이유로 중앙 및 지방정부의 예산을 쓰고도 여간해서 일반관객들과 쉽게 친해지지도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반면, 정부와 정치가들이 주도된 예산 삭감, 조직운영 방훼 같은 난관과 고충에도 불구하고 미술가들이 주도가돼 2013년 발족한 코치-무지리스 비엔날레는 돈과 시장의 논리가 판치는 현대미술계 속에서도 여전히 미술시장의 구미에 맞추기 보다는 미술가들의 독자적인 창조 의지가 더 돋보여 한 조각 신선한 바람처럼 느껴질 만하다. 아니나 다를까. 이제까지 현대미술을 접근해 본 경험이 없던 인도의 일반대중 관객들까지도 이번 비엔날레를 감상하고 좋은 반응을 보이며 이러한 문화행사를 더 요구하게 됐다는 긍정적 평가를 남겼다.

세태를 향한 직선적이고 요란한 논평 – 1960년대 독일의 팝아트

GERMAN POP

독일에서도 팝아트가 있었다? 팝아트는 1960년대 영국과 미국의 일부 미술가들이 주도되어 시작된 지극히 영미권적미술 미학이라 알려져 있다. 독일, 특히 동과 서로 두 국가과 체제권으로 나뉘어져 있던 통일 전 독일에서 서독에서도 자체적인 팝아트 미술 사조가 전개되었다는 사실은 이때까지 대체로 백안시되어 왔던게 사실. 그러한 사실에 착안해 독일에 있는 프랑크푸르트 시른 쿤스트할레에서는 11월 6일부터 내년 2월8일까지 독일 특유의 팝아트의 성격과 그 속에 담긴 사회비평적 특성을 살펴보는 전시회 『독일 팝(German Pop)』 전이 열린다.  전시회 작품 보기

만프레트 쿠트너(Manfred Kuttner), 『타자기(Schreibmaschine)』 1963년, 재료: Typewriter, painted with fluorescent tempera paint, installed on wood 57.8 x 57.8 x 18.7 cm. Stiftung Museum Kunstpalast, Düsseldorf Inv.-Nr. 0.1996.8 Photo: Andreas Hirsch © Estate Manfred Kuttner.

만프레트 쿠트너(Manfred Kuttner), 『타자기(Schreibmaschine)』 1963년, 재료: Typewriter, painted with fluorescent tempera paint, installed on wood 57.8 x 57.8 x 18.7 cm. Stiftung Museum Kunstpalast, Düsseldorf Inv.-Nr. 0.1996.8 Photo: Andreas Hirsch © Estate Manfred Kuttner.

영국에서 리쳐드 해밀턴이 “’오늘의 가정을 그토록 색다르고 멋지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화두로, 대서양 건너편 미국에선 앤디 워홀과 로이 리히텐스타인이 수퍼마켓 제품 포장을 배껴 그리는 것으로써 팝 아트의 본고장 영국과 미국에서 팝 아티스트들은 20세기 후반기 평화 속의 대량생산 대량소비 사회의 갖가지 대중문화 이미지와 라이프스타일을 널리 대중문화의 보편화 현상이자 거부할 수 없는 현실로 인정하며 미술 작품으로 영구히 기록해 찬양했다. 반면 서독의 미술가들 사이에서 전개된 독일판 팝 아트에서는 이 새로운 경제문화 현상이 낳은 일상적 진부함과 소시민적 안일함을 비꼬고 조롱하는 정치적 논조가 더 지배적이었다.

팝 아트가 도시적 미술 형태라는 점, 그리고 이 4 도시가 과거 서독의 경제와 무역을 이끈 주요 도시들이라는 점에서 과거 서독의 핵심 팝 아트의 중심지로서 뒤셀도르프, 베를린, 뮤니히, 프랑크푸르트 4대 도시가 중대한 역학을 했다고 본다. 이들 4 도시들은 저마다 색다른 방언이 있듯이 저마다 다른 ‘시각언어’로 독일식 팝 아트를 발전시켜 1960-1970년대 당시 유럽을 사로잡았던 소비사회 세태를 직설적으로 비판하는 자세를 취했다. 서독의 팝 아트는 젊은 세대들이 기성세대와 가치관에 반항하기 위한 문화운동의 수단으로 활용되었다는 점에서 대중적 이미지를 마냥 찬양하고 글래머화하던 영미권 주류 팝 아트와는 동기부터 달랐다.

람베르트 마리아 빈터스베르거(Lambert Maria Wintersberger) 『분열 제10번(Spaltung 10)』, 1969년, Acrylic on canvas 140 x 115 cm. Museum Morsbroich, Leverkusen © VG Bild-Kunst, Bonn 2014 Photo: Friedrich Rosenstiel, Cologne.

람베르트 마리아 빈터스베르거(Lambert Maria Wintersberger) 『분열 제10번(Spaltung 10)』, 1969년, Acrylic on canvas 140 x 115 cm. Museum Morsbroich, Leverkusen © VG Bild-Kunst, Bonn 2014 Photo: Friedrich Rosenstiel, Cologne.

서독식 팝 아트가 가장 먼저 두드러지게 표출되었다고 평가되는 도시 뒤셀도르프에서, ‘독일 팝’이라는 어휘는 게르하르트 리히터가 제일 처음 사용해 알려졌다. 콘라트 클라펙(Konrad Klapheck), 만프레트 쿠트너(Manfred Kuttner), 콘라트 루에크(Konrad Lueg), 지그마르 폴케(Sigmar Polke),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 같은 일군의 젊은 화가들이 1963년 일명 ‘자본주의적 사실주의(Capitalismt Realism)’로 이름한 서독판 팝 아트 운동을 이끌었다.

제2차 세계대전 패망 이후 라인강변의 기적의 경제재건을 이룩하며 뒤셀도르프와 라인란트를 배경으로 이 자본주의적 사실주의 팝 아티스트들은 지독하게 추상적이고 현실도피적이던 앵포르멜 회화를 버리고 어두웠던 20세기 전반기 독일의 역사를 재평가해 그림으로 그린다는 묵직한 사명감을 주창했다.

정치와 무거운 역사의 수도 베를린의 팝 아트계는 뒤셀도르프 미술 아카데미서 베를린으로 대거 이동해 온 화가들 – 볼프 포스텔(Wolf Vostell), KP 브레머(KP Brehmer), 헤르베르트 카우프만(Herbert Kaufmann) 등 -이 모여 결성됐다.

소비주의 시대가 조장한 소란스럽고 통속적인 세상에서 벗어나 베를린 안 ‘자유세계(Free World)의 섬’에서 조용하게 작업하고 싶다고 선언한 K.H 훼디케(K.H. Hoedicke)나 람베르트 마리아 빈터스베르거(Lambert Maria Wintersberger) 같은 화가들은 1964년 그로쓰괴르셴 35(Grossgoerschen 35)라는 화가들이 주도가 된 화랑을 차리고 그 때까지 유럽 미술계를 숨막히게 잡아쥐고 있던 앵포르멜(Art Informel)과 타시즘(Tachisme)을 전격 배척하고 현실에 기반한 회화로 되돌아가자고 선언했다.

토마스 바이를레(Thomas Bayrle) 『에이잭스 세척제 용기(Ajax)』 1966년. MMK Museum für Moderne Kunst Frankfurt am Main Photo: Rudolf Nagel, Frankfurt am Main.

토마스 바이를레(Thomas Bayrle) 『에이잭스 세척제 용기(Ajax)』 1966년. MMK Museum für Moderne Kunst Frankfurt am Main Photo: Rudolf Nagel, Frankfurt am Main.

그러나 미술사학자들은 독일 특유의 팝 아트의 요람을 프랑크푸르트로 꼽는다. 예나 지금이나 엄밀히 말하건대 프랑크푸르트는 미술의 중심 도시는 아니다. 2차 대전 후 아메리카-하우스(Amerika-Haus)라는 별명으로도 불리던 미군 본부가 설립되었고 미국식 쇼핑몰 거리 차일레(Zeile), 거대한 국제 공항, 세계적인 은행 본사 사무소, 독일  증권거래소가 본부를 두고 있는 가장 미국적인 금융 도시가 바로 프랑크푸르트다.

그러나 토마스 바이를레(Thomas Bayrle)나 페터 뢰어(Peter Roehr) 같은 당시 젊은 서독 출신 화가들은 프랑크푸르트의 바로 이 미국친화적 특성을 감지하고 독일 팝 아트로 직결시켰다. 이 두 화가는 대중 소비자를 상대로 대량생산판매되기 시작한 샴푸, 인스턴트 커피, 가전제품을 신문, 잡지, TV를 통해 떠나갈듯 선전하는 당시 광고 이미지로부터 영감받아 소비주의성 자본주의의 프로파간다성과 저급한 상업주의 이데올로기를 미술로 드러냈다.

한편 뮤니히에서 활동하던 젊은이들, 예컨대 SPUR, WIR, GEFLECHT 같은 아티스트 단체들은 대중만화책에 등장하는 대화 풍선 같은 요소를 그림에 도입하는 등 팝 대중문화에 대한 의구심을 품었던 한편으로 대중소비주의 미학에 담긴 특유의 미학에 야릇한 매력을 느꼈다. 이 젊은 화가 단체들은 급기야 예술가 홀로의 고독한 천재성이라든가 창조의 유일무이성 같은 신화에 의문을 가하기도 했지만 집단적 미술 창조라는 측면에서 결정적인 변혁을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영미식 무비판적, 소비문화 찬양적 “코카 콜라 식민화(Coca-Colonization)”과는 아주 다른 목소리와 색채를 띠었던 서독의 팝 아트는 자본주의 상업문화와 소비주의 문화를 비판하며 일찍이 포스트모더니즘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그런 만큼 영미식 팝 아트에서 느껴지는 가벼움와 글래머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래서 독일식 팝 아트는 일반 관객에게 어딘지 모르게 무겁고, 철학적이다 못해 따분하게 느껴지진 않을까? 어느 정도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미술 운동이 1968-69년 유럽, 미국, 일본의 청년들을 문화혁명이라는 저항과 운동으로 불거지기까지 저변에 들끓던 의식의 발현이었다는 점은 미술사학적으로나 사회문화사적으로 주목할 만하다. 『독일 팝(German Pop)』 전은 독일 금융의 중심도시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시른 쿤스트할레에서 2015년 2월 8일까지 열린다. Images courtesy: Schirn Kunsthalle, Frankfurt am Main.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고대 로마 - 게르마니쿠스의 재를 갖고 로마로 돌아오는 아그리파 (Ancient Rome; Agrippina Landing with the Ashes of Germanicus) 1839년. Tate. Accepted by the nation as part of the Turner Bequest 1856.

윌리엄 터너 『고대 로마 – 게르마니쿠스의 재를 갖고 로마로 돌아오는 아그리파 (Ancient Rome; Agrippina Landing with the Ashes of Germanicus)』 1839년. Tate. Accepted by the nation as part of the Turner Bequest 1856.

윌리엄 터너의 후기 회화 세계

LATE TURNER – PAINTING SET FREE At the Tate

2013년 영화화되어 큰 화재를 모은 스웨덴의 작가 요나스 요나손의 장편소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The Hundred-Year-Old Man Who Climbed Out the Window and Disappeared)』(2009년)은 창조적 마인드와 끊임없는 호기심과 생을 향한 열정이 있는 자에게 나이란 무의미한 숫자에 불과함을 다시 한 번 일깨워줬다. 장수하는 노년 인구가 급격하게 증가하는 추세 속에 있는 요즘 세상에서 노후 인생의 의미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 한편, 인생의 진정한 의미는 노년에 치닫더라도 유연하고 개방된 사고를 키우며 자연을 관찰하고 경외하며 동시에 과학적 탐구를 게을리하지 않는다는 인류 정신을 되세기게 해준다.

윌리엄 터너 『빛과 색채 (괴테의 이론) - 홍수 이튿날 - 모세의 창세기 (Light and Colour (Goethe’s Theory) - the Morning after the Deluge - Moses Writing the Book of Genesis)』 1843년. Tate. Accepted by the nation as part of the Turner Bequest 1856.

윌리엄 터너 『빛과 색채 (괴테의 이론) – 홍수 이튿날 – 모세의 창세기 (Light and Colour (Goethe’s Theory) – the Morning after the Deluge – Moses Writing the Book of Genesis)』 1843년. Tate. Accepted by the nation as part of the Turner Bequest 1856.

영국 화가 조세프 메일러드 윌리엄 터너 (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1775✴︎-1851년✝) 또한 작업 말년기인 1835-50년 약 15년 동안 유난히 폭발적인 창조적 활력과 발군의 시각적 혁신을 이룩했다. 1835년 윌리엄 터너는 환갑을 맞았다. 누가 뭐라해도 이미 ‘장년의 나이’가 된 이 화가는 나이와 노쇄해진 체력에도 아랑곳 않고 더 큰 세상을 보고 역사를 공부하고 외국의 신문물을 배우기 위해 유럽 전역으로의 긴 그림 여행길에 오르곤 하면서 노익장을 과시했다.

터너는 정말 모와 마티스에게 표현적인 색채, 뿌옇고 아련한 대기 분위기 연출하는 법을 가르친 근대미술의 선구자였을까? 일부 서양 미술사 책에 보면, 특히 그가 그린 말기 그림들에 보이는 극도의 추상적이고 물감을 두텁게 입힌 임파스토 기법을 들어서 터너를 19-20세기로 넘어가던 근대기 프랑스 인상파의 선각자인양 가르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실은 사실이 아니다. 그는 자연의 영원불변성을 그림으로 기록해 두고자 했다는 점에서, 시시각각 빛의 변화에 따라 변하는 외부세상을 포착하려 했던 프랑스 인상주의 세계관과는 정반대 입장을 취했다.

터너는 실은 고대 유럽 역사주의와 신비주의에 심취해 있던 18세기형 낭만주의자였다. 터너가 환갑의 나이에 인류역사를 배우기를 계속하며 그림 그리기 열정을 불태웠던 당시 19세기 유럽은 근대 모더니즘이 본격화하기 직전, ‘질풍노도 (Sturm und Drang)’ 자연의 위력에 경외를 바치고 고대 로마 그리스 시대를 되돌아보며 흘러간 역사주의의 향수 속에서 시름하던 시절이었다. 실제로 터너는 당시 독일인들의 낭만주의 서정을 한껏 적셨던 작곡가 리햐르트 바그너 (Richard Wagner)와도 정서적으로나 세계관적인 측면에서 아주 유사했던 바그너리언이었다.

윌리엄 터너 (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푸른 리지에서의 일몰 (The Blue Rigi, Sunrise)』1842, Watercolour on paper, 297 x 450 mm. Tate collection.

윌리엄 터너 (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푸른 리지에서의 일몰 (The Blue Rigi, Sunrise)』1842, Watercolour on paper, 297 x 450 mm. Tate collection.

런던에서 이발사의 아들이라는 지극히 조촐한 배경의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열 네살의 어린 나이에 재능을 인정받아 런던 로열 아카데미에 입학해 그림 공부를 한 후 로열 아카데미 회원이 되고 교수로 발탁되며 노년까지 활발한 활동을 벌이며 사회적 존경까지 받았던 그는 내면적으로는 전근대적 인물이었으나 사회적으로는 어느새 근대적 업적주의의 장점을 누렸던 시대운을 잘 타고난 운 좋은 미술가이기도 했다. 그 덕분에 그는 미술컬렉터가 제시한 거금의 돈을 거부하고 자신의 작품 모두와 스케치 및 기록물을 간직해 두었다가 테이트 미술관에 기증할 수 있었다.

영국  2014년 개봉된 영화 『미스터 터너(Mr Turner)』(티모시 스폴(Timothy Spall) 주연)에서 묘사되었듯, 땅딸막하고 무뚝뚝했던 화가 터너 씨는 혁명적이고 위대한 미술을 창조했지만 사생활 면에서 조촐하다 못해 때론 인격적으로 의심스러운 면모까지도 지녔던 한 남자였다. 이 영화를 만든 마이크 리(Mike Leigh) 감독은 과연 화가 터너를 훌륭한 미술가로 보여주려했던 것일까 아니면 단점을 지녔던 한 인간에 불과함을 보여주려 했을까? 이 영화의 의도는 그다지 중요치 않을지도 모른다. 훌륭한 미술가는 오로지 불타는 창조적 열정과 그나 남긴 훌륭한 미술작품을 통해서 역사와 관객에게 평가받을 뿐이므로. 영국 테이트 미술관에서 열리는 『터너의 후기 회화 – 회화를 해방시키다. (Late Turner – Painting Set Free)』 전은 2014년 9월10일부터 2015년 1월25일까지 테이트 브리튼 린버리 갤러리에서 전시된다. Images courtesy: Tate Britain, London.

워커 에반스 – 20세기 포토저널리스트

워커 에반스 「곳간」 캐나다 노바스코샤, 1969-1971. Collection of Clark and Joan Worswick © Walker Evans Archive,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워커 에반스 「곳간」 캐나다 노바스코샤, 1969-1971. Collection of Clark and Joan Worswick © Walker Evans Archive,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WALKER EVANS – A Life’s Work

미국은 물론 전세계를 경제공황으로 몰아넣었던 1929년 10월 29일 블랙프라이데이와 1930년대 미국인들의 빈곤과 피폐상을 사진기로 기록했던 ‘다큐멘터리 사진가’ 워커 에반스 (1903-1975). 특유의 냉철한 다큐멘터리 스타일로 대공황기 변화하는 미국의 풍경과 인물들을 포착했던 에반스의 사진 속에는 평범한 일상과 서민들을 보는 미묘하고 예민한 감성이 담겨있다.

「공공광장의 군중 (Crowd In Public Square)」 1930년대, 143 x 248 mm. Lunn Gallery Stamp (1975) © Walker Evans Archive,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공공 광장에 모인 군중 (Crowd In Public Square)」 1930년대, 143 x 248 mm. Lunn Gallery Stamp (1975) © Walker Evans Archive,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오늘날 워커 에반스는 대체로 미국 공황기의 사진가로 알려져 있지만, 그가 일상 생활 속의 평범한 사람들이 겪는 빈곤과 절망을 사진으로 담아내기 시작한 때는 1920년대 중반기.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하여 본래 프랑스 문학에 심취해 문학번역가와 작가가 되길 희망하던 에반스가 1년 간의 파리 여행을 마치고 뉴욕으로 돌아온 1927년, 한스 스콜레(Hanns Skolle), 폴 그로츠( Paul Grotz), 하트 크레인(Hart Crane) 같은 예술가들의 격려로 사진가가 되기로 결심했으니 때는 젊은 워커 에반스가 25세의 나이로 직업 사진가가 된 해였다.

초기 시절 – 뉴욕 제아무리 뛰어난 인재라 한들 출중한 선배 예술인들의 영향과 훌륭한 인맥 없이는 재능의 날개를 펼칠 수 없는 법. 이어서 1928년 뉴욕 근대미술관(MoMA)의 연줄이 되어준 링컨 키르스타인(Lincoln Kirstein)을 만나 MoMA와의 연줄을 구축한 중요한 해였으며 사회적 사실주의 화가 벤 샨(Ben Shahn)과 우정을 나누기 시작했을 뿐만 아니라, 동료 여류 사진가 베레니스 애벗(Berenice Abbott)을 통해서 프랑스 다큐멘터리 사진가 외젠느 아제(Eugène Atget)와 아우구스트 산더(August Sander)의 작품세계에 접하게 된 그야말로 분수령적 시기였다. 이에 기반해 에반스는 자신의 사진작품과 평소 갈고닦던 문필 재주를 활용한 시집 『The Bridge (다리)』 (하트 크레인 저)를 1930년 출간했고, 곧이어 1931년에 빅토리아풍 건축을 사진으로 기록한 에세이집 『사진의 재등장(The Reappearance of Photography)』을 출간했다.

1932년 그는 뉴욕의 갑부 올리버 제닝스의 제안을 받아 그와 함께 요트를 타고 4개월 동안 타히티 섬으로 가 35mm 영화를 찍고 돌아왔다. 부자와 빈자 사이의 빈부차가 전에 없이 더 컸던 경제공황기, 전에 없이 화려하고 개인적인 향락추구에 정신없던 미국 한량계급과 어울려 시간을 보내는 것에 내면적 갈등을 느꼈던 워커 에반스는 이후 이내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도시의 거리나 농가로 눈을 돌렸다.

「의류가게 바깥에 서 있는 젊은 여인 (Young Women Outside Clothing Store)」 1934-35년, 114 x 184 mm. Lunn Gallery Stamp (1975) © Walker Evans Archive,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의류가게 바깥에 서 있는 젊은 여인 (Young Women Outside Clothing Store)」 1934-35년,
114 x 184 mm. Lunn Gallery Stamp (1975) © Walker Evans Archive,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에반스의 작업을 눈여겨 본 경제주간지 『포춘(Fortune)』 은 워커 에반스에게 쿠바로 여행하여 사진을 찍어오라는 임무를 주었다. 1933년 독재자 제라르도 마카도 축출을 위한 내전이 벌어진던 쿠바에서 찍어 온 사진을 모아 1934년 칼스턴 빌즈(Carlston Beals) 저 『쿠바의 범죄(The Crime of Cuba)』라는 책 출간에 기여했으며, 뉴욕 근대미술관은 이 쿠바 사진들을 모아 『19세기 주택 사진전(Photographs of 19th Century Houses)』을 기획해 워커 에반스의 사진 39점을 전시에 포함시켰다. 이 쿠바 사진취재를 통해서 에반스는 짧게나마 헤밍웨이를 만나 알게 되었다고 알려진다.

뉴욕 근대미술관에서의 성공에 힘입어서 1935년, 워커 에반스는 미국 연방 농업안정청(FSA: Farm Security Administration)의 의뢰를 받고 공황기 미국 농민들의 생활상을 기록하는 사진가로 일했다. 이 시기의 작업은 에반스를 지금까지도 미국 대공황기 사진가로 이름을 남기게 해준 프로젝트로 기억되고 있다. 그는 다시 한 번 뉴욕 근대미술관의 의뢰를 받아 이번에는 『아프리카 흑인 미술(African Negro Art)』이라는 전시를 위해 미국 남부로 여행하며 미국의 흑인 인구들의 생활상을 기록했다. 이 프로젝트는 그에게 넉넉한 수고료는 물론 피카소나 모딜리아니의 근대미술작품과 동일 선상에서 전시되었던 명예로운 순간이었다.

이어서 1936년 미국 남부 농촌의 빈곤을 고발하는 특집 기사 취재를 위해 제임스 아지 『포춘』 지 편집장과 함께 알마바마 주 헤일 카운티에서 사진을 찍었다. 이 기사는 잡지기사로서는 부적합하단 판정을 받고 보판되었으나 결국 『Let Us Now Praise Famous Men)』이라는 단행본으로 출간되어 백인 농촌가족들의 쓰라리고 고달픈 빈곤생활상을 담담하고 냉철하게 표현했다.

그러나 제아무리 냉철한 관찰자로서의 사진기록작업이라고는 하나 정부 위탁을 받고 정치적 의도가 담긴 사진을 생산해야했던 그는 급기야 “정치는 절대로 그만!”이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워커 에반스는 연방 농업안정청 수주 사진작업은 1938년를 끝으로 그만두었다.

「팝스트 블루 리본 광고판(Pabst Blue Ribbon Sign)」 일리노이주 시카고, 1946년. Collection of Clark and Joan Worswick © Walker Evans Archive,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팝스트 블루 리본 맥주 광고판(Pabst Blue Ribbon Sign)」 일리노이주 시카고, 1946년. Collection of Clark and Joan Worswick © Walker Evans Archive,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농업안정청 일을 접고 난 후 워커 에반스가 사진 렌즈를 들이댄 주제는 뉴욕 지하철이었다. 혼자서 커다란 카메라를 지하철 승객들에게 들이대었다간 따귀를 얻어맞기 십상이던 이 시절. 에반스는 친구 헬렌 레빗과 함께 두 승객인척 돌아다니면서 몰래 카메라를 찍는 수법을 고안했다.

에반스는 자그마한 35mm 콘탁스 카메라의 뷰파인더만 살짝 옷매우새 사이로 내밀어 코트나 자켓 속에 숨기고 셔터를 케이블에 소매 속으로 연결시켜 몰래 찰칵찰칵 명장면들을 잡아냈다.

인물 사진이란 “스튜디오 안에서 모델을 앉혀놓고 조명과 연출을 가미해 찍어야 한다고 믿었던 당시 인물사진의 원칙을 거부한 미학적 반항이었다”고 에반스는 훗날 회고했다.

제임스 아지(James Agee)와의 인연 덕택에 에반스는 1945년부터 1965년까지 『포춘』 지에서 정식 사진기자로 일하며 이 잡지의 모든 사진과 편집을 책임졌다. 그렇지 않아도 그 지긋지긋한 제2차 세계대전이 미국의 승리로 끝난 후 서방세계는 전에 없는 경제재건과 새로운 문화로 흥청되기 시작했다.

사진예술과 현실을 하나로 결합시킬 수 있었던 포토저널리즘은 그에게 매우 적합한 작업이었다. 20세기 후반, 전후 경제부흥과 포스트모던 풍요의 시대가 되자 특히 에반스는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Sports Illustrated)』 지의 사진기자로 변신해 대서양 건너편 런던으로 가 일하면서 영국적 삶에 푹 빠지기도 했다.

1960년대와 1970년대 내내 영국, 스위스, 캐나다를 여행하며 미국 바깥의 세상을 경험하며 작업했던 그의 고요적막한 분위기의 흑백사진 작품 세계는 마지막까지 거의 변하지 않았다. 1928년부터 사망한 해인 1974년까지 워커 에반스가 찍은 수많은 사진들 중에서 200여점을 선별해 공개하는 전시회 『Walker Evans – A Life’s Work』가 베를린 마르틴-그로피우스-바우(Martin-Gropius-Bau)에서 2014년 7월25일부터 11월9일까지 열린다. Photos courtesy: Martin-Gropius-Bau, Berlin.

그래도 미술은 계속된다.

알빈 에거-린츠 (ALBIN EGGER-LIENZ, 1868–1926), 『죽음의 무도 (Der Totentanz (IV. Version)』, 1915 Danse Macabre (version IV), 202 × 244,5 cm / Casein on canvas, Leopold Museum, Wien.

알빈 에거-린츠 (ALBIN EGGER-LIENZ, 1868–1926), 『죽음의 무도 (Der Totentanz (IV. Version)』, 1915년, 202 × 244,5 cm / Casein on canvas, Leopold Museum, Wien.

제1차 세계대전 시대 오스트리아 미술

AND YET THERE WAS ART! – AUSTRIA 1914-1918

1914-1918년 사이 제1차 세계대전은 근대기 급속히 진보한 무기 및 전투 기술에 힘입어서 그 이전 그 어떤 전쟁 보다도 잔인했으며 수많은 사상자를 냈던 그야말로 ‘20세기 거대한 원초적 재앙 (great seminal catastrophe)’ 였다. 비참과 혼란으로 범벅된 이 엄청난 비극 속에서도 미술은 계속되었다. 구체제식 제국주의, 글로벌리즘, 다인종∙다언어가 뒤섞인 다문화가 농익고 곪아터지며 서서히 구체제 종말을 맞고 있던 오스트리아에서는 어느 미술가들의 눈과 손을 통해서 어떤 미술이 전개되고 있었을까? 비엔나에 있는 레오폴드 미술관에서는 『그래도 미술은 계속되었네! (And Yet There was Art! – Austria 1914-1918)』 전을 9월 15일까지 열어 점검한다.

손님으로 여기를 왔더니 당신네는 나를 폭탄으로 환대하누나! –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

»소집 (Der Ruf)« 지 1912년11월호 전쟁 특집호 표지로 선정된 에곤 실레의 자화상, 22,8 × 14,8 cm / Letterpress. Private collection.

»소집 (Der Ruf)« 지 1912년11월호 전쟁 특집호 표지로 선정된 에곤 실레의 자화상, 22,8 × 14,8 cm / Letterpress. Private collection.

올해 2014년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지 100년이 되는 해.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를 방문중이던 프란츠 페르디난트 합스부르크 황실 황태자와 소피 폰 호헨베르크 황태자비가 열렬 보즈니아-세르비아계 해방주의자 가브릴로 프린칩에 의해 저격당한 사건은 미술가들의 운명까지도 뒤흔들었다.

전쟁이 터지자 갑자기 미술 시장은 덩달아 침체되었다. 미술가들은 전쟁터로 징집돼 나가야 하는 슬픈 운명에 처했는데, 에곤 실레(Egon Schiele), 알빈 데거-린츠(Albin Egger-Lienz), 안톤 콜릭(Anton Kolig)은 바로 그런 미술가들이었다. 이탈리아, 루마니아, 러시아, 세르비아 국경으로 배치되어 최전방에서 전투에 임하며 그림 그리기를 계속했던 이들의 눈과 손을 통해서 오늘날까지 제1차 세계대전의 파멸과 광기가 기록되었다.

전쟁 포고와 징집 선전
1912년 2월부터 1913년 11월까지 근 2년 동안 총 7부를 찍어 남성 인구로부터 징병을 호소하기 위해 출판되었던 『소집(Der Ruf)』 지는 전쟁이란 “파괴적인 재앙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을 위한 카타르시스적인 기회”라고 전쟁의 의미를 재정의했다. “전정은 피를 통해서 세상에 온다”고 외치며 전쟁을 선동하고 징집을 독려하는 이 잡지 속 기사들은 종종 강렬한 원색과 격정적 필치가 주특성인 표현주의 미술을 활용하기를 좋아했다. 나태와 게으름에 빠진 중산층들을 백일몽에 빠진 정신상태로부터 흔들어 깨우는데 전쟁 만큼 좋은 수단은 없다고 외쳤으며, 미술가들은 보는이의 감정을 건들고 뒤흔드는 미술로 이 안일에 빠진 인구를 일깨우라는 임무를 부여받고 전쟁에 동원되기에 이른다.

에곤 실레 (EGON SCHIELE, 1890–1918) »병든 러시아 군 (Kranker Russe)«, 1915년, 43,6 × 30,4 cm, Black chalk, gouache on brown paper, mounted on Japanese paper. Leopold Museum, Wien

에곤 실레 (EGON SCHIELE, 1890–1918)
»병든 러시아 군 (Kranker Russe)«, 1915년, 43,6 × 30,4 cm, Black chalk, gouache on brown paper, mounted on Japanese paper. Leopold Museum, Wien

전쟁은 죽음의 무도회(Danse Macabre)
“독일이 러시아에 전쟁을 선포하다” – 프란츠 카프카는 충격에 쌓여 소리 높여 절규했고, 극작가 아르투르 슈니츨러는 “세계 전쟁. 세계 파멸.”이라고 응축했다.

보통 예술가들이란 대체로 전쟁 같은 죽음과 처참의 경험을 추구하지 않는 민감한 감성의 족속들이지만, 알빈 에거-린츠(Albin Egger-Lienz)는 이탈리아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여하기 직전인 1915년에 이 전쟁에 직접 참여하기 위해 자진 지원해 입대했다. 전쟁을 “운명의 무자비한 행보”로 보았던 그는 심장 건강이 좋지못해 입대 면제 판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입대를 고집해 황실 지정 전쟁 홍보실 미술단(Kunstguppe der k.u.k. Kriegspressequartier)에 정식 회원이 되어 1916년 오스트리아 남단 이탈리아 국경에서 근무하며 전투 장면을 프레스코풍 그림으로 기록하는 일을 했다.

적군에 대한 연민, 인류 보편에 대한 동정
“나는 이제 군인이 되어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14일을 보냈다네.” 1915년 군대 징집되어 훈련을 받던 섬세한 감성의 소유자 에곤 실레에게 전쟁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럽고 힘겨운 경험이었다. 그림을 잘 그리는 화가였던 점이 참작되어 실레 역시 황실 전쟁 홍보실 미술단으로 편입되어 전투 최선전으로 내몰리지는 않았다.

그가 미술단에서 주로 담당했던 임무는 포로수용소에 수감된 적군 러시아 포로들의 초상과 생활상을 두루 그림으로 기록하는 일이었다. 복무중 쓴 편지에 보면 러시아 포로들에 대한 인간적 동정과 평화주의로 그득했던 실레의 심성을 엿볼 수가 있다. “아뭏든, 나는 적군 쪽에 훨씬 더 마음이 간다네. 그들의 나라는 우리 나라 보다 월등히 흥미롭더군. 진정한 의미의 자유도 있고, 여기선 찾아보기 어려운 생각 깊은 사람들도 더 많다구. 매 시간 마다 이곳에서 그런 사람들이 썩고 있다니, 이건 손실이라구. …”

오스카 코코슈카 (OSKAR KOKOSCHKA, 1886–1980) 『원칙 "자유, 평등, 형제살 (Das Prinzip (»Liberté, Egalité, Fratricide«), 1918년, 41,2 × 31,2 cm / Color lithograph on paper Leopold Museum, Wien © Fondation Oskar Kokoschka/Bildrecht, Wien 2014

오스카 코코슈카 (OSKAR KOKOSCHKA, 1886–1980)
『원칙 “자유, 평등, 형제살상” (Das Prinzip (»Liberté, Egalité, Fratricide«), 1918년, 41,2 × 31,2 cm / Color lithograph on paper Leopold Museum, Wien © Fondation Oskar Kokoschka/Bildrecht, Wien 2014

실존적으로 힘들었던 전쟁기는 실레에게는 예술적인 돌파력을 안겨줬는지, 특히 전쟁이 끝나갈 무렵이던 1917-18년이 되자 그의 작품들은 과거와는 달리 인생, 공포, 좌절, 죽음 같은 멜랑콜리적이고 위태로운 요소를 한결 제거하고 한결 조형적이고 기하학적 위주로 그림을 그리며 작품성을 한결 드높여 미술계의 총아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단꿈도 잠시.

전쟁이 막 끝나기 전 실레는 1918년 2월 클림트의 임종을 지키며 임종 초상을 그렸고, 그 자신 전쟁이 끝나자마자 같은 해 가을 유럽에서 창궐하던 스페인 독감에 걸려 28세라는 때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존재의 고통, 전쟁의 트라우마
그런가하면 독자적인 표현주의 그림을 그리던 오스카르 코코슈카(Oskar Kokoschka)는 최전방에서 기갑군으로 싸우면서 육체적 부상과 깊은 정신적 상처를 받고 돌아와 전쟁의 참혹함을 되세기는 격렬한 그림을 계속해 그렸지만 끝내 오스트리아 미술계의 인정을 받지는 못했다.

전쟁통의 우울을 미술로 표현한 또다른 화가 안톤 콜릭(Anton Kolig)은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마자 전쟁을 피해 망명하려 애쓰다가 어렵사리 이탈리아를 경유해 남 프랑스로 피신했지만 결국 1916년 전쟁 기록 화가로 일하게 되었다. 그가 특히 많이 그린 그림은 포로 수용소에 감금된 적군 지휘관들의 초상화였으나 그의 그림은 너무도 솔직했던 나머지 전쟁 홍보용 그림으로는 부적합하다는 판정을 받았다. 대신 콜릭는 전투 장면이 담긴 최전방 풍경화를 잘 그려서 1917년 황실 전쟁 홍보실 전속 화가로 위촉되어 전쟁 기록화를 다수 그려 남겼지만, 전쟁통 내내 “나는 막중한 고통 속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며 고통스러워 했다.

20세기를 연 전 세계적 글로벌 전쟁이자 제2차 세계대전의 씨앗이 되었던 미완의 전쟁 – 제1차 세계대전은 인류 역사에서 참혹하고 무지막지한 혁명의 고비였다. 그러나 현재의 눈에서 본다면 구체제 절대주의를 청산한 유럽의 체재 변혁기이자 전 인류를 계급의 ‘감옥’으로 해방시켜준 ‘민주주의’의 출발점으로 보기도 한다. 그리고 미술은 평화기이든 전쟁기이든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다. Images courtesy: Leopold Museum, Vienna.

12년 전에 본 일러스트레이션 예술의 현재와 미래

MIKKELI’S ILLUSTRATION TRIENNIAL

올해[2002년]로 제 6회를 맞는 미켈리 일러스트레이션 트리엔날레(Mikkeli’s Illustration Triennial)는 올 여름 미켈리에서 열리는 최대 화재의 여름 시즌 전시회이다. 핀란드의 남쪽 항구에 위치한 수도 헬싱키로부터 북동쪽 방향에 기차로 2시간 여 거리에 위치한 미켈리는 사이마, 푸울라, 키베시 등 3대 내륙 호수를 끼고 자리하고 있는 중소도시. 미켈리 미술관은 매 3년마다 한 번씩 북구 유럽 스칸디나비아 출신 우수 그래픽 디자이너들을 초대해 일러스트레이션 전시를 연다. Continue reading

클림트 풍경화가로 다시보기

GUSTAV KLIMT’S LANDSCAPES

올해[2002년]로부터 약 2년전인 2000년 가을, 오스트리아 빈에 자리한 갤러리 벨베데레에서는 《구스타브 클림트와 여인들》展이 열려 이곳 국내외 미술애호가들의 큰 관심을 끌었던 바 있다. 벨베데레 갤러리가 있는 벨베데레  궁은 오스트로-헝거리 제국 시절 1714-22년 무려 8년에 걸쳐서 사보이의 오이겐 왕자가 여름 별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지은 바로크 양식 궁전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립 미술관으로 지정되었는데, 클림트를 비롯해서 에곤 쉴레, 리햐르트 게르스틀, 오스카 코코슈카 등 19-20세기 전환기 오스트리아 표현주의 화가들의 대표작들을 소장하고 있는 곳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 곳이다. Continue reading

패션과 미술의 해후

ART MEETS FASHION, FASHION MEETS ART

과거 그 어느때 보다도 오늘날 만큼 패션과 미술이 동등한 위치를 점하며 사람들의 관심과 동경을 한몸에 받고 있는 때는 없었다. 폼에 살고 폼에 죽는 요즘의 수많은 패션 추종자(fashion victim)들이 매년 매계절 마다 거리와 백화점 매장을 메우며 신유행을 정신없이 뒤쫏고 있고, 미술은 더이상 소수의 가난하고 고뇌하는 숨은 천재들과 난해한 말장난을 즐기는 평론가들만의 전유물이 아니게 되었다. Continue reading

문화재 이전인가 희대의 미술품 도난 사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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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인 갤러리 동쪽벽 광경. 세잔느의 『누드가 있는 풍경 (Les grandes baigneuses)』 캔버스에 유채 132.4 x 219.1 cm과 오귀스트 르노아르의 『화가의 가족 (La famille de l’artiste)』 캔버스에 유채 1896년 작. The Barnes Foundation, Merion, Pennsylvania.

필라델피아 반스 재단 미술컬렉션 이전에 즈음하여

BARNES COLLECTION IN PHILADELPHIA

매년 여는 국제 예술 페스티벌 말고도 미국의 역사 도시 필라델피아가 자랑스럽게 여기는 문화유산이 하나 더 있다. 바로 반스 재단 미술 컬렉션이다. 반스 재단은 故 앨버트 반스 박사가 평생 모은 주옥같은 미술품 컬렉션의 보금자리다. 현재 감정 시세 250억 달러 (우리돈 약 27조원)라는 막대한 가치의 미술품 총 2천5백여점 (그 중 회화의 비중은 800여점)이 보관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올 7월3일 반스 컬렉션은 문을 잠시 닫았다. 반스 재단의 허술한 재정관리와 근 10년에 걸친 법률 공방 끝에 반스 컬렉션은 지난 85년 넘는 세월 보금자리였던 메리온을 떠나 필라델피아 도심 서부 벤자민 플랭클린 파크웨이 거리에 지어질 새 건물로 이전할 채비를 갖추고 있다.

7월초 반스 미술 재단이 내년 이전을 이유로 휴관을 선언하고 소장품 이전에 착수하자마자 구미권 미술계와 언론은 잔뜩 술렁댔다. 그토록 값비하고 그많은 수량의 국보급 미술품을 한꺼번에 옯기는 대이동 작전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 본 적 없는 규모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또 어느 작품을 몇 점 어느 트럭에 어떻게 무사히 운반하는가는 숨가쁜 헐리우드 첩보영화를 방불케할 만큼 극도로 비밀스럽고 조심스럽다. 미술품은 미술관에 걸려 있을 때보다 운반 도중에 도난당하는 경우가 더 많다. 어디 그뿐인가. 혹 제아무리 도난범죄로부터 안전하다 할지언정 모름지기 미술품이란 매번 이동할 때마다 크고작게 내외적 손상을 받기 때문에 복원전문가들은 가급적 미술품의 이동을 말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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죠르죠 데 키리코 (Giogio de Chirico) 『앨버트 반스 초상 (Portrait of Albert C. Barnes)』 캔버스에 유채 1926년 작품. © The Barnes Foundation, Merion, Pennsylvania.

일반인들이 잘 모르고 있던 반스 재단에 대한 미술계의 관심이 집중되기 까지는  2009년에 제작된 다큐멘터리 영화 『도난당한 미술 (The Art of the Steal)』의 공이  컸다. 이 영화는 故 앨버트 반스 박사의 사유 미술 컬렉션의 설립의도를 묵살한채 이 컬렉션을 갈취하려 혈안이 된 필라델피아 시 정치가들과 주지급 재단 위원들의 탐욕과 음모를 생생하게 묘사해 놓았다. 문화유산이 막강한 자산이 된 요즘, 반스 컬렉션의 소장품은 필라델피아의 문화적인 위신을 한껏 높여줄 뿐만 아니라 시정부가 추진하는 문화관광 산업 및 파생 수입원에 더없이 요긴한 밑천이 되어 줄것이라는 속셈이 깔려있다.

30대 말엽 미술 컬렉터로 변신하기 전까지만 해도 반스 박사의 본업은 화학자였다. 본래 약사가 될 생각으로 펜실바니아 대학에서 화학을 수학한 후, 1899년에 아가이롤 (Argyrol)이라는 기적의 여성용 청결제를 개발했다. 항생제가 발명되기 이전이었던 당시, 아가이롤은 임질로 인한 여성병과 신생아 실명을 예방해준 신약으로 각광받으며 큰 매출 성공을 거두었고 그 결과 반스 박사는 백만장자가 되었다.

마침 때는 유럽에서 다양한 미술 사조와 창조 운동이 숨가쁘게 펼쳐지고 있던 20세기 모더니즘 시대. 반스 박사는 직접 프랑스로 여행가 머물면서 당대에 내노라하는 아트 딜러와 거장 미술가들을 직접 만나보고 작업실을 둘러본 후 손수 고른 작품만을 사들였다. 예컨대 피카소와 마티스는 딜러 거트루드 스타인을 통해서, 모딜리아니와 데 키리코는 폴 기욤을 통해서 대거 소장하게 된 화가들이다. 요즘으로 치자면 당시 반스 박사는 일찍이 미래 거장을 꿰뚫어 볼 줄 알았던 탁월한 감식안을 갖춘 아방가르드 미술 컬렉터였다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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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스 재단 미술컬렉션 메인 갤러리 서쪽벽 광경. 위의 작품은 죠르쥬 쇠라 (Georges Seurat)의 『모델들(Poseuses)』, 아래 작품은 폴 세잔느 (Paul Cézanne)의 『카드놀이를 하는 사람들 (The Card Players)』. The Barnes Foundation, Merion, Pennsylvania.

반스 박사가 유럽을 여행하며 모은 미술작품들은 대체로 파리 인상주의와 후기 인상주의 계열 작품들이 백미로 꼽힌다. 르노아르의 그림 180여점, 세잔느 59점, 마티스 46점, 피카소 21점, 드가 7점, 고흐 7점을 포함하여 일부 전문가들은 반스의 소장품을 전세계를 통틀어 가장 우수한 인상주의 미술 컬렉션이라고 감히 평가한다. 특히 세잔느가 『카드놀이를 하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그린 5개 연작중에서도 반스 재단 소장품은 작품 규모가 제일 크고 완성도가 높다고 여겨지고 있다.

“인류 전체를 사랑하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보다 쉽다” – 미국의 철학자 에릭 호퍼 (Eric Hoffer)가 이런 말을 했다. 반스 박사는 평소 성격이 퉁명스롭고 당시 필라델피아 교외에 살던 부유한 지주급 이웃들과 그다지 잘 어울리지 않았다고 한다. 반면, 푸줏간집 아들로 태어나 본직 약제사에서 미술 컬렉터로 변신한 앨버트 반스 박사는 자수성가한 백만장자가 되어서도 자신의 소박한 출신을 한번도 잊지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주옥같은 자신의 미술소장품을 흠모하던 콧대높은 미술계 인사들이나 사교계 방문객들의 관람요청에는 까탈스럽게 굴었지만 소시민 감상객과 학생들에게는 흔쾌히 전시실과 도서관 현관을 활짝 열어주었다고 한다.

반스 컬렉션 재단의 설립자 앨버트 반스 (Albert C. Barnes) 박사는 필라델피아 도심을 피해 차로 20분 거리에 있는 한적한 교외 마을 메리온 (Merion)에 토지를 매입하고, 건축가 폴 크레 (Paul Cret)에게 설계를 맡겨서 세기전환기 아르데코풍으로 디자인한 개인 저택을 1925년에 완공하여 소장품 전시장으로 활용했다. “반스 재단은 미술을 제정신으로 감상할 수 있는 미국에서 유일한 곳”이라고 마티스는 말한 적이 있는데, 고즈넉한 교외에 펼쳐진 원예정원, 유럽풍 빌라 건축, 회화와 조각을 빼곡하게 나란히 배치시킨 전시 배열법은 반스 컬렉션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친밀하고 독특한 감상 포인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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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 (Vincent van Gogh) 『우편배달부 (죠셉 에티엔느-룰랭) (The Postman (Joseph Etienne-Roulin))』, 1889년 작, 캔버스에 유채, 65.7 x 55.2 cm © The Barnes Foundation, Merion, Pennsylvania.

미술작품의 진정한 소유자는 누구인가? 오늘날 문화는 소수 특권층의 사유재산이라기 보다는 만인이 공유하는 공공적 유산이라는 개념이 널리 일반화되었다. 영국의 대영박물관, 미국의 스미소니언 박물관 등 국립으로 운영되는 박물관들이 무료입장제로 관객에 공개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생전 반스 박사가 자신의 미술 컬렉션이 길이 비영리 교육 재단으로 활용되길 바란다는 뜻을 밝힌 법적 유서를 남긴 이유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재단 창설자의 사유재산의 본래 의도를 무시하고 시정부가 재정적 부실을 핑계삼아 반스 컬렉션을 자의로 해체 이전한 후 관광명소로 만들기로 한 이 결정을 과연 단순한 문화재 보금자리 이전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개인 문화유산와 운영철학에 대한 침해로 볼 것인가?

그래서 반스 컬렉션의 이주에 저항하는 반대 세력은 지금도 만만치 않다. 특히 반스 재단에서 미술사 교육과정을 거친 학생들과 회원들에 따르면, 재단의 도심 이전 결정이 반스의 소장품이 지닌 막대한 가치를 알아챈 필라델피아 시 정부와 지주들이 주도돼 반스 재단을 분산시키고 갈취하려는 본 의도를 은근슬쩍 감추기 위한 마케팅 조작에 다름아니라고 역설한다.

반스 컬렉션 소장품들이 새 반스 컬렉션 미술관 (Tod Williams Billie Tsien Architects 설계)으로 옮겨져 전시 채비를 갖추고 2012년 봄에 개장하면 반스 재단은 더 이상 교육의 위한 사유 문화재단이 아니라 유료입장제 시정 관광명소로 탈바꿈하게 될 것이다. 그 사이 현재 공시가 1억5천만 달러를 호가하는 원 반스 재단 건물은 다른 용도로 활용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약을 안은채 알보레툼 수목원 안에 지금도 호젓이 서있다. 우수한 문화재의 가치는 현시가로 매길 것이 아니라 돈으로 값을 매길 수 없는 귀중한 보물이라는 인류 역사적 진실을 다시금 환기해 볼 것을 재촉하는 듯하다.

* 이 글은 본래 『크로노스』 코리아 (CHRONOS Korea) 지 2011년 9/10월호에 실렸던 글을 다시 게재하는 것입니다.